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고성군 토성면 설악산 ‘성인대(신선대)’
맹렬한 무더위가 한풀 꺾이며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다. 하늘도 구름 사이 코발트 빛이다. 가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오랜만에 등산스틱을 꺼내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산과 바다. 무엇보다 여름내 지치게 했던 게으름의 시간을 설악의 정기로 채우고, 멋진 파노라마 뷰를 보기 위해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화암사 숲길로 간다.
금강산 제1봉은 지금은 설악산국립공원에 편입돼 백두대간 북설악을 대표하는 신선봉이다. 불교 법상종의 개조 진표율사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를, 서쪽에는 장안사를, 그리고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해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했다.
화암사는 남쪽에서 보면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는 형상이어서 ‘금강산 화암사’로 표기돼 있다. 금강산 화암사 숲길은 화암사에서 출발해 수바위, 성인대(신선대)를 거쳐 다시 화암사로 돌아오는 산행코스로 주차장에서부터 왕복 6.9㎞ 3시간 정도 걸린다.
힐링이 필요할 땐 화암사 숲길로
일주문을 지나 수암전이라는 매점 앞에서 금강산 화암사숲길을 오른다. 잠깐 오르니 거대한 바위가 서 있다. 동해고속도로에서 속초로 진입하면서부터 푸른 산들 사이로도 보였던 수바위(秀巖)다. 주변이 낮은 산들로 이뤄져 어느 곳에서도 잘 보인다. 화암사에서는 왕관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바위 위에서 진표율사와 스님들이 좌선수도를 했다. 바위 꼭대기에는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작은 우물이 있는데 그곳에서 기우제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민가가 멀어 필요한 양식을 구하느라 수행에 매진하기 힘들 정도였다.
어느 날 수행에 열심이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바위굴을 지팡이로 세 번 두드리면 쌀이 나오니 수행에만 힘쓰라”고 했다. 두 스님이 아침 일찍 수바위에 가서 노인이 시킨 대로 했더니 정말로 쌀이 나왔다고 한다.
화엄경을 전파했던 화엄사가 1912년 공식적인 명칭을 바위 암(巖)을 쓰는 화암사(禾巖寺)로 바뀌게 된 이유도 이 바위에 얽힌 이야기 때문이다. 절 이름은 769년 통일신라 승려 진표가 창건할 때는 화암사(華嚴寺)라고 했다.
수바위 위에 올라 화암사 전경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리니 오늘 올라가야 하는 성인대의 편편한 암봉 위로 사람들의 모습들이 보인다. 성인대까지 1.2㎞로 1시간 거리다. 적당한 깔딱 오름길 두 번 정도면 갈 수 있지 않을까.
겹겹이 쌓아 놓은 바위가 마치 시루떡을 연상시키는 시루떡 바위를 지난다. 땀을 흠뻑 흘리는 깔딱 산길에는 며느리밥풀꽃이 깊은숨을 붉게 토해낸다. 그나마 중간중간 바람이 불어 잠깐 땀을 식히고 산길의 늦여름 야생화와 눈맞춤 몇 번으로 소나무 아래 성인대(신선암) 표지판에 이르니 갈림길 정상이다.
성인대 오르니 눈 앞에 별천지가
숲길 전망대에서 보는 화암골의 푸른 숲이 고성의 평야와 동해로 이어진다. 평탄한 좌측 오솔길로 잠시 걷다 보면 신선암의 넓은 암릉이 이어지며 푸른 설악의 산들과 희뿌연 울산바위의 비경들이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낙타바위라는 두 개의 바위 사이로 푸른 바람이 불어온다. 그 아래로 넓은 암릉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고래등바위라고 한다. 마치 바다에서 막 올라와 숨을 쉬고 있는 고래의 넓은 등짝 같다.
산오이풀의 분홍색이 바위 자락 사이에 피어 가을이 시작되는 푸른 하늘과 색조를 맞춘다. 산오이풀은 지리산, 설악산과 북부지방의 고산에서 자라는 여름꽃이다. 한 무리 산악회원들은 인증사진 찍기에 바쁘다. 잠시 소란한 곳을 피해 아래로 이어지는 암릉을 따라 고래등바위로 내려간다. 여기는 아무도 없는 또 다른 세상이다. 마음은 동해를 헤엄친다.
넓은 암반에 패인 웅덩이에는 9월인데도 올챙이가 있다. 그 사이로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아주 작은 산개구리가 헤엄을 친다. 비가 올 때를 기다린 산개구리의 늦은 작품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모기 유충인 장구벌레가 꼬무락댄다. 올챙이와 개구리가 산꼭대기 바위의 작은 물웅덩이에서도 종을 번식시키며 살아갈 수 있는 생태 여건을 생각한다.
멀리 달마봉이 구름 뚫고 나타나
개구리들 맞은편으로 설악산 울산바위의 암봉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좌측으로 멀리 뾰족한 달마봉이 구름 속에 신기루같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달마봉(635m)은 비법정 탐방로로 1년에 두 번 정도 개방된다. 올해는 7월에 이어 오는 23일에 선착순 500명으로 목우재-달마봉-계조암-소공원으로 이어지는 걷기 행사가 열린다.
우측으로는 햇빛을 받아 짙은 산의 그림자들이 연이어 백두대간인 설악의 황철봉(1379m)과 북설악의 상봉(1239m) 사이로 미시령이 마치 물줄기처럼 흐른다. 백두대간은 이어 신선봉-대간령-마산봉으로 이어진다.
신선봉 위로 구름이 지나가며 햇빛의 조화가 장엄하다. 계곡 사이로는 마가목 열매가 주황빛으로 익어간다. 다시 고래등에서 신선대로 올라가는 길에 바위 사이사이로 산오이풀들이 미시령과 황철봉을 배경으로 구름 사이 햇빛 아래 더욱 붉어진다.
짧은 산행 시간 대비 심신이 힐링 되는 속초여행길의 필수 뷰 포인트로 알려져 있어 청년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구름과 안개 사이로 보이는 설악의 압도적인 풍경을 만나러 새벽 여명 속, 아침 일찍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물길 따라 숲길 따라 동해 바다로
이제 신선들의 세상을 뒤로 하고 상봉 방향으로 가는 화암재 숲길로 들어선다. 간혹 사람들은 빨리 내려가기 위해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을 더 느끼려면 화암재를 지나는 숲길로 하산해야 한다. 바위의 신선한 바람과 설악의 풍경들은 이내 푸른 숲으로 변해 촉촉한 흙길의 질감은 발바닥을 호강시켜줬다.
능선의 바람은 숲사이로 살랑이고 화암사로 내려가는 화암골의 물소리가 가까워지며 귀까지 즐거워진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교차하며 화암골로 내려앉은 피톤치드가 물과 만나 음이온이 후각을 상쾌하게 한다.
내려오는 길에 잠깐 화암골 계곡에 발을 담가도 본다. 화강암 위로 물살이 용틀임하는 폭포의 비경이 보이고 물소리가 거세지며 화암사 세심교에 이른다. 화암사는 삼성각이 유명하다. 이 삼성각 안 벽에는 금강산 천선대, 상팔담, 세전봉, 삼선대 등 금강산의 다채로운 풍경이 그려져 있다.
이것이 화암사가 1만2000봉, 8만 9암자 중 남쪽에서 시작되는 첫봉 신선봉의 첫 암자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주변의 주민과 신도들도 삼성각이 금강산이 시작하는 신선봉 아래 세워져 있어 영험하다고 믿고 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화암사산책로는 물길과 숲길을 따라 1.4㎞ 정도 이어진다. 맥주 한 캔을 사서 산책로를 따라 내려와 시원한 화암골의 물소리를 따라서 호젓한 숲길로 들어선다. 햇빛이 비치는 연두색 나뭇잎 사이 계곡의 하얀 포말과 숲의 노래는 어느새 휘파람이 이어진다. 이제 속초 바다로 물회 먹으러 가야지!
출처 : 한국아파트신문 이성영 여행객원기자 ㈜한국숲정원 이사. 자연치유여행가, 산림교육전문가, 산림치유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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