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어둠 속에서 전우애를 품습니다,
생각은 존재의 증명이다. 경중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끊임없이 생각을 하며 삶을 이어간다. 적막이 흐르는 최전방 비무장지대(DMZ) 주변에도 많은 생각들이 부유한다. 희뿌연 새벽 공기, 그 너머에 떠다니고 있는 장병들의 생각들이 궁금했다.
생각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 하나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흐르기 때문이다. 최전방을 지키는 장병이라고 해서 늘 수호의 의지만을 다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족, 연인, 친구가 생각나기도 한다.
생각이 흐르는 물과 같다면 필시 하나로 모이는 장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각의 교차점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지난 18~20일 둘러본 강원도 고성군 DMZ는 이 곳을 지키고 삶을 영위하는 수많은 이들의 생각이 모이는 교차점이었다.
/ 출처 : 국방일보 2022.8.31 글=맹수열/사진=조용학 기자
고성은 우리 군의 경계 구역 가운데 보기 드문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 굽이친 산을 따라 동서로 가로지르는 남방한계선 철책의 끝과 동해를 따라 이어진 해안 철책의 시작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지키는 육군22보병사단 쌍호여단 건봉산대대 장병들을 만나기 위해 건봉산 자락을 오르는 길. 오후임에도 산 중턱에 걸쳐 있는 짙은 안개는 건봉산이 만만치 않은 고지임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건봉산 정상에는 대공감시초소가 있다. 908고지 꼭대기에 자리 잡은 초소 너머로는 북한 남강이 한눈에 보인다. 남강에서 흐르는 물길은 건봉산 고진동 계곡까지 이어진다.
초소를 지키고 있는 두 장병은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을 가진 입대 동기였다. “처음 본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됐었다”던 최원호·송원호 상병은 모든 자극으로부터 차단된 채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레이더로는 식별할 수 없는 항공전력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로 시력과 청력을 동원해야 하죠. 계속 집중을 해야 하다 보니 잡생각을 할 여유는 없습니다. 다른 생각이라면 ‘눈앞의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정도죠. 이것이 곧 제 가족, 제 미래와 연결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거센 풍파를 고스란히…녹슨 전차는 역사를 더하고
초소 옆으로는 과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낡은 막사와 이제 누구도 용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콘크리트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수풀을 헤치고 몇 걸음 나아가면 6·25 전쟁 당시 고지에 올려놨다는 미군의 녹슨 셔먼 전차를 볼 수 있다.
셔먼전차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진짜 전투를 수행했다, 적을 기만하기 위해 망가진 전차를 위협용으로 배치했다는 둥. 아무튼 이 높은 고지에 전차를 올려놓은 것 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셔먼 전차는 별도의 관리를 받지 않은 채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벌겋게 슬어버린 녹으로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전차 구석구석은 이끼와 야생식물로 가득했다. 이미 기능을 상실한 전차에 대해 안내를 맡은 사단 공보장교 김도희 대위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자리에 서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자체가 역사적인 일 아닐까요? 방치가 아닌 역사의 흔적을 더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어쩌면 이 전차가 진짜 큰 의미를 가진 유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고된 철책 점검을 버티게 하는 힘 ‘희생’
들어갈 때는 한참이 걸리는데 나올 때는 순식간이라 ‘도깨비길’이라고 불리는 고진동 계곡길을 지나 GOP를 지키고 있는 A소초로 향했다. A소초 장병들은 저녁 근무 투입을 앞두고 소초장의 지휘 아래 군장검사에 여념이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군장검사에서 소초장이 주관하는 워게임을 하는 것이 이곳의 문화였다. 일주일에 두 번은 실제 야외기동훈련도 한다고 한다. 작전지역 지도를 펼친 소초장 김재근 중위가 상황을 부여하자 초동·기동팀 근무자들은 자신의 변화에 맞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대답했다.
소초장의 ‘변화구’에도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이들에게서 그동안의 단련이 느껴졌다. 적이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도발해 오더라도 부대와 전우를 위태롭게 하지 않겠다는 ‘백전불태(百戰不殆)’란 사단의 목표는 창끝 부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김 중위는 군장검사를 “대비태세 확립 그 이상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적은 반드시 제 앞에 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물론 소초원 모두가 다양한 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각오입니다.”
군장검사를 마친 장병들의 철책 점검에 동행했다. 점검 코스는 소초를 가로지르는 개천을 기준으로 좌·우동으로 나뉘는데, 좌동은 ‘천국의 계단’, 우동은 ‘고진감래길’로 불리는 악명 높은 난코스였다. 우선 그나마 낫다는 천국의 계단을 따라나섰다.
‘천국의 계단’의 의미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총 계단의 수가 ‘1009개(천구개)’라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거듭된 보수 공사로 1020여 개 정도 된다고. 네 뼘 남짓 좁은 계단을 따라 걷는 길은 말 그대로 험난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이제 익숙합니다. 그래도 눈앞의 계단과 철책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죠. 그래도 돌아오는 길이면 ‘이제 끝이구나’라는 안도감이 몰려옵니다. 강진민 상병의 말이다. 강 상병의 말 그대로였다. 점점 좁아지는, 군데군데 파인 계단은 온 신경을 정면에 집중시켰다. 돌부리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고른 뒤에야 눈 앞에 펼쳐진 절경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도 체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강 상병은 이곳에서 ‘희생’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다리가 움직임으로써 전우들이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며 상기된 얼굴 위로 미소를 지었다.
늦은 밤, GOP 중대장은 잠 못 이루고
다시 B·C소초가 함께 위치한 고진동중대 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험한 건봉산의 지형이 만든 8군단 내 유일한 통합소초였다. 어둠이 드리운 저녁이었지만 여전히 상황실은 분주했다. 광망을 통해 끊임없이 신호가 들어오고 사방에서는 과학화 카메라가 띄운 영상들이 깔려있었다. GP에서 송출된 TOD 영상까지 확인해야 했다. 22사단의 철책은 마치 잠자리 눈처럼 24시간 사각이 없었다.
야간 근무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전우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고 한다. 전방을 노려보고 있던 초소 근무자 김민석 일병은 “여전히 이 곳이 두려운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함께 나온 전우가 있어 부담감은 없다”고 말했다. 김 일병은 군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고 했다.
이곳을 책임지는 중대장 김종철 대위는 매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 곳을 철통같이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저를 쉽게 잠들게 하지 못하고 있죠. 그러다가도 도시에 두고 온 아내와 두 아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은 부하들도 마찬가지더군요. 저는 부하들이 안전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지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김 대위는 GOP 대대 장병들이 느끼는 공통 분모로 ‘바쁘다’를 꼽았다. 멀리서 보면 늘 반복되는 일상 같지만, 그 속에는 무수한 변수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기상, 작전환경, 심지어 인원까지 늘 상황은 변한다”면서 “이런 변화에 맞춰 임무를 수행하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간다. 그러면서 다시 내일의 완전작전을 위한 다짐이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들에게도 꿀맛 같은 휴식도 있다. 힘든 환경 속에서 근무하는 만큼 휴식 보장은 어느 부대보다 확실하게 하겠다는 방침이다. 선임들과 함께 사이버지식정보방에서 인기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를 즐기던 박준서 일병은 “입대하기 전에는 이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면서도 “임무 수행 후 오는 뿌듯함, 선임들과 즐기는 잠깐의 게임은 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라며 웃어 보였다.
숨 막히는 새벽 군장검사의 이유
이튿날 이른 새벽. 최고 풍속 2.5m/s의 세찬 바람은 여름의 무더위를 잊어버리게끔 했다. 이날 DMZ 순찰을 나설 수색대대 D소대 수색팀 장병들은 이른 새벽부터 군장검사 준비로 분주했다.
잠시 후 군장검사를 위해 중대장 강신욱 대위가 소대본부에 도착했다. 강 대위는 가장 먼저 취침, 식사, 용변 여부를 꼼꼼히 챙겼다. 그리고 수색팀은 이어지는 세밀한 점검. 암구어, 작전목표, 예상 위험요소, 작전지역 지형, 환자발생 가능성 등 모든 정보를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자신의 입을 통해 임무를 되새김질함으로써 작은 위험요인도 차단하기 위함으로 보였다.
강 대위는 특히 장병들의 ‘건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군장검사 초반 건강 상태부터 점검한 이유였다. 유독 검사가 엄격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했다.
“우리는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DMZ에 매일 실제로 투입되는 부대입니다. 투입되는 개인이 모두 자신의 임무는 물론 팀의 목표와 유사시 동료의 임무까지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하죠. 엄하게 보였나요?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치라도 긴장을 푸는 즉시 모두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죠.”
‘믿음’, DMZ 완전 작전의 밑바탕 되다
DMZ로 들어가는 관문인 통문 앞 2차 군장검사를 마치고 투입 준비를 하는 수색팀을 바라보는 강 대위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중대 행정보급관과 함께 격일로 군장검사를 하는 강 대위는 몸의 피로보다 부하들에 대한 걱정이 더 크다고 했다.
“저도 사람인데 힘들죠. 하지만 DMZ로 들어가는 부하들을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뒤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늘 조마조마 합니다. 그래도 절대 티를 내면 안됩니다. 중대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지휘관인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이니까요. 힘들지만, 힘들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불현듯 들곤 합니다.”
투입 전 육군 복무신조와 ‘초심자의 구호’를 외치는 수색중대의 전통 의식을 마친 수색팀의 표정엔 비장함이 가득했다. 9번째 수색작전에 나선 이현준 일병은 “매번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든든히 이끌어주는 선임들이 있어 든든하다. 언젠가 나도 선임들처럼 후임들이 의지할 수 있는 수색대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일병 등을 이끄는 팀장 이채용 하사는 “팀장을 믿고 부담 없이 안전하게 작전을 완수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녹슨 철문이 마찰음을 일으키며 열리자 수색팀은 금새 줄지어 사라져 갔다. 무성한 수풀이 가득한 DMZ 속으로 수색팀이 들어간 순간 떠오른 아침 해는 다시 시작된 하루를 알렸다.
선임이 돼서야 비로소 느끼는 ‘책임감’
수색팀을 배웅한 뒤 금강산전망대로 향했다. DMZ 안쪽에 위치한 금강산전망대는 현재 코로나19,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등의 이유로 제한된 상황에서만 민간에 개방되고 있다. 태극기와 함께 펄럭이는 유엔기는 이 곳이 유엔군사령부가 관할하는 지역이라는 것을 다시 주지시켰다.
이 곳에서는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인 구선봉이 선명히 보인다. ‘선녀와 나무꾼’의 배경이라는 감호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멀리 북쪽 고지 위에는 북한의 통일전망대도 보인다. 남북이 맞닿은 해안, 우리 지역에만 세워진 가로등은 남과 북의 차이를 여실히 느끼게 했다. 분명 산과는 다른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전망대 꼭대기에 놓은 각종 감시장비와 조명 등은 이 곳이 단순한 전망대가 아닌, 금강산중대가 24시간 근무하고 있는 군사지역임을 방증했다.
금강산전망대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우리 지역 동쪽 끝에 자리 잡은 금강통문이 있다. 이 곳은 언제 열릴지 모르는 육로의 최북단 관문이다. 통문 너머의 풍경은 우거진 수풀로 인해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통문 앞 초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정호철 상병은 ‘무덤덤함’을 이야기했다. 무한할 것 같은 어둠, 북한과 이어져 있다는 막연 두려움은 사라진 지 오래. 정 상병은 “이제 내 눈 앞에서 절대 적을 놓치지 않겠다는 책임감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고성의 끝에서 ‘통일’을 생각하다
다음날은 통일전망대 등 민간인 출입이 가능한 지역을 둘러봤다. 통일전망대는 북한과 연결된 고성 해안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전망대 인근 벤치에 앉아 북쪽 해변을 바라보며 이 곳을 찾았을 많은 실향민들의 ‘망향(望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통일전망대에는 기독교 교회와 대형 불상, 카톨릭 예수상 등 각 종교의 건축·조형물이 모여있다. 종교 화합을 통해 남북 화합을 이루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특히 이 조형물들이 시선이 북쪽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수십 년째 이 곳에서 장사를 한 한 상인은 실향민들이 많이 찾을 것이라는 기자의 예측에 힘을 실어줬다. 특히 요즘은 휴가철이라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주로 근처에 놀러온 사람들이 오지만 실향민도 많이 와. 실향민은 딱 보면 알 수 있지. 그 사람들은 유난히 눈에 띄어. 표정이 좀 서럽고 어둡다고 할까? 안타깝지…. 얼마나 가족들이 보고 싶을까? 나는 도무지 상상이 안돼.”
통일전망대를 지나 다시 민간 구역으로 가는 길에는 2009년 문을 연 뒤 DMZ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DMZ를 주제로 6·25 전쟁 전후의 모습, 군사분계선(MDL)과 DMZ가 갖는 역사적 의미, 계속된 군사 충돌, DMZ의 독특한 자연환경 등 다양한 주제의 전시물과 영상을 이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방학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이 곳을 찾은 강도형(11) 군은 “말로만 듣던 DMZ에 대해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어 좋았다”면서 “친구들에게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 평화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싶다”는 소감을 전했다.
검문소를 나와 다시 민간 지역인 명파리로 향했다. 이 곳은 금강산 관광이 활발하던 당시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금강산을 향하는 수 많은 사람, 물류의 중간 집결지였던 명파리는 이제 다시 휑한 시골 마을이 됐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끔 하는 쓸쓸한 풍경. 주민들의 생각은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모든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여정의 시작점인 건봉산 초입에서 잠시 눈을 감고 이 곳에서 만난 다양한 생각의 편린(片鱗)들을 정리해봤다. 여러 갈래 생각들의 교차점인 DMZ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소중한 우리 땅과 국민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평화를 향한 뜨거운 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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