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영산강 하구언을 넘어 영암·해남·강진방면으로 오시면 강진(목포→성전→강진 40분소요)에서 완도방면(강진→남창→완도대교 30분소요)으로 와서 완도대교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하여 남해의 비경 해안도로를 따라 (완도대교→완도화흥포항 10분소요) 오면 보길도·소안도· 노화도가는 선착장이 있음.
보길도행 배편이용 소안항(50분,11회)에서 하선, 당사도행 배 이용(섬사랑1호, 1회, 20분소요)
항일의 섬 소안도
완도 화흥포항에서 소안도행 여객선에 오른다.
안개 속에서 횡간도의 사자 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산 정상의 바위가 사자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나그네는 저 동물이 사자인지 호랑이인지 아니면 늑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사자면 어떻고 호랑이면 또 어떠랴. 무엇이건 움직일 수 없는 돌 사자, 돌 호랑이에 불과한 것을.
포구 들머리 ‘항일 성지’ 비석에 긍지
과거 소안도는 인근의 노화, 보길과 한 생활권이었다. 완도와의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소안도는 자연히 육지가 된 완도 생활권으로 편입됐다. 고립된 섬이 육지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낭만적 흥취를 자아내지만 섬사람들은 늘 육지를 지향한다.
섬의 육지에 대한 열망은 가히 절대적이다. 과거 섬사람들은 고립으로 인해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육지와 교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 보길도, 노화도, 소안도 사람들은 스스로 남 3면(완도 남부에 있는 세 개의 면)이라 부르며 연대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교통이 좋아진 지금은 그런 공동체 의식이 거의 사라졌다. 그것이 되살아나는 것은 오직 선거 때뿐이다.
소안항에 내리면 섬의 역사를 알리는 비석 하나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항일 성지 소안도.' 비석에서는 어떤 긍지 같은 것이 느껴진다. 소안항에서 2㎞ 남짓 들어가면 면소재지인 비자리다. 비자리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비석 세 기가 서 있다. 영세 불망비. 두 기는 제주 목사의 것이다. 제주 목사는 부임길에 소안도에 들러 어떤 치적을 남겼던 것일까.
비자리 어민들은 7월 말부터 11월까지 마을 앞 바다에서 통발 어업을 한다. 수협의 입찰이 시작되면 도시의 중간상들이 들어와 낙지를 사간다.
소안면 소재지인 비자리에는 소안 항일운동 기념탑과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일제시대 소안도는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더불어 독립운동이 가장 강성했던 곳 중 하나였다. 1920년대에는 6천여 명의 주민 중 800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다.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혁명 실패 후 김옥균을 살해했던 홍종우의 밀고로 이순보, 이강락 등 몇몇 주민들이 청산도로 끌려가 관군의 손에 총살당했다. 이준화는 동학군과 함께 도피한 뒤 살아남아 1909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간수들을 처단한다.
일제하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등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스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후일 송내호는 서울청년회와 조선 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정남국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외딴 섬 소안도에 항일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화 학원'과 '사립 소안학교'란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 학원'은 1913년 송내호, 김경천 등에 의해 설립됐다. '중화학원'이 '사립 소안학교'의 모태가 됐다.
1905년, 궁납전이던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한 것은 사도세자의 5세손 이기용 자작이었다. 소안 주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1909년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무려 13년 동안이나 법정투쟁을 해 1922년 2월에 승소했다.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소안 사립학교를 세웠다. 당시 소안학교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924년, 2차 소안 노농대성회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소안도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을 큰집처럼 드나들었었다. 1920~1930년, 소안도 관련 신문보도 기사만 200건이 넘고 등장인물은 수백 명에 달한다. 기록만으로도 뜨거웠던 항일의 열기가 짐작된다.
그때 감옥으로 끌려간 주민들을 생각하며 섬사람들은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으며 일제의 경찰에 말을 하지 않는 '불언 동맹' 등으로 일제의 폭압에 맞섰다. 1927년, 마침내 일제는 해방운동의 저수지였던 소안학교를 강제 폐쇄시켰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소안도 항일운동의 역사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친일파가 득세한 해방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은 숨죽여야 했다. 송내호선생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1928년, 일제하에서 34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역사는 1990년 소안면 비자리에 항일 독립운동 기념탑이 세워지면서 비로소 복권됐고 해방 60년이 넘은 최근에야 독립운동 기념관이 들어섰다.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다.
'완도 향교지'는 "다른 지역에 비해 기개가 용맹하므로 외부인들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되어 사람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해서 소안(所安)이라 했다"고 소안도의 지명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소안도 사람들의 그러한 기질이 소안도를 항일운동의 메카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한겨레신문 강제윤
미라리 해양수산부선정 아름다운어촌마을 '미라마을' 어촌계 061-552-5027
천연기념물인 미라리 상록수림과 맹선리 상록수림이 우거져 있고 절벽을 따라 이어 진 해안도로 또한 절경이다. 파도에 씻긴 갯돌에 햇빛이 비출 때의 비경이 으뜸인 미라마을은 선상낚시와 갯바위낚시로도 유명하다. 문화재로는 비자리 패총이 있으 며, 각시여 전설, 도둑바위 등의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매년 정월의 풍어제가 이 어지고 있다.
월항리 해변에서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손쉬운 방법인 개매기 어로체험을 즐길 수 있다. 조석간만의 차가 큰 바 닷가의 갯벌 위에 그물을 쳐 놓은 후 밀물 때 조류를 따 라 들어온 물고기 떼를 썰물 때 갇히도록하여 고기를 잡 는 전통 개매기 체험 외에도 바지락, 게 등을 잡을 수도 있다.
↑미라리해수욕장. 소안도의 미라리 해수욕장은 한가하다. 피서객은 20여명 남짓이나 될까. 주민들이 차린 계절 음식점에는 손님 하나 없다. 대부분이 먹을 것을 차에 싣고 오기 때문에 피서객들이 섬에서 쓰고 가는 돈은 거의 없다.
신나는 고기잡이 바다체험
바다는 더 이상 바라만 보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바다를 느끼길 원한다.
바다를 즐기고 체험하면서 거기에 뭔가 얻고 싶은 사람이라면 완도의 고기잡이 바다 체험장으로 떠나시라! 소안도 월항리 해변은 고기잡이 바다 체험장을 마련 바다를 몸으로 느끼고 싶어 하는 당신을 안아 줄 것이다.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손쉬운 방법인 개매기 어로 체험에 참여하면 숭어, 농어, 갯장어를 잡으며 누구든 한나절은 어부가 될수 있다.
개최지역 : 전남 완도군 완도군 소안면 월항리 갯벌
연 락 처 : 완도군 관광안내소 061-550-5152, 5744
홈페이지 : www.wando.go.kr
7월말에서 9월초까지 완도 남쪽 소안도의 광활한 갯벌에서 이뤄지는 소안도 고기잡이 바다체험은 연중 네 차례 열린다. 소안도는 보길도 옆 섬으로 훼손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섬이다. 고기잡이 체험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이용한 전통 어로방식으로 말목이나 대나무를 이용해 수십 개의 지주 대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그물을 쳐서 막아 두었다가 바닷물이 빠지면 맨손으로 고기를 잡는다. 참가비는 초등학생 이상 5,000원이다. 소안면사무소 061-550-5609. tour.wando.go.kr
고기잡이는 조석간만의 차가 큰 바닷가의 갯벌 위에 그물을 쳐 놓은 후 밀물 때 조류따라 들어온 물고기 떼를 썰물때 갇히도록 하여 고기를 잡는 우리의 고유의 전통적인 고기잡이 방식으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조화롭게 살아 왔던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어로방법이다.
고기잡이는 물 빠진 갯벌에서 미처 숨을 곳을 찾지 못한 바지락, 게 등을 잡으러 갯벌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바다가 이미 몸과 마음 가득히 들어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염되지 않은 갯벌 위에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맨손으로 큰 고기를 잡아 보는 고기잡이 바다 체험장! 여러분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색다른 추억이 될 것이다.
자료 - 여성중앙 / 한국관광공사
진산리 몽돌해수욕장
소안도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으로 편익시설은 다른 곳에 비해 부족한 편이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바다낚시가 잘 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해수욕장의 앞으로는 제주해협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저녁이 되면 당사도의 등대가 불을 밝혀 여름밤의 운치를 더한다. 인근의 미라리 해변과 같이 둥근 돌로 이루어져 파도가 들려주는 해조음이 한편의 시로 여러분의 감정을 자극할 것이다.
진산리 민박 061-553-7650 4~6만원이용
마을 앞 어장에 서 해녀들이 직접 채취한 전복, 소라, 해삼을 직접 맛 볼 수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상호명 | 전화번호 |
제일장 | 061-553-7650 |
현대장 | 061-553-7547 |
수산장 | 061-553-7477 |
소안장 | 061-555-0050 |
완도군 소안면 당사도
당사도(唐寺島)의 원래 이름은 '항문도'(港門島)였다. 그런데 지명의 어감이 좋지 않아서 바꾼 이름이 공교롭게도 '자지도'(者只島)였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개명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당사도이다. 1982년에 새로 얻은 이 지명은 옛날 당나라를 오가던 배들이 이곳에 기항(寄港)하면서 무사고를 빌었던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뱃사람들 사이에선 자지도라 불리고 있다. 또한, 지도책마다 당사도, 자지도, 자개도 등으로 서로 다르게 표기된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선조 때에 청주황씨가 처음 입도하였으며 그 후 김해김씨, 전주이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중구절제의 이야기가 내려오며 뱃노래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제시대에 소안 항일운동의 시발점인 당사도등대(061-553-8086)는 1909년 석유를 사용하여 불을 밝혔다.
이 등대는 태평양 전쟁시 일본 군용 통신기지로 사용되어 공습으로 대파되었으나, 1948년 복구하였고 1969년 항공식 등명기로 남해 일대를 항해는 선박들의 뱃길을 안내하고 있다.
당사도 등대는 주변 자연환경과 해변 경관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김 양식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당사도 동남쪽 당사도등대!
당사도에서는 등대가 있어서 색다른 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대체로 등대가 있는 섬은 절해고도의 무인도이거나 바위섬에 불과한 경우가 많지만, 당사도는 30가구에 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오붓한 등대섬이다.
게다가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당사도등대는 1930년대 우리나라 최초로 전파 표지인 무선방향 탐지기가 설치되어 무선방위 측정업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당시 당사도와 목포간에 고정회선을 유지해 관청용 무선전신의 형태로 선박통보 및 기상정보 전송을 하기도 했다. 현재 남해안의 위성항법 보정시스템(DGPS) 기준국을 감시하는 감시국이 설치되어 있다.
* 최초점등일 - 1909년 1월
* 등질 - 섬백광 20초 1섬광(FI W 20s)
* 구조 - 백원형 콘크리트조(8.2m)
* 특징 - 신라말 당나라와 교역시 선박안전운항을 빌던 섬에 세워진 등대로 우리나라 최초로 무선방향탐지기를 설치하여 무선방위측정업무를 실시한 등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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