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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제주시

서귀포 대정-추사적거지 붕우릇 수월이못 모슬포 방어축제 대정오일장

by 구석구석 2011.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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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에서 대정을 향해 서남쪽으로 뻗은 95번국도인 서부관광도로변은 온통 황금빛 억새와 국화로 뒤덮여 있다. 드넓은 황금빛 초원 위에 낮은 오름들이 그려내는 부드러운 능선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지면 그 자체가 한 폭의 수채화다. 이 수채화를 가슴에 품고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이 도로가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동광 진입로를 지나 대정을 향해 가는 길가에는 미쳐 수확하지 않은 귤들이 나무에 매달린 채 돌담 너머로 방문객을 환영한다. 제주의 황금빛 가을은 귤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시간만큼 더 길어진다.

 

대정고을, 역사의 소용돌이가 지나 간 자리 

과거 대정현(지금은 대정읍)은 조정에서 중죄인을 벌하기 위해 귀향을 보냈던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과거 제주에 유배되었던 자들이 총 49명이었는데, 그중 대정현에 유배된 자들이 3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유배인들의 수를 구(區)별로 구분했을 때 대정은 전국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기록된다.  

 

대정고을은 과거 대정현청이 있던 곳으로 근래에 보성, 인성, 안성 세 마을로 분리되어 있다. 대정고을에는 조선시대 이곳으로 유배왔던 선비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동계 정온(鄭蘊)과 추사 김정희(金正喜)다.

 

 

동계 정온이 제주를 다녀간 지 약 200년 후 제주에 귀향왔던 추사 김정희는 당시 자신과 친분을 유지했던 제주목사 이원조로 하여금 동계정온비를 건립하게 했다. 그 '동계정온선생유허비'가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에 남아있다/장태욱

 

동계 정온은 대북의 영수 정인홍의 제자였다. 그는 광해군 10년에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역모자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시키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영창대군이 살해되자 그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광해군과 그 권력의 기반이었던 대북의 미움을 사서 10년간 대정에 유배되었다. 

 

그는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 집주위에 울타리를 치거나 가시덤불을 쌓고 그 안에 유배인을 유폐시키는 형벌)되었을 때, 대정현감 김정원이 적소(지금의 인성리) 마당에 서재용으로 두 칸 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비슷한 시기에 제주에 유배되었던 송상인 이익 등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했다.

 

추사체를 완성한 제주기념물59호 추사적거지

 

▲바람따라 길을 돌아 대정향교로 향한다. 좁게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추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추사가 떠난 길엔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향교 너머로 산방산도 보인다. /사진=강경민기자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가서 생활하던 곳이다. 최근에 새로 집을 꾸미고 기념관도 만들어 제주 기념물 59호로 지정해 놓았다. 김정희는 이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완당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추사 김정희는 경북 경주 경주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아버지 김노경은 승지, 판서 등을 맡았을 정도로 집안은 화려했다. 왕가의 친척이자 권문세족의 가문에서 태어난 추사는 박제가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실사구시적 학문관을 몸에 익혔다.

 

하지만 그의 부친인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에 연류되어 고금도로 유배를 떠나면서 그의 가문은 위기를 맞았다. 그 후 그의 아버지를 탄핵했던 김홍근은 대사헌에 임명되자마자 다시 과거 사건을 들먹거렸다. 김홍근은 김정희마저 제거하려 하였다.

 

 

 
김정희는 포졸들에 의해 관아로 끌려가서 초죽음이 되도록 매를 맞았고,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만 건진 채 대정에 위리안치되었다. 대정현에서 보내는 9년 동안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질병과 싸웠고, 부인을 잃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자 이상적의 도움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 탐구에 몰두했고, 친구인 초의선사와의 교류를 통해 인식의 기반을 넓혔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제주의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추사체나 세한도는 그가 대정현에서 보낸 인고의 생활이 만들어 낸 예술적 결실인 것이다.

 

추사적거지 입구가 되는 곳이 추사기념관이다. 기념관을 아래를 지나야 추사적거지로 출입할 수 있다. 기념관 앞은 옛 대정현의 돌하르방이 지키고 있으며,기념관 안에는 김정희의 글씨 와 그림 복제품 64점과 민구류 142점을 전시해 놓고 있다.


기념관을 돌아보고 작은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가면 김정희가 머물러 살던 초가 4동이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다. 추사가 살던 방,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방, 하인들이 머물던 곳들이 각각 재현되어 있고, 제주 특유의 물항과 솥, 가구등도 잘 정돈된 채 보관되어 있다.

김정희는 말년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유배 초기에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지금의 적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초가는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안채), 사랑채인 밖거리(바깥채), 한쪽 모퉁이에 있는 모거리(별채), 제주도 특유의 화장실인 통시와 대문간, 방앗간, 정낭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정희는 밖거리에서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모거리에 기거하며 추사체를 완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관람시간
하절기(3월~10월) 08:30 ~ 18:00 / 동절기(11월~2월) 09:00 ~ 17:00


추사 유배길은 3개 코스로 이뤄진다.
1코스는 국가지정 사적 제487호인 추사적거지를 기점으로 대정향교를 순환하는 코스다. 추사는 초가에 기거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입,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를 그려냈다. 2코스는 적거지를 출발해 오설록에 이른다. 추사가 즐겼던 수선화와 차를 주제로 하고 있다. 3코스는 대정향교를 거쳐 산방산을 경유, 안덕계곡으로 이어진다.

 

추사 유배길은 대부분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적거지는 물론이고 대정향교, 산방산, 안덕계곡 등 모두가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길 나서기에 앞서 추사 유배길은 사색의 길이라는 점을 감안하다면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에게로 떠나는 '유배의 길'이기도 하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절제를 통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완성한 추사가 걷던 이 길에서 인생의 길을 되묻게 한다. 한라일보 2011.3


 

   

추사 적거지에서 서쪽 30m 지점에는 보성, 안성, 인성을 나누는 삼거리가 있는데, 이 삼거리에 '제주대정삼의사비'가 세워져 있다. '삼의사(三義士)'란 이재수의 산에 중심에 있던 세 장두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을 지칭한다.

 

1961년 이 지역의 유지들과 이재수의 후손들이 이 삼거리에 이재수의 난을 기념하며 삼의사비를 세웠는데 비문에는 당시 천주교도들의 폐해가 직설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후  이 일대의 도로가 확장되면서 삼의사비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1997년에 대정읍 연합청년회 명의로 다시 세워졌다.

 

보성리 붕우룻 

‘붕우룻’은 인성리 삼거리에서 신평리로 난 구억리 진입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큰 도로변에 있고, 주변에는 평평한 마늘밭이 펼쳐져 있어 비교적 눈에 띄는 곳에 알맞게 자리잡았다.

송길춘 보성리 노인회장의 말을 빌리면, 비가 온 뒤 다음날 아침 연못에 고여 있는 물이 ‘붕우룻’하게 차 있다는 말에서 유래됐다. ‘붕우룻’이란 말은 봉우리처럼 솟은 형상을 빗댄 표현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은 1960년대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만 해도 마을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이용됐다. 빨래하던 곳과 여탕, 남탕 등 목욕 장소까지 두루 갖춰져 있어 주민들에게 삶의 흔적을 다량 생산하는 근원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1989년부터 보수 공사를 진행하면서 옛 모습은 상당 부분 자취를 감췄다. 대신, 2006년도에 소공원을 조성해 운동기구들과 벤치들이 설치됐다. 정취에 취하거나 옛 추억에 잠기면서 잠시 노닐다 갈 수 있도록 배려해놨다.

이 연못의 깊은 곳은 5m에 달하고, 넓이는 5000㎡정도 된다. 한 가운데 수면 위로 봉긋하게 솟은 섬 모양의 바위도 그럴듯한 장관이다. 조촐한 듯 하지만 적당히 여유로워 순간 홀리기 십상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자연환경생태정보를 보면, 이곳에는 송이고랭이, 부들, 기장대풀, 한련초, 골풀, 자귀풀, 여뀌 등이 드물게 분포하고 있다. 수량이 풍부하게 유지되는 공간에 서식하는 동물에는 물매암이, 소금쟁이, 참개구리, 황소개구리, 붕어, 쇄백로, 왜가리 등이 관찰된다. 서귀포신문 2009.7 김경덕기자

 

안성리 수월이못

수월이못은 대정읍 안성리 마을 북쪽에 있다. 추사기념관 입구에 서 있는 돌하르방 앞 시멘트 농로를 따라 1km정도 들어간 지점에 있다. 면적이 3500㎡나 돼, 서귀포시 안에서는 제법 규모가 있는 연못이다.

 

들어서면, 연못 곁으로 팽나무 한 그루와 벤치 두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뺨을 벌겋게 하는 찬바람이 일건만, 연못에 자리잡은 물은 고요함과 잔잔함을 남긴다. 소박한 모습 그대로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로 유배 온 뒤 완성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말대로 ‘불필요한 기름기’가 빠진 추사체를 닮았다. 완당 김정희는 위리안치 생활을 넘어, 이곳에서 예술적인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이곳은 커다란 연못 하나, 작은 연못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본래 작은 웅덩이는 3개였다. 1990년대초, 마을 이장이 한 군데를 메우고 그 자리에 팽나무를 심었다. 작은 연못들은 1960년까지 마을 사람들의 주 식수원이었다. 까닭에 ‘수월이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곳 물은 구억리 ‘다리논’에서 흘러들어와 ‘여못창’, ‘정태훌’로 건너간다. 잉어, 붕어, 미꾸라지들이 서식해 날마다 백로류를 비롯한 조류들이 찾아 온다. 날갯짓하며 첨벙이는 물 위로 수련, 네가래, 마름, 개구리밥이 둥둥 떠 있다. 해마다 수월이못에선 수량이 풍부한 곳에 물매암이, 소금쟁이, 물달팽이, 참개구리, 황소개구리 등의 동물들도 관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두커니 수월이못에 앉아 있노라면 남서쪽에는 모슬개오름(모슬봉), 남쪽 단산, 남동쪽 산방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제나 연못은 음율을 이루듯, 일렬로 늘어선 삼나무들을 오롯이 가두고 있다. 성산일출봉의 멋진 일출만큼, 이곳의 일몰 광경은 가슴을 쿵쾅거리게 한다. 서귀포신문 김경덕기자

 

 

 

형제섬, 사계리에서 송악산으로 향하는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형제섬이다

 

푸른 바다 위 섬들이 연출하는 해안절경 

대정고을에서 차를 돌려 삼방산이 바라다 보이는 데로 가면 사계리 포구가 나온다. 사계리 포구는 모슬포항을 향하는 해안도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 해안도로는 송악산을 지날 때 까지는 해안가 백사장너머 보이는 형제섬을 배경으로 한다.

 

해안도로의 중간 기착점에 해당하는 송악산에 이르면 해안은 바다에서 절벽 위로 가파르게 솟아오른다. 푸른 바다 위에 솟아오른 절벽위에 서니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지점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가까이에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는 물론이거니와 멀리 서귀포앞바다에 범섬이 한눈에 내다보인다. 마치 파란 도화지 위에 훌륭한 예술가의 손놀림이 지나간 것 같다.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송악산과 가파도

 

모슬포, 오래도록 그리워할 이름 

송악산 해안절벽위에 서니 이전과 달리 옷이 휘날릴 정도로 바람이 불어왔다. 노랗게 피어난 들국화와 한들거리는 억새풀 속에서 한라산과 산방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대의 공중정원에 서 있는 착각이 일어난다. 거기에 인근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은 방문객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한 줄 더한다. 추사 예술의 훌륭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일대 바람과 더불어 해안절경이 전하는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송악산을 지나 모슬포항을 향해 가노라면 길 왼쪽에는 바다 위에 눈부신 햇살이 비추고, 그 햇살을 듬뿍 받은 어선이 고기를 잡고 있다. 그 해안절경의 반대편에는 감자나 배추를 심어놓은 넓은 경작지 사이로 과거 일본군이 만들어놓은 군사시설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모슬포 포구에 도착했다.

 

모슬포입구와 송악산인근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

 

모슬포는 과거 사람들이 '못살포'라고 불렀을 정도로 생활환경이 열악했다. 우선 제주의 최 서남단에 있어서 1년 내내 강한 편서풍이 불어온다. 한라산이 겨울에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줄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다. 게다가 샘물이 귀하고 땅은 척박하다. 국토의 극남단에 있어서 중앙과의 연락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유형의 상징이 되었고, 4·3 과정에서는 수많은 인명학살이 자행된 곳이기도 하다. 시인은 아마도 자신과도 같은 상처를 입었던 모슬포로부터 자신이 간직한 내면의 아픔을 위로받고 싶은 것이리라.

 

과거에는 대정현청이 있던 보성, 안성, 인성이 대정의 중심지였다면, 지금 대정의 중심지는 모슬포 포구다. 모슬포에서 많이 잡히는 자리돔과 방어는 전국에 잘 알려진 지역 명물이 되었다. 모슬포 포구에 오면 지금은 '못살포'라는 오명을 무색하게 하려는 듯 언제나 활기가 돈다.

 

 모슬포구

 

포구 입구에는 해산물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방문객들을 맞는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든지 처음 오는 이들은 어리둥절할 음식이름들이 붙어있다. '객쭈리 탕', '아나고 탕', '보말 국', '어랭이 물회'…. 대부분 해산물 요리들인데 이 지역에서 잡히는 물고기들을 재료로 한다. 음식 이름에도 해산물의 지역 방언을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라고 긴장할 필요는 없다. 어느 음식을 주문하여도 지역의 인심에 감탄할 만큼 훌륭한 식탁이 차려질 것이다. 야박한 관광지 음식이 아닌 훈훈한 지역민심을 맛보고 싶은 이들은 모슬포 포구로 가실 것을 권한다.

 

제주도 서남단 끝자락엔 누구든지 오래도록 그리워할 바람과 해안절경이 있다. 2007 OhmyNews 장태욱

 

 모슬포남항조감도/남항 주변에는 여객선대합실, 잔디광장, 해수욕장과 연계한 해수풀장, 전통배체험장, 해양소년단 수련장 등이 들어선다.

 

오경용 주민자치위원장은 식사를 통해 "백록담에서 검은여해안을 품은 귤림추색의 고장 영천동이  감귤위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광자원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영천구경을 선포함으로써 지역발전을 위해 주민들 스스로 변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최남단 모슬포항 방어축제

모슬포에서 방어로 생계를 잇는 주민은 1000여명에 달한다. 때문에 모슬포 사람들에게 방어축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축제가 아니다. 연간 35억원의 지역경제효과를 창출하고 있다는 방어축제.다. 방어 손으로 잡기와 방어 낚시대회, 방어 깜짝 경매는 남녀노소에게 가장 인기 있는 체험프로그램이다.

 

제주올레 10코스가 끝나고 11코스가 시작되다보니 속살을 안보여줄 수 없어 올레코스 탐방프로그램도 준비했다. 제주 향토음식점과 특산물 홍보관 및 판매점이 상설 운영되고 무엇보다 방어를 공짜로 맛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축제 기간 매일 오후 1시간씩 주행사장인 모슬포항 일대에서 무료시식회가 진행된다.

 

방어축제는 화려함과 세련미보다는 어수선함을 추구한다. "거친 자연과 함께해온 모슬포 사람들 특유의 숨소리와 몸짓을 축제 속에 그대로 담아낼 계획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김정전 위원장이 생각하는 방어축제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자부심이기도 하다. 한라일보 2009.10 표성준기자

 

현지인이 아니면 절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허름한 식당들이 많다. 이곳에 있는 식당들은 물회나 조림류의 서민 요리를 맛있고 저렴하게 만들어낸다. 새벽에 주인아저씨는 배를 몰고 생선을 잡아오고 낮에는 잡아온 해산물로 주인아주머니가 요리를 해내는 시스템이다. 덕승식당(064-794-0177)은 백반류로 유명하고 최남단식당(064-794-9191)은 생선회로 유명하다.      

 

하모리 모슬포항 덕승식당 064-794-0177

 

덕승식당은 모슬포항 부근 횟집들이 즐비한 거리에 자리했다. 눈에 띄지 않고 모던한 1층 건물은 정갈한 동네 식당의 맛을 자아낸다. 식당 안에 들어서면 필요 이상의 것은 찾기 힘들다. 35명 내외로 앉을 수 있는 방과 테이블이 마련됐다.

 

메인 요리는 갈치나 우럭, 객주리 조림. 갓 잡아온 싱싱한 고기로 마련된 음식이라 비릿한 맛 없이 깔끔하다. 냄비에 적당하게 담긴 조림을 한 입 삼키면 달착지근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 돈다. 먹는 내내 식욕이 자극된다. 그 밖에도 갈치국, 장어탕, 한치물회 등 가짓수는 16가지가 넘는다. 가격은 6000원에서 7000원 내외다.

 

투박한 식당 이름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사장 이경익씨가 '덕승호'에서 잡아온 자연산 활어만 판다는 것이다. 안전한 먹거리에 관심 많은 요즘, 배 이름을 앞세우며 고기가 검증됐음을 밝히는 셈이다. 물론, 고기가 떨어지면 식당 문은 닫힌다.

 

 

이경익·김인자씨 내외가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한 건 1998년. 음식 솜씨가 “원래 없었다”는 김인자(64)씨의 말은 세월이 대신 웅변했다. 오십년 넘도록 어선을 탄 남편따라 그의 생선 조리솜씨도 수십년을 훌쩍 넘어섰기 때문이다.

 

“배에서 잡아온 고기를 우리 식구들이 먹듯이 만드는 것뿐”이라며 사장 김인자(64)씨가 말했다. ‘솔직한’ 장사. 식당의 인기 비결이다. 온갖 양념과 조미료는 재래식 그대로다. 인공조미료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의 수완이다.

 

최근 오던 한 손님은 갈치조림을 포장해 서울에 있는 부인에게로 택배를 부쳤다고 전한다. 부인이 제주에 내려왔을 때 먹었던 그 맛을 잊지 못해 청했던 것이다. 옛날 어머니가 해주던 맛이 난다는 말은 빼먹지 않는다.

 

하모리 대정오일장

서귀포시 서부지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정오일시장. 6·25전쟁 당시부터 장이 만들어져 몇차례 자리를 옮기다 1983년 등록시장이 되면서 지금의 위치인 대정읍 하모리에 자리를 잡았다.

 

오일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먹거리 장터. 몇몇 식당이 모여 있는 이 곳은 서귀포오일장처럼 한쪽이 막혀 있지 않고 사방으로 틔여 있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순대와 머리고기에 막걸리를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날 시장에서 만난 김모(55)씨는 "장터구경, 사람구경 때문에 오일장을 찾는다"며 "여름철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옷도 하나 사고 수박도 사볼까 해서 집을 나섰다"고 말했다.

대정오일시장은 매월 끝자리가 1일과 6일에 문을 연다. 점포수는 약 200개 정도이며 하루 이용객은 2000~3000명 가량되는 서귀포시 서부지역 최대 시장이다.

 대정오일시장은 주로 인근 주민들이 이용하지만 서귀포시 동지역 주민들도 지역특산품인 마늘과 감자 등을 싼 값에 사기 위해 많이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정에서 나는 농·수·축산물을 믿고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호미 등 옛날 농기구는 오일장에서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정오일시장은 이처럼 지방의 작은 시장이지만 농·수·축산물과 가공품, 의류 및 신발, 기타 가공품 등 품목이 비교적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게다가 마을 중심가와 모슬포항이 인접해 있어 가파도·마라도 주민들, 항구에 정박중인 어선 선원들이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라일보 2009.6 이정민기자

 

 

하모리 옥돔식당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보말칼국수'는 제주를 찾는 손님들의 입맛에도 딱 맞는 음식 중 하나다.

 

바람많은 모슬포, 5일마다 장이 서는 오일장 한켠에 있는 '옥돔식당'은 이미 '보말칼국수'맛으로 입소문이 난 곳이다. 상호는 '옥돔식당'이지만 주메뉴는 '보말'을 주재료로 한 요리다. 보말을 해초만 먹고 자라는 바다고동. 제주에서는 보말을 재료로 참기름에 달달볶다가 죽을 끓이기도 하고 미역을 넣어 국을 끓이기도 한다.

 

이곳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세계적 문호 르 클레지오도 찾아와 맛에 반하고 돌아갔다. 전직 대통령 가족도 다녀갔다. 하지만 차씨는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떤 손님이든 같은 정성과 맛을 드릴 뿐이라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 중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다. 식당에서 만난 조찬상씨(57·청주시)는 "퇴직후 아내와 제주여행을 하고 있는데 입이 짧은 아내가 한그릇을 뚝딱 비우고 밥까지 시켜 싹싹 비벼 먹은 유일한 음식"이라고 강조했다. 한라일보 2011.2

 

보말칼국수는 푸짐한 양에 김가루와 유부가 솔솔 뿌려진 위에 매운 청양고추 다진 것을 올려 휘휘 저어 먹으면 된다. 쫄깃한 면발에 바다내음을 머금은 보말은 그야말로 환상궁합을 자랑한다.

 

보말국 7000원, 보말칼국수 6000원. 영업시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모리 대정초등학교 후문 맞은편 하르방밀면 064-794-5000

 

하르방 밀면은 올해로 3년째 장사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동안 유명세를 탔다. ‘톳밀면’이 탄생하게 된 사연이 자못 궁금하다. “자존심이 상해” 만들었다는게 계기면 계기다. 당초 주인 김정헌(47)씨는 ‘매생이 칼국수’ 가게를 여는 게 목표였단다.

 

“칼국수 비법을 얻으러 전라도와 서울 등 곳곳을 살폈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섬(제주)에서 나고자란 내가 제주 해조류를 사용하지 않고 왜 굳이 다른 지역 해물을 사용할까. 순간, 자존심이 확 상하더라고요.”

 

그래서 등장한 주 메뉴가 톳밀면과 보말칼국수다. 소위 육지것 말고 제주 맛을 살리려 부단히도 애썼다. 아이디어 발상지는 바로 옛적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이다. 수제비에 보말을 한가득 넣어 고픈 배를 채우던 그 식단과 빼먹지 않고 함께 등장한 톳 반찬의 기억.

 

톳밀면 맛은 담백하면서 묘한 맛이 나온다. 척척 감기는 면발과 살얼음 갓 녹은 육수가 어우러져 맛도 일품이다. 밀면의 생명인 육수 자체가 일단 독특하다. 감초나 황기 등 5가지 한방재료를 사용해 두 번 푹 끓인다. 톳이 고혈압, 당뇨병 등 성인병을 예방하는 데 효험있는 영양식품이란 사실마저 깨닫게 되면 분식의 아쉬움은 금새 위로된다.

 

  대정읍 상모리 산 2번지 절울이

 

최남단 절울이에서 가파도와 마라도, 아니면 산방산 너머 한라산을 바라보면서 새봄의 원기를 북돋워보자. 절울이(절워리, 저벼리, 松岳山, 貯別伊岳, 貯別岳,표고 104m, 비고 99m)는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마라도유람선 선착장)에 위치하고 있다.

절(물결의 제주어)이 이 오름 절벽에 부딪혀 울린다 하여 절울이, 이의 변이로 절워리, 저벼리, 한자로 대역하여 저별이악(貯別伊岳), 저별악(貯別岳)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소나무들이 많이 자라난다 하여 송악산(松岳山)이라 불려지고 있다.

 

정상에는 삼각점과 산이수동청년회장 이순재(李順栽)의 찬조로 전봉(全峰) 우영하(禹寧夏 : 초대 대정면장)가 세운 시비가 있는데 이 오름의 굼부리 능선을 따라 모슬개오름 쪽의 드넓은 들판의 정경을 시작으로 산방산~용머리~화순해수욕장~형제섬~마라도~가파도를 연이어 조망하면서 이 시를 감상하는 것은 매력 중의 매력일 것이다. 제주일보 2009.1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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