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광주광역시

광주8경 무등산 입석대 원효사 수박마을 풍암정

by 구석구석 2007. 10. 30.
728x90

 

광주의 8경중 제1경인 무등산

 

광주정신, 남도의 상징

남도인의 정신이 담긴 산으로 광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광주시 동쪽 가장자리와 담양군 남면, 화순군 이서면 등 3개 시군에 걸쳐있는 광주?전남의 명산으로 해발 1,187m. 봄철이면 만개하는 연분홍 철쭉과 진달래, 가을철의 단풍과 산등성이의 억새꽃, 겨울철의 설화는 무등산의 운치를 더해준다. 무등산은 선인들의 충효와 예술의 정기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수많은 구국의 의병장들이 이곳에서 호국의 뜻을 닦았으며 오지호 화백과 의재 허백련 선생이 예술적 텃밭을 일군 곳이자 사림의 고고한 뜻이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기슭에는 여러 사찰이 산재해 있고 절마다 숱한 전설과 소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백마능선

기암괴석의 절경

무등산에서는 자연이 빚은 최고의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무등산의 3대 절경인 입석대, 서석대, 규봉암이 대표적인 예로 20~30m 높이로 솟아있는 거대한 기암지대를 이루고 있다. 높이 20m가 넘는 40여 개 남짓한 돌기둥이 사각, 육각, 원주모양으로 높이 솟아있어 마치 그리스신전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입석대, 그 위쪽 산 정상 부근에 거대한 돌병풍처럼 솟은 바위절벽 서석대, 우거진 녹음 사이사이에 높이 솟아있는 돌기둥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규봉 등은 마치 석공의 다듬질을 받은 것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 자료-광주광역시청

 

무등산의 철쭉은 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많은 사진가들은 붉은 철쭉과 서석대의 어울림, 그리고 파란 하늘에 떠가는 구름까지 무등산을 한 폭의 사진에 담는다. 그 무등의 철쭉을 찍은 사진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득 차오르게 한다. 무등의 오월이 간직한 매력이다.

 

군데군데 철쭉이 핀 무등산 입석대

등산로는 산기슭의 증심사를 출발점으로 하여 2∼3시간 정도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산 북동쪽에는 관광도로가 개설되어 산허리의 원효계곡까지 자동차로 약 30분이면 갈 수 있고, 여기서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오르면 된다.

/ 오마이뉴스

 

무등의 철쭉은 흐드러지게 피어나지 않는다. 일림산이나 지리산 바래봉처럼 군락을 지어 무더기로 피어있지는 않다. 서석대나 입석대 밑 너덜겅 사이사이에 자라난 철쭉나무에서 내미는 붉은 점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등산 철쭉의 매력이다. 오월에 피어나는 그 붉은 철쭉은 더 많은 느낌을 갖게 해 준다.

 

백마능선

무너질 듯 아찔하게 솟아있는 서석대 바위기둥 틈에 핀 철쭉 한 그루가 붉게 빛난다. 아무것도 없는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해마다 그 붉은 꽃을 피워내는 생명의 경이를 보라. 그 한 그루의 철쭉을 바라보면서 한없이 앉아 그들의 속삭임을 듣고 있다. 무등산의 상징 서석대가 전하는 생명의 울림이다.

 

서석대와 입석대, 그 장관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모습은 생명의 경외감을 갖게 한다. 그들은 다른 나무들보다 먼저 자신의 몸을 물들인다. 바위 틈새에 자라나는 생명들, 그 사이에 피어난 하얀 꽃들, 모두 생의 희망을 찾은 가을의 노래이다.

 

무등산 주상절리는 약 7천만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서석대, 입석대, 규봉이 대표적이다.  입석대, 규봉은 풍화가 많이 진행되어 기둥모양이지만, 서석대는 풍화가 덜 진행되어 병풍모양을 하고 있다.

 

무등산 백마능선의 철죽 / 정찬호

서석대(1105m)에서 입석대를 지나 장불재(903m)에 도착했다. 무등산에 가장 많은 철쭉들은 이 장불재에서 화순 안양산으로 넘어가는 백마능선에 분포되어 있다. 무등의 천황봉이 내려다보는 백마능선은 말의 잔등처럼 평온하게 다가온다. 그 능선에 이빨처럼 꽂아져 있는 바위 틈틈이 철쭉들의 붉은 꽃이 피어 바람을 맞고 있다.

 

장불재에서 규봉으로 가는 길은 무등의 동쪽과 북쪽인 뒷길이다. 보통 북쪽의 나뭇잎이 먼저 물든다. 나무들 틈새에 붉게 물들어가는 나뭇잎들이 눈에 띈다. 너덜겅이며 바위틈에도 붉은 잎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위를 타고 오른 담쟁이넝쿨은 이미 붉다. 

 

백마능선

규봉은 입석대 못지않게 바위의 위용이 대단하다. 규봉암 뒤에 병풍처럼 우뚝 솟아 있는 규봉에도 가을이 찾아들고 있다. 봄철 바위틈에서 피었던 붉은 철쭉이 가장 먼저 나뭇잎을 붉게 물들이고, 뒤를 따라 다른 나무들도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서석대에서 원효사 계곡의 아늑함이 좋다. 거의 평원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 평원 같은 계곡에 가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천황봉에서부터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이제 8부 능선에 머물러 있지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가을의 노래를 따라 계곡은 아름답게 물들 것이다. / 오마이뉴스

 

무등산의 억새는 두 곳으로 나뉘는데 무등산장 원효사 지구에서 꼬막재를 넘어가는 목장 일대와 규봉암 가는 길에 펼쳐진 억새의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동화사터를 올라 능선에서부터 시작되어 중봉 근방과 군부대 복원지, 장불재를 지나 백마능선과 안양산까지 펼쳐진 억새의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백마능선의 철쭉

원효사지구 주차장에서 차를 내린다. 원효사로 오르다가 일주문 근처에서 무등산을 올려다본다. 상봉엔 잔뜩 구름이 끼어 있다. 마치 너같이 무심한 놈에겐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투다. 원효계곡 쪽 산자락은 녹음이 짙푸르다. 그리움은 세월이라는 거름을 먹고 자라는 유기질이다.

 

어렸을 적 동네 아낙들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위락이란 여름날 원효폭포에 가서 떨어지는 물을 맞거나 송강정 근처 쌍교 다리께 모래사장에서 모래찜 하는 게 전부였다. 가난했지만 추호도 불행하다는 느낌은 품지 않았던 유년의 기억과 순수하고 정감 어렸던 시간에의 동경들이 나그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원효사로 가는 산길은 고즈넉하다. 넓게 확 뚫린 아스팔트 길이 연방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아스팔트 길은 추호도 헛눈을 파는 걸 용서치 않는 성질 강파른 길이다. 옛날 원효사로 올라가던 길은 단풍나무 가지를 헤치며 가야 했던 밴댕이 속보다 좁은 오솔길이었다. 그러나 맘껏 해찰하며 올라가도 되는 너그러운 길이기도 했다. 왜 길은 넓을수록 성질이 옹졸할까. 조금도 참아주거나 기다려주지 못하니 말이다.

 

조금 올라가자 오른쪽에 '원효사 입구'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나온다. 그 옆에 그리 크지 않은 부도밭이 있다. 원담화상과 회운당의 부도, 원효 스님의 부도도 있다. 모두 조선시대 말에 조성된 것이다. 원효사의 개산조로 알려진 신라 승 원효의 부도를 이때에 이르러서야 세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원효 팔경' 가운데 하나로 꼽는 회암루 조망

 

 원효사는 제행무상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먼저 2층 누각 회암루가 나타나 제행무상을 설(說)한다. 회암루 아래를 통과해 계단에 올라서자 눈앞에 대웅전이 자태를 드러낸다. 누마루 난간에 기대어 맞은편 의상봉을 바라다본다. 신록이 아름다운 봉우리다. 

 

개산조당과 명부전

누군가 이 회암루에 올라 저녁 비 내리는 의상봉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일컬어 '원효 팔경'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멋진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눈길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무등산 상봉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원효사는 6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인 신라의 지증왕이나 법흥왕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원효대사가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 하여 원효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원효사 풍경을 확정지은 것은 1980년대 주지였던 신법타스님이라고 한다. 그때 대웅전과 명부전·요사채 등을 중창한 모양이다. 대웅전 뒤로 돌아가자 닫집이 홀로 나뒹굴고 있다. 제대로 보관하든가 버리든가 하지 않고, 왜 이곳에 이렇게 방치해 두는 것일까.

 

대웅전

광주문화재로 지정된 만수사 범종과 동부도가 있다지만 치지 않는 범종이란 영혼을 상실한 인간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을 발하는 법이다. 원효사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금동불입상, 청동불두, 소조불두, 청동보살입상 등을 광주박물관이 아니라 이곳에 보관해선 안 되는 것일까.

 

절 마당에 서 있는 희멀건 한 5층 탑은 1300년 만고풍상을 겪은 원효사의 세월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다. 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성보각 오른쪽에서 깨어진 탑을 본다. 이것이 예전에 있었던 탑인 모양이다. 기단과 지붕돌이 깨진 모습일망정 반갑기 그지없다.

 

옛날 출입로 쪽에 자리한 범종각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저 범종에 새겨진 비천상은 천상을 훨훨 날 수 있을까. 아뿔싸,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넣지 못하였구나. 언젠가 저녁 무렵 원효사에 다시 와서 무등산 골짜기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듣고 싶다. 어찌 범종 소리가 한갓 지옥 중생만을 깨우치겠는가.

 

무등산의 무등은 불교의 무유등등(撫有等等), 즉 부처님은 모든 중생과 같지 않다는데서 나온 말이라고도 하고 만인 평등을 뜻하는 무등등(無等等)에서 유래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산 이름이 생긴 유래에 비추어 생각하면 무등산의 정상을 일컬어 천왕봉이라 부르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무등산 수박마을(충효마을)

무등산 수박은 수박 중 최고의 맛과 크기를 자랑하는 수박으로, 어른 머리보다 커다란 수박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풍경은 아이들에게 색다른 추억을 선물한다. 무등산 천왕봉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일대가 바로 무등산 수박의 본산지. 산비탈에 심어진 무등산 수박은 그야말로 초록의 물결이다.

 

가느다란 줄기에 커다란 수박이 매달려 있는 게 신기한지, 아이들이 감탄사를 내뱉는다. 재미있기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타원형의 커다란 수박은 남자 어른이 혼자 들어도 무거울 정도인데다, 처음 보는 동글동글한 잎사귀며 아직 줄무늬가 선명하지 않은 풋수박이 신기하다. 하나같이 망사를 쓰고 있는데, 벌이 달려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벌에 쏘이면 수박이 망가지기 때문.  

 

무등산 수박은 일반 수박보다 15일 늦게 열매가 달리기 시작해 더위가 사라져 가는 8월 중순 무렵부터 9월 하순 사이에 나와 여름철 미각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무등산수박마을로 불리는 충효마을과 청옥동 일대에서는 여름 방학에 수박 농장에서 머물 수 있는 ‘팜스테이’(062-250-5120)를 운영한다.

 

농촌에 묵으면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도시 어린이들에게 인기. 포도 따기, 고추 따기, 옥수수 따기, 무등산 수박 농장 체험과 함께 농촌 문화 체험, 생태 체험과 전통 놀이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돼 있다. 

 

 

 

원효사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풍암정

정자는 하늘이 내려준 보물처럼 계곡의 한켠에 신선의 집처럼 또아리 틀고 있다. 아름드리 적송과 거대한 바위들이 정자를 감싸 안고 있어 더욱 신비스럽고 넉넉하고 아름답다. 정자란 본시 정자에서 바깥 풍광을 감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풍암정처럼 계곡 건너편 울창한 소나무 아래 적당히 들어앉은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또 다른 멋으로 다가온다.

 

원효계곡

 

풍암정은 1990년 11월 15일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원효계곡 하류에 있다. 김덕보는 1571년(선조 5) 광주에서 태어나 인조 때까지 살았던 인물로, 호는 풍암이다.

 

임진왜란 때 큰형 덕홍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하고, 중형 덕령이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이를 슬퍼하여 세상을 등졌다. 그 후 모든 것을 잊고자 광주 무등산의 수려한 원효 계곡을 찾아 터를 잡고 이 정자를 지어 이 곳에서 도학과 경륜을 쌓으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사후 영조 때가 되어 그의 두 형과 함께 의열사에 추배되었다.

 

정자에는 '풍암정사'라고 쓰인 현판과 정홍명이 쓴 풍암기, 그리고 임억령, 고경명, 안방준, 정홍명, 김덕보 등의 제영을 새긴 판각이 걸려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곳에는 일찍부터 이름있는 문인들이 출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2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에 1칸씩의 온돌방을 두었다. 지붕은 팔작기와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큰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을 보이는 원형 기둥을 세웠는데, 중앙에만 팔각의 기둥을 세웠다.

 

 

/ 오마이뉴스 안병기/ 서종규/ 오승준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