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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석관동 세계문화유산 의릉

by 구석구석 2022.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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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화랑로32길 146-20 / 의릉 02-964-0579

의릉은 경종(1688 ~1724, 재위 1720~1724)과 왕비 선의왕후(1705 ~1730)의 능이다. 선의왕후는 경종의 세자시절 두 번째 빈이다. 첫 번째 세자빈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후 경종이 왕이 되면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은 동구릉에 있다.

1688년(숙종 14) 숙종과 당시 소의였던 장씨(흔히 장희빈으로 불림) 사이에서 태어난 경종은 우리 나이 세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됐다. 세자가 서른 살이던 1717년 숙종은 노론의 핵심 인물 좌의정 이이명을 불러들여 독대하고, 두 달 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

세자가 대리청정하는 동안 그를 지지하는 소론(少論)과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延礽君, 훗날 영조)의 지지 세력인 노론(老論) 사이에 대립이 심화했다. 3년 후인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경종이다. 

경종 즉위 이듬해인 1721년(경종 1), 후사가 없던 그의 후계자를 세우는 일에 대한 논의가 제기된다. 노론계의 총대를 멘 사간원 정언 이정소가 ‘하루속히 저사(儲嗣, 왕위 계승자)를 세울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 노론이 주도해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의 아들로,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저사로 정한다. 연잉군을 저사로 정하는 일은 왕대비(숙종의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가 언문(한글) 손편지로 내린 하교와, 이에 따른 경종의 전지(傳旨)를 통해 이뤄졌다. 


인원왕후는 ‘효종의 혈맥과 숙종의 골육은 경종과 연잉군뿐’이라는 이른바 ‘삼종혈맥(三宗血脈)’의 논리로 연잉군의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왕세제(王世弟)라는 전무후무한 위호로 책봉이 확정된 연잉군은 궁으로 들어가 거처하게 된다.

그러나 소론 유봉휘는 세제 책봉 결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임금이 아직 젊은데 즉위하자마자 후계를 정하고, 그런 중대한 결정이 몇몇 대신들 사이에서 졸속으로 이뤄진 것은 잘못됐다’는 주장이었다.

노론 대신들이 유봉휘를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경종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노론계 대신들과 삼사의 논핵에도 불구하고 유봉휘는 석고대명까지 하며 끝까지 반대하다가 유배된다. 마침내 경종은 왕세제와 세제빈의 책봉례를 행하고 연잉군은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가 된다. 정배형에 처해졌던 유봉휘는 몇 달 후 정배에서 풀려난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에 성공한 노론은 한 발 더 나가 세제의 참청(정사 참여)을 주장한다. 김창집과 이이명 등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 집의 조성복이 세제로 하여금 참청하게 할 것을 청한다. 경종은 이를 받아들이고 세제에게 참청이 아니라 아예 대리청정(정사 대행)하게 할 것을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명한다. 

하지만 최석항 등 소론계 중신들이 이에 거세게 반발하자 곧바로 결정을 철회할 뜻을 밝힌다. 대리청정 결정 철회에도 불구하고, 세제의 참청을 처음 거론한 조성복 등의 논죄를 두고 소론과 노론 간 치열한 공방이 이어진다. 

사간원에서 조성복을 외딴섬에 위리안치할 것을 청하자 경종은 이를 허락한다. 또, 사간원에서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하는 비망기를 빨리 알리지 않아 재상과 대신들이 제때 임금을 말리지 못하게 했다며 왕명 출납을 담당했던 승지를 파직할 것을 간하자 경종은 이를 받아들인다. 

우유부단했던 경종은 사흘 후에 다시 비망기를 통해 자신의 병 치료를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한다. 그러나 우의정 조태구 등 소론의 극심한 반발은 물론, 임금 자신도 대리청정을 확고하게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노론은 세제의 대리청정 추진을 포기한다. 양 당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경종은 소론계 우의정 조태구가 대리청정의 명을 거둘 것을 거듭 청하자 마침내 앞서 내린 비망기를 환수해 세제의 대리청정을 공식 철회한다.

홍살문 / 국가문화유산포털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에 이어 대리청정까지 추진하는 등 노론의 독주가 이어지자 1721년(경종 1, 신축년) 12월 소론의 강경파 김일경, 박필몽 등이 반격에 나선다. 이들은 세제의 참청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던 조성복과 그 배후였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의 네 대신을 사흉(四凶)이라 부르며 이들이 멀쩡한 왕을 버리려 역심을 품었다고 탄핵한다. 

경종은 노론 네 대신과 함께 여러 승지들을 파직한다. 또 삼사의 여러 신하들의 관작을 빼앗고 도성 밖으로 내쫓는다. 이로써 삼정승 중 소론계 우의정 조태구가 영의정으로 올라가고, 역시 소론계인 최규서와 최석항이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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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은 노론의 네 대신을 논죄하고 이들을 외딴섬에 위리안치(유배지 거소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고 가둠)할 것을 청했다. 경종은 김창집을 거제도, 이이명을 남해, 조태채는 진도에 안치한다. 마침 세제 책봉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던 이건명은 귀국 후에 곧장 흥양(전남 고흥의 옛 지명)에 안치된다.

이듬해인 1722년(경종 2, 임인년) 3월에는 정윤중, 이기지 등 노론계 자제들이 경종을 시해하려 역모를 꾀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이 올라온다. 고변 내용에는 이들이 ‘칼, 독약, 폐출’의 세 가지 수단(三手, 이로 인해 ‘삼수의 옥’으로도 불린다)으로 임금을 시해 또는 폐출하려 했으며, 여기에 노론 이이명과 왕세제 연잉군의 처조카 서덕수도 연루됐다는 대목이 포함돼 있었다.



소론은 유배 중이던 노론 대신들을 사사하라 요구한다. 결국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네 대신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해 노론의 네 대신을 비롯해 연루자들이 처형되고, 수많은 노론계 인사들이 유배 또는 연좌돼 처벌을 받는다. 

이로써 노론은 완전히 세력을 잃고 경종의 남은 재위기간 동안은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훗날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한 후 이 사건은 소론 강경파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이 꾸며낸 무고였음이 밝혀진다. 목호룡과 김일경은 당고개에서 참수형에 처해진다.

재위 마지막 해인 1724년 8월 초 병세가 위급해져 창경궁 환취정으로 옮긴 경종은 한열, 복통, 설사 등 증세가 계속된 끝에 8월 24일 의식을 잃고 다음날 숨을 거둔다. 

그는 죽기 닷새 전 수라간에서 올린 게장과 감을 먹고 밤에 가슴과 배가 뒤틀리듯 아팠다. 의관들은 게장과 생감을 같이 먹는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리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그 게장이 동궁에서 보낸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후 영조 즉위 후에도 두고두고 ‘연잉군이 게장으로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의 빌미가 된다. 

훗날 영조 때 과거 시험장에서 소론 강경파와 남인의 자제들이 임금을 비방하는 답안지를 써서 관련자들이 모두 역모죄로 처형되는 이른바 ‘답안지변서사건’이 일어난다. 실록에는 이때 주모자 중 하나였던 신치운이 친국장에서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영조가 세제 시절 게장으로 경종을 독살했다는 세간의 소문에 빗대어 빈정거린 것이다.

의릉 산책길


우리 나이 서른일곱, 재위 4년 만에 죽은 경종의 시호는 ‘덕문익무순인선효(德文翼武純仁宣孝)’, 묘호는 ‘경종(景宗)’, 능호는 ‘의릉(懿陵)’으로 정해졌다. 경종은 1724년 12월 16일 경기도 양주 천장산(현 서울 성북구 석관동) 의릉에 묻혔다.

경종의 세자시절 첫 번째 빈이었던 단의빈 심씨(경종 즉위 후 단의왕후로 추존)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18년(숙종 44)에 죽었다. 같은 해 병조참지(경종 즉위 후 함원부원군에 봉해짐)였던 어유귀(魚有龜)의 딸이 두 번째 세자빈으로 간택돼 책립됐다. 그녀는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됐다. 

그녀는 경종이 죽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스무 살의 나이로 왕대비가 된 후 1730년(영조 6) 스물여섯에 경덕궁 어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에게는 ‘선의(宣懿)’라는 존시가 올려졌다. 그녀는 앞서 세상을 떠난 경종이 잠든 의릉 왼편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으나 능은 경종의 옆이 아닌 아래쪽으로 정해졌으며, 능호는 경종의 의릉을 따랐다.

의릉은 언덕 위쪽에 경종의 능이, 그 아래쪽에 선의왕후의 능이 자리잡고 있는 동원상하릉형식이다. 이 용어는 실록이나 국조오례의 등 공식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다. 쌍릉의 경우 왕과 왕비의 능을 옆으로 나란히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의릉은 폭이 좁은 언덕의 위아래로 배치했다. 이 같은 예는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여주 영릉(寧陵)에서도 볼 수 있다.

52년이라는 최장 재위기간 기록을 갖고 있는 영조와 두 번째로 재위기간이 길었던 아버지 숙종의 46년, 두 사람 사이에 끼인 경종의 4년까지 포함하면 숙종·경종·영조 3부자의 치세는 무려 102년에 이른다. 흔히 말하는 ‘조선왕조 5백 년’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이 이들의 시대였던 셈이다.

경종은 재위기간이 너무 짧아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병약했던 그는 즉위 이듬해 때 이른 후계 지명으로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위에 올리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경종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논란에서 비롯된 노론ㆍ소론의 당쟁, 그리고 경종 독살설은 왕이 된 영조를 두고두고 괴롭히는 걸림돌이 됐다.

아버지 숙종의 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어머니 장희빈보다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경종이 잠든 의릉. 능 입구 건너편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인 듯, 한 무리 젊은이들의 쾌활한 웃음이 섞인 대화 소리에 잠시 숙연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 한국아파트신문 2022 유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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