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고택·아원고택 등 한옥 22채 어머니 품처럼 포근
미술관·카페·책방 등 어우러진 완주여행 핫플레이스
가파른 산길 올라 만나는 수만리 마애석불 신비한 미소로 반겨
고산자연휴양림에선 별이 쏟아지는 가을밤 낭만 만끽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나 보다. 20대 남자와 여자는 서로 살짝 눈만 마주쳐도 수줍은 미소로 얼굴을 붉힌다. 커플룩으로 멋을 부린 것을 보면 많이 좋아하는 눈치다. 산수국도 저물어 가는 완주 소양고택 계단을 둘이 손잡고 걷는다. 수백년 세월이 담긴 한옥 툇마루에 앉아 도란도란 사랑의 언어를 나누는 청춘. 꽃보다 참 예쁜 가을 풍경이다.
◆사랑 꽃피는 오성한옥마을
전북 완주시 소양면 종남산(終南山). 더 남쪽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뜻을 담았을 정도로 산자락이 포근하다. 서방산, 위봉산, 원등산이 어머니 치마폭처럼 따뜻하게 감싸 안은 덕분이다. 종남산 아래에는 한옥 22채가 옹기종기 모여 오성한옥마을을 꾸미고 있다. 일부 한옥은 철거 위기에 몰린 전국 각지의 수백년된 고택을 해체한 뒤 이곳으로 옮겨와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예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이유다.
고택 하면 어르신들이나 좋아할 것 같다. 하지만 오성한옥마을 여행자들 중엔 젊은 연인들이 꽤 많다. K-팝을 대표하는 방탄소년단(BTS)이 몇 해 전 오성한옥마을의 아원고택에 머물며 화보와 영상을 촬영한 덕분이다.
그들이 다녀간 돌다리 하나, 허름한 구멍가게, 제방의 소나무 한 그루까지 ‘BTS 성지’로 뜨면서 완주를 찾은 많은 젊은 여행자들은 ‘성지 순례길’에 나선다. 요즘은 아원고택에 이어 소양고택이 그 인기를 물려받는 모양새다. 모던한 카페와 책방이 고풍스러운 고택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풍경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돌계단을 걸어올라 작은 문을 통과하자 너른 잔디마당 위에 한눈에도 고풍스러운 한옥이 들어앉았다. 제월당(霽月堂). ‘비 갠 뒤 하늘의 상쾌한 달’이란 뜻이라니 이름 참 잘 지었다. 툇마루에 앉아 겹겹이 펼쳐지는 산자락과 높고 파란 하늘, 몽글몽글 솜사탕 같은 구름들이 꾸미는 동화 같은 풍경을 즐긴다.
전남 무안군 원호리에 있던 180년된 고택으로 2010년 철거 위기에 놓였다가 이곳에 새 둥지를 틀었다. 긴 시간 동안 문화재 장인들의 손을 거쳐 원형을 최대한 살렸다. 조선시대에 고을 원님의 관사였고 일제강점기엔 학당으로 사용된 한옥. 겸손한 사각기둥과 단아한 지붕선, 세월이 묻어나는 한옥문과 길고 넓은 대청마루가 시원하게 뻗어나갔다. 특히 전통 양식인 들어열개문 8개를 활짝 제치면 종남산의 탁 트인 전망이 한눈에 담긴다. 옛 선조들은 날이 좋으면 들어열개문을 모두 위로 올려 처마에 걸어놓고 자연과 교감했다니 빼어난 건축 양식이다. 낮에는 대청마루에 앉아 청량한 산바람을 즐기고 밤에는 청명한 달빛까지 즐길 수 있으니 이보다 여유로운 힐링이 또 있을까.
제월당 왼쪽 한옥은 혜온당(惠溫堂). ‘따뜻한 사랑과 온기를 전하는 집’이란 뜻인데 사연이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지은 전북 고창의 고택으로 사회 복지가인 집 주인이 많은 이들에게 훈훈한 덕을 베풀었단다. 그런 집 주인의 마음을 살려 혜온당으로 이름을 지었다. 푸른 잔디 정원과 연결되며 봄의 홍매화, 여름의 백일홍을 거쳐 단풍이 불타는 가을 종남산과 흰 눈이 덮인 겨울 종남산을 온종일 즐길 수 있다.
카페와 가장 가까운 한옥은 여일루(如日樓)로 ‘광복의 화창한 봄날’이란 뜻. 경북 포항에 있던 고택으로 봄날처럼 화창한 광복을 염원하며 지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서예가, 거문고 연주자 등 당대 유명한 문화예술가들이 이곳에 머물며 교류했다. 100년 넘은 나이테가 세월의 흔적을 전하는 원기둥과 팔작지붕, 아름다운 전통 나무 장식과 처마에 매달려 가을바람에 날리는 무명천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고택에 앉으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고요해진다.
아름다운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내려앉고 오랫동안 햇살이 머무는 가희당(佳熹堂)은 계곡 물소리를 즐기는 공간. ‘뒷날의 인연’을 만날지도 모르는 후연당(後緣堂)에선 바람에 흔들리며 사각거리는 대나무 이파리 소리가 마음을 치유한다.
커피 한잔 들고 카페 두베(Dubhe)에 앉았다. 시원하게 열린 공간으로 드러나는 풍경은 그대로 떼어내 거실 벽에 걸어놓고 싶은 수채화다. 물 위에 놓인 돌다리와 운치 있는 소나무, 한옥, 파란 하늘이 연결되는 구도는 완벽한 배치다. 오래된 한옥과 모던한 카페 건물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지는 신기한 경험도 덤으로 즐긴다.
두베는 사계절 이곳을 비추는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 이름. 문화행사와 미술 전시도 열린다. 책방 플리커(Flicker)에선 물 흐르는 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지기 좋다. 작가와의 북토크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마애석불 마주하니 근심·걱정이 사라지네
좀 더 깊이 자연과 교감하러 동상면 대부산에 오른다. 깊은 산 속 꼭대기에 숨어 있는 비경 수만리 마애석불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꼬박 1시간 정도는 등산해야만 마애석불은 그 신비로운 얼굴을 허락한다. 워낙 깊이 감춰져 있어 완주나 인근 전주에 사는 이들도 거의 모르는 곳이다. 등산로가 시작되는 입구에 펼쳐진 초록의 논과 파란 하늘도 예쁜 가을풍경. 벼가 이미 누렇게 익으며 고개를 숙인 걸 보니 곧 추수가 시작될 것 같다. 이정표는 대부산 정상까지 1.98㎞, 마애석불까지는 1.42㎞라 알린다.
조릿대로 뒤덮인 길을 조심스럽게 헤치며 산길을 오른다. 가파른 길은 대부분은 울퉁불퉁한 돌로 덮였고 햇살이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숲은 울창하다. 절반도 안 왔는데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래도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마음을 씻어주니 힘을 내 걸어본다. 그렇게 한 시간을 걸어 작은 암자를 지나 허벅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낄 때쯤 웅장한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상이 먼 길 오느라고 고생했다며 신비로운 미소로 손님을 맞는다.
약 10여m 높이 자연 암벽에 새긴 거대한 마애석불로 통일신라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이런 대형 마애석불이 유행했는데 이 석불은 얼굴이 유난히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스럽다. 가슴이 넓고 무릎이 두꺼워 당당하고 듬직하게 보이는 것을 보니 마을을 지키고 중생들을 돌봐달라는 염원이 담긴 것 같다. 영험한 기운 좀 받아볼 요량으로 작은 소원하나 빌어본다.
내려가는 길은 좀 쉽다 보니 올라올 때 보지 못한 야생화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주황색 꽃무릇(석산)이 등산로 주변에 지천이다. 상사화와 구분하기 어려운 꽃으로 여름에 피는 상사화는 잎이 지고 나야 꽃이 핀다. 반대로 가을에 피는 꽃무릇은 꽃이 먼저 피고 꽃이 말라 죽은 뒤에야 짙은 녹색의 잎이 돋아난다. 꽃과 잎이 살아 있을 때 절대 만나지 못하기에 꽃말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애절한 사랑, 슬픈 추억 등이다. 꽃말이 비관적이면 어떠랴. 기대하지 못한 예쁜 꽃들 눈에 가득 담으니 여행의 묘미를 더한다.
자연과 호흡하는 완주 여행은 사계절 삼림욕을 즐기는 고산자연휴양림에서 마무리한다. 휴양림 입구 고산문화공원에 조성된 무궁화 테마 식물원으로 들어서자 철 지난 무궁화 몇 송이만 덩그러니 남았다. 다양한 색상과 품종의 무궁화가 식물원을 예쁘게 꾸미는 시기는 8월이니 많이 늦었다. 무궁화는 없지만 잔디광장을 가로질러 깊숙하게 들어가면 연못을 중심으로 화려한 유럽식 정원이 펼쳐진다. 온실과 연꽃이 핀 아담한 연못, 그 위를 가로지르는 아치형 나무다리와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근사한 포토존을 선사한다.
휴양림은 낙엽송, 잣나무, 리기다소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무엇보다 북적거리지 않아 조용하게 나만의 시간을 갖기 좋다. 숲 속의 집에서 숙박할 수 있고 캐러밴이 있는 오토캠핑장에서는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과 함께 깊어가는 가을밤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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