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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남도

합천 가야산 해인사 약수암 국일암 지족암 백련암

by 구석구석 2007.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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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 가야산 해인사

 

이른 아침 스님들이 마음의 번뇌를 씻어내듯 깨끗하게 절 마당을 쓸고 있다. 월간조선

 

신라 제40대 왕인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해인사는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에서 이름을 따 지은 절로 ‘진리의 세계’란 뜻이다. 해인사는 말사(末寺)가 1백3개나 되는 대찰이지만 무엇보다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팔만대장경의 본래 이름은 고려대장경인데, 경전을 새기고 있는 목판의 수가 8만 장에 가깝다고 해서 팔만대장경으로 불린다고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불가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많은 숫자’를 뜻할 때 ‘8만4천’이라는 숫자를 쓴다는 것.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 두 번 만들어졌다. 처음 만들어진 대장경은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1011년부터 무려 77년에 걸쳐 만들어졌지만 1232년 몽골군의 방화에 의해 불타버렸다.

 

그로부터 5년 뒤 다시 대장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1251년 완성된 것이 현재 해인사가 보관하고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은 처음 강화도에 보관됐다가 서울 지천사로 옮겨졌고 조선 태조 때인 1393년 해인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은 장경각(국보 52호)에 보관되고 있는데, 그 구조가 특이하다. 창문의 크기나 위치가 조금씩 다른데, 이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적절하게 차단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여름에는 습한 바람을 덜 맞게 하고 겨울에는 찬 바람을 덜 맞게 하면서 환기가 충분하게 이루어지도록 설계된 것. 덕분에 대장경 경판(經板)들은 습기를 피할 수 있어 지금까지도 곰팡이가 슬지 않았다고 한다. 해인사 홍보실에 들르면 장경각의 신비한 구조를 설명하는 비디오 자료를 볼 수 있다.

 

해인사까지 오르는 길은 가야산 생태관찰로로 꾸며졌다. 길가에 자라는 식물과 나무, 계곡에 사는 물고기들에 관한 설명을 붙여놓은 것. 해인사 입구에 있는 성보박물관에서는 판에 먹물을 묻혀 새겨진 글자를 찍어내는 인경체험을 할 수 있다.

문의 055-932-7810(가야산 국립공원사무소), 055-934-3002(해인사 종무소) 

 

해인사영지

 

약수암 

성보박물관을 지나 왼쪽 길은 해인사로 가는 길이요, 오른쪽 길은 백련암을 비롯한 암자들로 가는 길이다. 먼저 찾아갈 암자는 약수암이다. 밭 가운데에서 약수가 솟는다고 해서 약수암이라 불렀다던가. 사실 '약수'라는 말처럼 추상적이고 모호한 말이 또 있을까.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세상 어느 물인들 약수가 아니겠는가. 혹 이 절집에 가면 마음의 병을 고치는 약수 한 모금 같은 법문 한 구절이라도 얻어들을 수 있다면 모르지만….

 

 

약수암 비구니 스님들이 경작하는 밭과 팽나무

 

길을 꺾어 돌자, 왼편에 꽤 넓은 밭떼기가 보인다. 이제 약수암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다. 사찰의 전답이란 게 텃밭 같아서 사찰로부터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암자로 들어서기에 앞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문득 올려다본 팽나무 가지에서 이리저리 뒤엉긴 황록색의 가지를 발견한다.

 

 

약수암으로 들어가는 평대문과 뒤로 보이는 약수암 법당

 

긴 요사채 가운데로 난 평대문을 통해 절 마당으로 들어선다. 살짝 곡선을 둔 문미가 제법 운치가 있다. 이 암자에선 이 문이 천왕문이기도 하고 금강문이기도 할 터.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더니 문 안으로 한 발짝을 들여놓으니 바로 절 마당이다.

 

해인사 산내 암자인 약수암은 비구니 수도처이다. 구 한말인 1904년에 비구니인 성주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1927년 도삼이 중건했으며, 1972년에는 법공 스님이 선원을 지어 오늘의 모습을 이루게 된 것이다. 절을 창건한 성주 스님이 흥선대원군의 수양딸이 됐다는 후문이다.

 

 수각과 죽림선원

 

약수암의 전각은 조촐하다. 법당과 법당 뒤편 축대 위에 자리 잡은 약사전, 그리고 죽림선원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암자 크기에 비해선 요사가 많은 편이다. 암자 밖에다 따로 지은 요사도 있다. 아마도 이 암자로 마음의 병을 고치러 오는 중생이 많은가 보다. 그러나 암자는 발자국 소리를 내기도 차마 미안할 만큼 조용하기 짝이 없다.

 

해인사 사찰음식은 널리 알려져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약수암의 음식이 그렇다. 오죽하면 '약수암 손맛'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와서 절밥을 먹었다는 사람, 그 밥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꽤 있다.

 

2007년 대선 때 해인사를 찾은 당시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현 공동대표)도 "40여 년 전 해인사 약수암에서 공부한 것이 영원한 인생의 가르침이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우리에게 '법 퍼' 목사로 알려진 최일도 목사도 이곳에서 생전 처음 절밥을 먹어 보았다고 한다. 그가 <불교와 문화> 2007년 5월호에 '고민과 번뇌와 함께 삼켰던 해인사 약수암의 절밥'이라는 제목으로 꺼내놓은 추억을 읽은 적이 있다.

 

 약수암뒷편 산기슭의 부도밭

 

국일암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3기의 부도밭이 있다. 해봉 스님과 도삼 스님의 부도다. 나머지 1기는 어느 스님의 부도일까. 이 부도들은 모두 근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이끼가 낀 탓인지 그다지 촌스럽지 않다. 

/ ⓒ 2008 OhmyNews 안병기

 

약수암 위로부터 흘러오는 계곡을 따라서 눈썹만큼 작은 길이 나 있다. 물 없이 돌들만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계곡이 적막하다. 그러나 적막한 느낌을 미처 지울 새도 없이 금세 국일암에 닿고 만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회칠한 건물. 지척이란 싱겁기 짝이 없는 거리이면서 동시에 어처구니 없는 거리이기도 하다.

 

문간채 오른쪽으로 난 대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한자로 쓴 국일암(國一庵)이란 현판을 단 법당이 반갑게 마중나온다. 새시로 만든 법당 미닫이문 안에서는 스님이 혼자서 염불 삼매에 빠져 있다.

 

 국일암은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벽암 각성 스님(1575~1660년)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절을 중건했다고 하는데 그 뒤로 정인이란 스님이 1942년과 1948년, 두 차례에 걸쳐서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곳엔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다.

 

국일암(國一庵)이란 암자 이름이 매우 거창하다. 국일암을 중건한 것으로 알려진 벽암 각성 스님은 남한산성을 축성한 공적으로 인조로부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암자 이름은 거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벽암 각성 스님(1575~1660)은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10세에 화산(華山)에 있는 설묵 스님 휘하로 들어갔으며 14세 때 부휴 선수 스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 유정이 스승인 부휴 선수를 천거하자, 스승 대신 전장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함께 해전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쌓을 때는 8도도총섭이 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했다.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란 시호는 엄청난 것이다. 나라의 제일이라 해서 '국일'이다. 거기에다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도(都)자를 넣고 그것도 모자랐던지 큰 대자까지 붙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벽암 각성이 국일암에 와 머물렀던 것은 그와 비슷한 생의 궤적을 그리며 살다가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한 사명당 유정(1544~1610)의 자취를 쫓아온 것인지 모른다. 선 수행에 열심이던 스승을 대신해서 전쟁에 나간 벽암 각성 스님이니 사명당을 자기 생의 우상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지장전

 

국일암은 'ㅁ' 자형에 가깝게 건물 배치하고 있다. 전각이라야 정남향을 한 법당과 그 뒤에 앉은 지장전과 요사채, 성원 노스님의 거처가 전부이다. 정면 세 칸, 측면 2칸 크기의 이 지장전은 비구니 성원 스님의 원력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국일암에서 나그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장독들과 해우소이다. 장독대에 놓인 수십 개의 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어떻게 저렇게 반질반질하게 닦아 윤을 냈을까. 부지런히 장독을 닦다 보면 정신도 저절로 반짝반짝 닦일 게 아닌가.

 

 

 

대문 옆에 있는 측간은 국일암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앙증맞다'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귀엽다. 작고한 건축가 김수근은 승주 선암사 측간을 가리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측간이다"라고 했지만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규모를 얘기하는 게 왜 필요한 건지 잘 모르겠다. 이 측간은 약간 작긴 하지만,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김천 청암사의 화장실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해우소로 들어가는 문 없는 문 위엔 '정통'이라 쓰여 있다. 흔히 쓰는 정랑(淨廊)도 아니고 정통이다. 해우소로 들어가는 문엔 문짝이 달리지 않았으며 안엔 나무 바닥이 깔려 있다. '큰 일을 보신 후 왕겨 한 바가지를 뿌려 주세요'라고 벽보가 붙어 있다. 이 글귀를 보니 남원 실상사 해우소가 생각난다.

 

남녀로 칸이 구분돼 있긴 하지만, 개별 공간의 출입문은 없다. 저래 가지고 어디 볼일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낸 창은 이미 그런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환히 꿰뚫고 있다. 계곡 건너 숲에서 조릿대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망아(忘我)의 경지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 ⓒ 2008 OhmyNews 안병기

 

오솔길은 지족(知足)의 길이다 지족암

 

오솔길은 지족(知足)의 길이자 자족(自足)의 길이다. 자신을 들여다보며 걷기 좋은 길이다. 아마 이 길도 예전엔 그렇게 작은 오솔길이었을 것이다. 될수록 길 가운데가 아니라 포장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길섶을 밟으며 걸어간다. 마음이 고체가 되지 않으려면, 맨땅을 자주 밟아야 하리라.

 

 

지족암 오르는 길과 지족암전경/안병기

 

지족암은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해인사를 중건했다는 희랑 대사의 기도처였다는 말도 있지만 믿을 건 못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이 쓴 가야산 유람기에 등장하는 지족암은 터만 남아있는 암자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조선시대 후기 1856년(철종 7년)에 추담대사가 창건하였다는 게 정설이 아닐까 싶다.

 

1913년에는 불이 나 큰 요사채가 타버렸는데, 1915년에 해산 박기돈의 집안이 나서서 중건했다고 한다. 박기돈은 구한 말의 서예가요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한 대구지역의 상공인이었다. 지족암 중건 시에 쓴 상량문이 그의 집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원두막처럼 생긴 삼덕정과 그옆에 세워진 끽다거래비

 

사람들이 암자를 찾는 이유는 무얼까. 아마도 큰 절과 같은 번잡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쓸데없는 망상과 번잡함을 털어버리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차 마시기만 한 게 또 있을까. 정자 옆 까만 비석을 바라보니, '끽다거래(喫茶去來)'라는 말이 쓰여 있다. 조주선사가 자신을 찾아온 선객들이 어떤 답을 하건 "차나 한 잔 마시게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선일매(茶禪一昧)의 경지를 맛보라는 뜻일 게다.

 

다정(茶亭)은 1999년에 입적하신 일타 스님이 지은 것이다. 벌써 10년이 다 돼 가지만, 일타 스님은 아직도 이곳 지족암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지족암 하면 일타 스님이다. 일타 스님과 불연은 끈질기게 얽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친가·외가를 합쳐 모두 41명이 출가했다. 일타 스님은 1995년에 나온 <기도>라는 책에서 그 경위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아마도 석가모니 부처와 그 일족의 출가를 빼곤 가장 숫자가 많은 집단 출가일 거라는 얘기다.

 

 

대몽각전과 쪽마루의 범종(좌), 금강암에서 바라본 지족암/안병기

일타 스님은 당대 최고의 율사(律士)로 손꼽히던 분이다. 율이란 계율의 준말로써 청정가풍(淸淨家風)을 유지시켜 주는, 수행자가 지켜야 할 덕목이다. 일타 스님은 율에 밝았으며 그것을 오롯이 실천했던 분이셨다. 스님은 "사람 노릇 할 생각 말고 오직 중노릇만 잘 하라"고 하셨다.

 

지족암 법당은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대몽각전은 일타 스님이 1985년에 신축한 법당이다. 본래 산신각이 있던 자리에 20평 규모로 지은 것이다. '대웅전'이란 이름이 석가모니 부처를 받들기 위한 전각이라면 '대몽각전'은 거기에 드는 자를 위해 붙인 전각 이름이다. 

/ ⓒ 2008 OhmyNews 안병기

 

성철 스님이 입적하신 지, 십오년. 이제야 성철 스님께서 오랫동안 주석하셨던 백련암을 찾아간다. 2개의 기둥 위에 우진각 지붕을 올린 일주문을 통해 백련암에 발길을 들여 놓는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정념당이라는 건물이 나그네를 맞는다. 현재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아아, 이곳이 지정 성철 스님이 계시던 백련암이런가.

 

 

백련암들머리와 전경/안병기

 

백련암이 언제 창건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605년(선조 38년)에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소암 스님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성철스님께서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하셨던 친근한 절이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서정주, 김동리가 불교사상을 공부하며 문학수업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곳에서 불교사상을 터득하고 그들의 현실도피적인 낭만주의를 길렀다. 

 

백련암은 오기 전에 내가 혼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전각도 많아 어리둥절하다. 이 암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살펴보니, 왼쪽 산기슭이 눈에 들어온다.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병풍처럼 에워싼 자리. 커다란 전각 뒤편으로 난 길을 해서 그 기슭으로 올라간다. 이곳에 올라오니, 비로소 백련암의 면목이 한눈에 내려보인다. 암자 바깥으로 둘러친 담장의 곡선이 매우 아름답다. 

 

기슭을 내려와, 바로 아래에있는 적광전에 들린다. 백련암의 주불전이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오색단청은 하지 않았다. 살아 계실 적에, 성철 스님께선 "내 집은 단청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관음전과 뒤로보이는 적광전(좌), 원통전앞의 불면석/안병기

 

그래서 백련암의 전각들은 죄다 색(色)이 칠해져 있지 않다. 무채색이다. 그래서 건물들은 단지 제 그림자로써 자신을 치장할 뿐이다. 적광전 안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모셨으며 좌우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시지 않았는데 왜 적광전이라 이름 붙인 것일까. 

 

앞마당에 마치 선돌처럼 서 있는 바위를 향해 간다. 원통전 앞에 있는 이 바위는 마치 부처님 얼굴과 같다고 하여 '불면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난 아무리 쳐다봐도 도무지 부처님 얼굴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암반 위에 물구나무 서듯 서 있는 납작한 바위가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자세로 넘어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을까. '불면석'까지는 아닐지라도 도통한 바위임에는 틀림없다.

 

 고심원과 원통전/안병기

 

두꺼비 형상을 한 바위 밑에서 솟아나는 샘물 한 모금을 마신다. 고심원이라는 현판을 단 건물로 가려고 옆 계단을 오른다.  무채색을 넘어 유난히 검게 옻칠이 된 특이한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주장자를 든 성철스님의 전신 좌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조각가 강대철씨가 조성한 것이다.

 

고심원 왼쪽 처마 끝에서 올려다 보면 영자당이라는 작은 맞배지붕 건물 있다. 원래는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하던 곳인데 현재는 스님들의 토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전각이다. 아쉽게도 영자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출입금지' 돼 있다.

 

계단을 내려와 마당 왼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원통전이 있다. 원통전은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전각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적광전 밑에 관음전이 따로 있다. 1687년(숙종 13) 환적 스님이 지은 것인데 응해 스님이 한 차례 중건했다고 한다. 백련암에서 그나마 옛 가람의 향기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원통전과 나반존자를 모신 천태전, 그리고 영자전이 아닐까 싶다.  

 

 염화실과 좌선실/안병기

 

고심원을 중심에 두고 봤을 때, 왼쪽에 있는 'ㄱ' 자형 건물이 염화실과 좌선실이다. 동향하고 있는 염화실은 거동이 불편하신 성철 스님을 모시려고 지은 건물이다. 연만하신 스님이 문턱을 넘어서기조차 힘들어 하시자 공사 끝에 문턱까지 없앴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성철 스님께선 단 한 차례 이곳에 들어와 앉아 보시고 입적하셨다고 한다.

 

성철 스님(1912~1993)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진주중학교를 졸업한 후 해인사로 출가하여 하동산 스님 밑에서 득도하였다. 이후 10년간 금강산의 마하연선원 등 여러 선방을 두루 거치면서 안거하셨다.  음식은 주로 생식과 현미밥과 담식을 드시면서 용맹정진을 거듭하셨다. 파계사에서 행한 장좌불와 8년은 유명한 사실이다.

 

남향하고 있는 좌선실은 성철 스님이 입적하시기 전까지 계시던 곳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하도 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종정을 맡아 조계종을 이끌던 스님은 마침내 1993년 육신의 껍질을 벗어버리시고 적멸에 드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상좌들에게 "참선 잘해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 ⓒ 2008 OhmyNews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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