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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북도

옥천 추소리 환산 세심원 이지당 조헌선생

by 구석구석 2007.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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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자연환경명소 100선 추소리 '환산'

대청호와 금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환산은 산행을 즐기면서 호반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환산이 ‘충북의 자연환경명소 100선’에 지정된 것도 대청호를 내려다보는 수려한 자연경관 때문이다. 명산이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지도에 환산(環山)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곳 주민들은 ‘고리산’으로 부른다. 옛날 이곳이 바다였을 때 배를 맸던 고리자국이 있는 바위가 산 중턱에 있어 고리산이 되었는데 한글이 천대받던 시절 ‘고리 환(環)’자를 써서 한자로 표기하며 ‘환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우리말인 ‘고리산’을 고집하는 이곳 사람들에게서 순박함을 엿볼 수 있다.

 

환산은 백제의 왕자 여창이 쌓았다는 고리산성의 성지가 남아있고, 조선시대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었던 군사요충지다. 100개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큰 장수가 나올 것을 염려한 당나라의 장수가 봉우리 하나를 없앴다는 아흔아홉 산봉우리에 대한 전설도 전해져온다.

 

옥천에서 4번 국도를 타고 증약, 대전방면으로 가다 보면 추소리 이정표가 나타난다. 군북치안센터 앞쯤에서 이정표를 따라 우측으로 들어서면 철도와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터널을 연달아 만난다. 통행하는 차량들이 제법 많은데 차선이 하나라 양보의 미덕이 필요할 만큼 좁은 터널이다.

 

터널을 빠져나가며 바로 우회전하면 가까운 언덕길 옆에 환산에 대한 표석과 등반안내도가 있다. 이백리의 황골에서 등반을 시작하는 곳으로 환산을 찾는 사람들이 즐겨 이용하는 등반코스다. 이곳에서 고무실로 불리는 환평리와 이름이 아름다운 추소리까지는 대청호반을 따라 굽잇길이 한참 이어진다.

유불선을 아우른다는 세심원 / 오마이뉴스

 길가에서 만나는 작은 집들도 옹색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호반의 풍경이 아름답다. 굽이굽이 호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추소리 세심원 앞이다. 유불선을 아우른다는 세심원은 ‘세계인류세심운동본부’라는 큰 글자 밑에 ‘남북통일’과 ‘인류평화’가 쓰여 있어 찾는 이를 의아스럽게 한다.

 

세심원(洗心阮)의 개생문(開生門)을 들어서면 여러 종류의 석상들을 만난다. 군인들의 비석과 6·25참전 16개국의 위령비를 보며 입구에 왜 남북통일과 인류평화가 쓰여 있었는지를 이해한다.

 

세심원의 끝머리와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바로 사방댐을 만난다. 사방댐과 가까운 계곡에서 이름 없는 폭포가 반기는데 생김새로 보아 수량이 많은 여름철에는 제법 위용을 뽐냈을만하다.

 

그곳을 지나면서 연달아 만나는 4개의 돌탑은 탑에 길쭉한 돌들이 꽂혀있어 다른 곳에서 보는 돌탑과 모양이 다르다. 마지막 돌탑은 옛 집터 자리 가까이에 있어 돌탑 주변의 감나무에 잘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돌탑 앞에 도사와 수련생이 명상에 잠겼을법한 소나무를 엮어 만든 작은 의자가 놓여있어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이곳부터 급경사길이 한참 이어져 극기 훈련을 하듯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우거진 잡목들이 바로 앞에 있는 정상과 뒤로 보이는 대청호반을 가려 아쉽다. 그래서 환산 등반은 잎이 떨어진 겨울이라야 대청호의 풍광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산행길에 만나는 것들 / 오마이뉴스

작은 것이 소중하고, 작은 일로 감동하는 게 인생살이다. 때도 모르고 꽃을 피운 철쭉과 진달래를 산에서 만난다. 색깔이 곱고 예쁜 것은 대부분 독버섯이다. 가지 색깔이라 독버섯으로 생각하기 쉬운 가지 버섯이 군데군데 많아 일행들을 즐겁게 했다. 하나의 줄기가 둘이 되었다가 다시 만나 셋으로 나눠지는 괴상한 소나무도 봤다.

 

작은 옹달샘을 지나면 주변의 봉우리들이 아래로 보이고 비교적 대청호가 잘 보여 정상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565봉을 만난다. 추소리와 대청호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인데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도 잡목 몇 그루가 앞을 가로막는다. 정상은 이곳에서 450여m 거리에 있다.

 

헬기장과 환산의 모습 / 오마이뉴스

헬기장이 있는 정상부는 사방이 숲으로 가려져 있어 조망이 나쁘다. 조선시대에 대전시 계족산과 문의면 소이산을 연결하던 봉수대는 정상에서 황골 방향으로 3.2㎞ 떨어져 있다. 정상의 모서리에 이곳이 정상임을 알리는 정상비가 서 있다.

 

정상부를 벗어나 한참을 내려오니 대청호와 주변의 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환산의 정상부도 한눈에 들어온다.

 

공곡재로 내려와 대청호를 바라보며 걷다 보면 이평리를 만난다. 보현사가 위치한 이평리는 이탄(배일)과 갈평(갈벌)의 이름을 따서 지은 지명으로 마을 뒤에 환산이 서 있고 마을 앞에 대청호의 물길이 펼쳐져 도로변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대청호의 숨어있는 비경, 추소리

정지용 생가 옆의 실개천이 흘러서 소옥천이 되어 이지당 앞을 지나고, 강으로 들어가기 아쉬운 듯 사행(巳行)을 거듭하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심하게 허리를 비트는 곳이 추소리 앞이다.

 

물길을 가로막고 이리저리 몰아가는 것은 바위 절벽이다. 물흐름이 완만하여 어루만지듯 지나갈 뿐 좀체로 타고넘어 물길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마을에 내려가 강가를 둘러보거나, 성황당 터에 차를 세우고 풀숲을 헤쳐가며 강가의 풍광을 렌즈에 담는 것도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다.

 

추소리를 지나면 세심원부터 비포장도로가 계속 이어지는데, 왼편에 우뚝 솟은 환산의 허리를 감고 소옥천의 안내를 받으며 임도를 달리다 보면 오지 마을인 공곡재가 나온다. 공곡재를 지나면 항곡리까지 험한 비탈길이다.

 

가는 길
대전에서 4번국도를 따라 옥천으로 가다 군북면사무소가 나오기 전 이백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숙박
인근에는 일반 숙박시설이 없다.

 

주변관광지
이지당, 환산성지

 

먹거리
방아실에는 민물횟집 타운이 있다

 

특산품
포도, 묘목

 

옥천엔 중봉 조헌 선생의 발자취가 선명하다.

 ▲ ①조선 선조 때의 문신·학자·의병장이었던 조헌 선생의 영정. ②매년 표충사에 진행되는 중봉 조헌 선생 추모제. ③조헌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 조헌 선생은 율곡 이이의 학문을 잇는다 하여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였다.  

군북면 이백리 이지당(二止堂)은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요,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後栗堂)은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답양리 가산사는 선생의 영정과 영규 대사의 위패를 봉안한 절집인데, 지금은 위패만 모셔져 있다. 또 안남면엔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매년 가을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는 중봉충렬제를 옥천문화원이 주관하여 지낸다. 선생의 고향은 경기도 김포. 그런데 어찌하여 옥천에 선생의 유적이 즐비한 것일까.

조헌 선생과 옥천의 인연은 임진왜란이 터지기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84년(선조 17) 보은 현감으로 있던 선생은 당시 반대세력의 모함에 의해 파직 당하는데, 이때 은둔생활을 한 곳이 바로 옥천군 안읍 밤티(栗峙)의 산골이다. 이후 조헌 선생은 이곳에서 지방 선비들과 지내면서 문하생을 두고 학문을 강론(講論)하며 지냈다.

선생은 1년 반이 지난 후 다시 관직에 나갔으나 당시 조정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선생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이곳에 내려오게 된다. 선생은 생애 마지막 7~8년을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에 정진하는 데 힘썼다. 그러다 이곳에서 임진왜란의 발발 소식을 접한다.

 

이미 왜침을 예견하고 있었던 조헌 선생은 급히 청주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실패했다. 선생은 다시 옥천으로 내려와 의병 모집에 나섰다. 옥천은 선생이 은거하며 인연을 맺은 곳이라 문하생과 지인들이 많아서 이들의 도움으로 옥천에서 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조헌 선생이 의병을 모집할 때 쓴 격문이다.

‘귀신과 사람이 다 같이 증오하는 것은 도적이라. 화살이 이 원수들에게 함께하여 그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리라. 뜻을 굳게 먹는다면 귀신이 감동하고 백성들이 따라나서며, 일을 이루려고만 한다면 천지만물도 도우리라.’(조헌 선생의 ‘의병이여 일어나라! 왜적을 쳐부수자!’ 중에서)

5월에 거병한 선생은 보은 수리치재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8월1일엔 마침내 의승장 영규 대사와 청주성을 수복함으로써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의주로 북상하기 전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대가 흩어지자 남은 700명을 이끌고 영규와 함께 8월18일 금산 공격을 강행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왜군들도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함으로써 당시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렇듯 옥천은 선생의 고향은 아니지만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을 논하고 마음을 닦은 곳이자, 목숨을 걸고 구국의 의지를 세운 곳이다. 또 초기 의병 모집처이자 선생의 뼈를 묻은 고을이다. 넓진 않아도 잘 가꿔진 선생의 묘소를 지키는 소나무는 선생의 강직했던 기상처럼 오늘도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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