우측 산기슭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앞의 것은 일제시대 때 조성한 것이고, 뒤의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한 석종형 부도다. 약간의 변형과 장식이 있긴 하지만 매우 소박하고 아담하다. 마침내 비암사로 올라가는 돌계단 앞에 이르렀다. 계단 꼭대기에는 800여년된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비암사설경/임재만
비암사는 생각보다 큰 절이다. 이 절은 언제 창건되었을까. 기록이 사라지고 역사를 잃으면, 전설과 풍문이 대신 나서서 설치게 된다. 이 절은 백제의 부흥을 기원하던 백제 유민들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충남 유형문화재 79호인 극락보전과 119호인 3층석탑
삼층석탑과 극락보전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3층 석탑으로 다가가 이모저모 살펴본다. 어쩌면 이 탑이 없었다면 비암사라는 절은 이름없는 절이 되어 벌써 쇠락하고 말았을는지 모른다. 이 탑 꼭대기에서 1960년에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국보 제106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보물 제367호), 미륵반가사유석상(보물 제368호) 등 3개의 비상(碑像)이 발견됨으로써 비암사는 비로소 세상에 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청주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삼층석탑은 1층 기단 위에다 3층의 몸들을 올린 형식이다. 1982년에 복원 공사 때 없어진 기단부를 보완하고 뒤집혀 있던 석재들을 바로 잡은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기단과 몸돌의 4면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둔해 보이고,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을 크게 줄이는 등 비례감이 일정치 않은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보전의 아미타불과 왼쪽의 까만 것은 국보모사품으로 진품은 청주박물관보관
탑 뒤에 선 극락보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아담한 건물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의 기능을 겸하기도 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주불로는 어떤 중생이라도 지극 정성으로 부르면 아름다운 서방정토로 데려간다는 아미타불을 모셨다.
세 개의 비상은 비석 형태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형식이다. 석질은 모두 연질의 납석 종류이며 적갈색을 띠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후, 한때의 왕도였던 공주의 인근에 있는 유물을 이 절에 봉안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국보106호-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좌), 보물367호-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중), 보물-368호-미륵보살반가석상(우)/안병기 청주박물관소장
국보 제106호 삼존석상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 형태이다. 정면엔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고 나서 새긴 것이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하다. 앉은 자세가 매우 안정돼 있다. 또 양쪽 측면에는 비파, 생황, 긴 피리, 장구, 금, 젓대, 배소 등을 연주하는 8명의 천인들이 둥둥 떠 있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비상에는 "전(全)씨들이 마음을 합쳐 아미타불과 관세음, 대세지보살상을 삼가 석불로 새긴다. 계유년 4월15일…중략…목(木) 아무개 대사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 대신, 7세(七世 )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계유년은 문무왕 13년(673)이다. 이 비상의 내용에 입각해 지금도 이곳에선 해마다 4월 15일이면 괘불을 걸고 백제대제를 거행한다.
보물 제367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銘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 배 모양의 돌 앞면에는 큰 연꽃 위에 앉은 본존인 아미타불을 새겼다. 엄격한 좌우대칭 수법에 따라 좌우에는 서 있는 자세의 불상들이 새겨져 있다. 아미타불의 머리 위에도 5구의 작은 부처를 새겼는데 그 위에 다시 7구의 작은 부처를 더 새겨넣었다.
삼국시대 불상 요소와 새로 들어온 당나라 요소가 혼합된 통일신라 초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기축년이란 신라 신문왕 9년(689)일 것으로 생각된다.
보물 제368호 미륵보살반가석상 곱돌로 만든 석상이다. 정면에는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다리에 올린 채 오른손을 뺨에 대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한 반가상이 새겨져 있다. 이 반가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목걸이와 구슬장식도 갖추고 있다. 반가상 양쪽에는 두 손에 보주를 들고 정면을 향하고 있는 보살 입상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반가상을 본존으로 삼아서 3존 형식을 취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는 보탑을 크게 새겼다. 이 보탑으로 보아서 정면의 반가상이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크게 발달한 반가사유상 양식의 아름다운 비상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과 같은 시기인 서기 673년에 조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연기군 일대에서 백제가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조성된 이 석상들은 매우 아름답다. 당시 백제의 석조미술 수준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대웅전과 왼쪽의 명부전/안병기
극락보전 옆에는 대웅전이 자리 잡고 있다. 절 아래에 있는 청신녀정영희여사공적비에 따르면 이 건물은 1991년에 조치원읍에 살던 정영희 여사의 시주로 지어진 불전이다.
내부를 통간으로 했으며 불단을 후면 벽까지 뒤로 물린 것이 특징이다. 예불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했던 건축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기계 대패를 사용하여 가공한 부재들은 그 표면이 지나치게 매끄럽고 반듯하다. 자연스러운 건축미를 상실했다는 점이 흠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정면 세 칸 모두 4분합문이지만 들어열개가 불가능하다. 내부를 넓게 쓰고자 통간으로 지은 뜻과 크게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극락전 앞마당 북쪽 끝에 있는 건물엔 오관료와
향적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민도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모두 세 채로 돼 있는데 건물 이름으로 보아 요사로도 쓰고, 스님들의 생활공간으로도 쓰는 곳인가 보다.
항적당과 설선당/안병기
느티나무 바로 앞에서 향적당을 맞바라기 하고 있는 건물은 설선당이다. 스님들의 선방이다. 선방 오른쪽 창호에는 비상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아무래도 비암사 스님들에게 청주박물관으로 이관된 3점의 비상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인 모양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잊을 것. 과거 청산은 이 산속 스님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화두가 아닐까.
대웅전 오른쪽으로 놓인 돌계단을 올라가면 산신각이 있다. 이 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전각이다.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으로 된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린 건물이다. 전각 안에는 산신상과 호랑이상, 산신탱화를 모셨다.
산신각과 산신각에서 내려다 보는 비암사전경/안병기
산신각 뒤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절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비암사로 들어오는 길이 구불구불하다. 절이 민가로부터 얼마나 깊숙이 숨어들어왔나를 짐작할 수 있겠다. 지금은 비암사가 이런저런 전각을 다 갖추고 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삼층석탑과 극락보전, 그리고 부도 2기만이 남아있던 조그마한 절이었다고 한다.
비암사설경/임재만
그러나 1988년, 이진우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부터 불사를 시작해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와 선방, 산신각 등을 중창함으로써 오늘의 가람 형태를 이룬 것이다. 올라오면서 보니, 절 앞에 연못을 파는 등 각종 조경 공사로 어지러웠다. 자료 - 오마이뉴스 2007 안병기
도원문화재의 개막행사인 백제대제
1,300년 전 삼국 중 가장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663년 멸망할 때 백제유민은 백제의 역대 왕과 대신, 그리고 부흥운동을 하다 죽은 이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웅진성 북쪽 전의에다 비암사(碑岩寺)를 짓고 석불비상을 만들어 시납하고 매년 4월 15일 제를 지내왔으니, 그것이 백제대제를 계승하기 위함이다.
1960년대 비암사를 중심으로 연기군 일대에서 발견된 석불비상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백제 멸망기인 673년 전씨(全氏)가 주동이 되어 불상을 만들고 절을 지어 그곳에 매년 4월 15일(음력)에 백제 역대 왕과 대신의 영혼을 달래는 제를 올렸다는 기록과 1999년 9월 비암사에서 발견된 조선초기 제작된 기왕에 ‘대백제국왕대신(大百濟國王大臣)’이란 명문으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후에는 제를 지내오지 않다가 1983년 4월 15일(음력) 종파를 초월하여 전 국민의 이름으로 제를 올리기 시작했으며, 당시에는 백제 충령제(百濟 忠靈祭)라 했고, 비암사에서 유교 제례복장으로 제를 올렸다.
1984년 제4회 백제 충령제부터는 조치원문화원이 주관하고 연기군청이 후원하여 제를 지내왔다.
그러다가 1985년 제1회 도화문화제(桃花文化祭)가 개최되면서 백제충령제는 문화제의 첫 번째 행사로 개최되었다. 그때부터 백제대제가 도원문화재의 개막행사로 봉행되게 되었다. 연기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