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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남원 향교동 남원향교 교룡산 교룡산성 선국사

by 구석구석 202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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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동 남원향교 063 633 7304

향교는 교궁 또는 재궁이라고도 하며, 주로 조선 시대에 각 지방에 세운 문묘와 이에 부속된 학교를 말한다. 이 향교는 태조 이성계의 향교 설치령에 따라 조선 태종 10년(1410)에 남원시 서쪽 왕정동에 세웠던 것을 두번 이전하여 세종 25년(1443) 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정유재란때 불타버려 2년 뒤 1599년에 대성전을 다시 지었으며, 광해군 원년인 1609년 명륜당을 재건하고 순조 29년(1829) 년에 사마재를 재건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고종 13년(1876)에 다시 명륜당이 불타 그 해에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시설로는 대성전, 동무, 서무, 신문, 동재, 서재, 명륜당, 고직사, 진강루, 와문 등이 현존하며, 대성전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 한국관광공사

 

향교동 636번지 만인의총 사적272호 063-625-5394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 관. 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1592)때 호남을 침범하지 못해 승리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군은 1597년 11만 대군으로 다시 침략, 적의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 5만 6천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해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천여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주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분투 끝에 장렬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4년) 충렬사를 건립하였다. 몇 번의 이전을 거쳐 호국선현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의 지원과 전 도민의 정성어린 헌수로 1979년 정화를 마치고 충렬사에는 50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만인의총에서는 매년 9월 26일에 만인의사에 대한 제향을 올려,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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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산은 500여 미터 남짓한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 고장을 지켜낸 수호신마냥 산세가 자못 당당합니다. 더욱이 오래지 않은 때의, 여전히 식지 않은 뜨거운 역사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어서 성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곳이다. 외지인이 남원에 들어서서 그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도로 표지판에 그 이름이 보이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춘향골'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큰 까닭이다.

만인의총을 지나 시멘트로 포장된 비탈진 고갯길을 오르면 촘촘히 쌓은 성벽과 마주하게 되고, 그곳이 등산객들이 신발끈을 조여 매는 교룡산 산행의 시작점이다. 튼실하게 쌓은 교룡산성의 성벽은 산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성벽 높이라봐야 고작 어른 키 두세배쯤에 불과하지만, 워낙 가파른 곳에 자리하다보니 난공불락의 요새가 따로 없다.

홍예가 오롯하게 남아 있는 성문을 통과하려면 돌계단을 에둘러 올라야 한다. 생뚱맞게 반원형 옹성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여느 읍성처럼 평지에 쌓은 것도 아닌데 무슨 필요인가 싶지만, 무척 견고해 보인다.

이 철옹성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곳을 거쳐 간 역사적 인물은 멀게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처영과, 가깝게는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와 최시형, 그리고 동학농민군을 이끈 혁명가 김개남등이 기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동학의 발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남원에는 동학 관련 유적이 많다.

하나 같이 외침이나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 그들의 분노를 밑불 삼아 현실 극복의 의지를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게 했던 영웅들이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남의 도시 뒷산’ 교룡산을 굳이 찾아 오르는 것도 그들이 남긴 역사와 교훈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金開南東學農民軍駐屯地)’.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것이라기보다는 훗날 누군가가 기다란 막대기에 적어 홍예문 옆에 꽂아 둔 것으로 보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듯, 바탕의 하얀 칠 자국은 곳곳이 벗겨졌지만 검은 글자만큼은 여전히 또렷하다.

사진 오마이뉴스 서부원

그가 수많은 농민군을 이끌고 올랐을 길을 따라 오르면 지금은 폐허로 남았지만 곳곳에 집터의 흔적이 보인다. 개중에는 지금도 식당으로 쓰이는 집도 있고,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듯, 벽면에 주소 팻말이 붙어 있는 ‘버리기 아까운’ 곳도 있다. 이곳에서 치열한 접전이 있었을 과거에는 피난 온 백성들과 군사들을 위한 거처가 있었을 터이다.

비록 가파른 곳이지만 길이 갈지자로 굽어 있는데다 어린 아이들도 너끈히 오를 만큼 돌계단을 촘촘히 다듬어 놓아 외려 경사가 완만하다. 또, 길가로 소꿉장난처럼 헛담을 쌓고 군데군데 가로등과 이정표를 세워둔 것은 오르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도록 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홍예문에서 바쁠 것 없는 걸음으로 고작 10분 걸었을 뿐인데, 산성 속의 절, ‘선국사(善國寺)’에 닿았다.

절이래봐야 성냥갑 같은 건물 서너 채와 손바닥만 한 안마당이 전부다. 규모로만 보자면 웬만한 암자보다도 작다. 사천왕상이 눈을 부릅뜨고 앉은 천왕문은커녕 그 흔한 일주문도 없다. 각 부재를 따로 깎아 세우지 않고 몸돌과 지붕돌의 구분도 없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 세운 ‘꼬마 7층탑’이 눈에 들어온다. 거무튀튀한 이끼가 세월의 더께마냥 탑 전체를 두르고 있어 아주 오래된 유물 같지만, 모양새를 보건대 기껏해야 몇 십 년을 넘지는 않을 듯하다.

위치야 어떻든 법당과 나란하게 탑 한 기 자리한 것은 당연지사일 테지만, 탑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배롱나무 한 그루가 어린 아이를 품에 안듯 탑을 감싸고 있어 이채롭다. 백일홍이 만개할 즈음에는 탑의 검은 빛과 어우러져 한 폭의 멋들어진 컬러 화보가 만들어질 것 같다.

불교 교리로 따진다면야 절의 중심은 대웅전이겠지만, 이곳을 찾은 관광객의 눈으로 보자면 단연 ‘보제루(普濟樓)’다. 돌기둥 모양의 높다란 주춧돌 위에 세운 2층 누각이지만, 절 안마당에서 보면 평범한 단층 건물로 절 전체가 계단처럼 높게 쌓은 석축 위에 만들어진 까닭이다.

신발을 벗고 보제루에 올라서면 남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만큼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한다. 비록 절의 부속 건물일 뿐이지만,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작전을 지휘했던 본부가 있었음직한 건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에 이 건물의 마루에서 임진왜란 당시 임금이 승병장에게 하사한 ‘승장동인(僧長銅印)’이 발견되어 이곳이 ‘범상치 않은’ 절이었음이 밝혀졌다.

동학의 교주, 최제우가 그의 깨우침을 글로 남겨 경전으로 묶어낸 곳도 이곳이며,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남원을 점령한 김개남도 이곳에 걸터앉아 전략을 구상하고 새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의 저항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지만, 온갖 핍박 속에서 살아온 민초들의 잠자고 있는 의식을 깨워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틀어내는 데에는 충분했다.

용머리전경과 보국사 / 서부원

소박한 대웅전 현판 양 옆으로 용머리 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은 여느 것과 다를 바 없지만, 현판 왼쪽의 용은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다. 물고는 있으되 먹잇감으로 삼키려는 모습은 아니다. 모르긴 해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예일 것이다.

이 독특한 조각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김개남을 떠올린다. 그는 신분이든 재산이든 조금도 부족함 없는 양반가에서 태어나, 동학에 입교하여 비도를 자처하고 멀쩡한 이름까지 고쳐가며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혁명가이며 그가 남녘(南)에 열고자(開) 했던 새 세상이란 어떤 것이었을지.

어쩌면 이곳에서 농민군을 이끌며 그들에게 심어주었을 새 세상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조각으로 새겨져 남은 것은 아닐는지. 갑오년(1894년) 동짓달, 그는 끝내 공주 우금치를 넘지 못한 채 물러나 자신의 고향인 태인에서 잡히고, 재판도 없이 열흘 만에 효수되고 만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폭도라며 손가락질해대는 양반들에게 침을 뱉으며 사자후와도 같은 유언을 남긴다. “너희 양반 놈들이 백성들 등쳐먹을 줄만 알았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일이 대체 무어냐!”

나라(國)를 좋게(善) 만든다는 뜻의 절 이름과,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蛟龍), 곧 때를 잘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의 산이라는 이름이 공교롭게도 혁명가 김개남의 삶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서부원

산곡동 교룡산국민관광지야영장 063 620 6831

 청소년의 호연지기를 배양하고 심신을 단련키 위해 설치한 교룡산 야영장은 춘향골로 소문난 남원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만인의총(2km)과 지리산 국립공원(20km), 남원관광단지 (5km)가 있음. 교룡산 중턱에 위치하여 주위경관이 좋으며 수용정원은 500명으로 테니스장, 체력단련장, 축구장, 자연체험장, 취사장을 갖추고 있다.

 

산곡동 지리산하이츠콘도 063 626 8080   www.heights.co.kr/nam/condo.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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