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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김포 세계문화유산 장릉

by 구석구석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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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장릉 : 인조 아버지 원종과 어머니 인헌왕후의 쌍릉

한자로는 각각 다르나 우리 말로는 모두 장릉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왕릉 세 기가 있다. 단종의 영월 장릉(莊陵),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의 김포 장릉(章陵), 그리고 인조와 인열왕후의 파주 장릉(長陵)이다. 김포 장릉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과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의 쌍릉이다.

장릉 능침[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에는 살아서 왕위에 오른 적은 없으나 사후에 왕으로 올려진 추존왕이 아홉 명 있다. 우선 태조의 아버지부터 고조부에 이르는 4대조가 각각 환왕·도왕·익왕·목왕을 거쳐 태종 때 다시 환조(桓祖)·도조(度祖)·익조(翼祖)·목조(穆祖)로 추존됐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덕종 德宗), 인조의 사친 정원군(원종 元宗), 영조의 맏아들이자 정조의 양부 효장세자(진종 眞宗), 영조의 둘째 아들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장조 莊祖),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문조 文祖)도 사후에 왕 또는 황제로 추숭됐다.

이중 원종의 추존되기 전 군호는 정원군(定遠君)이었다. 선조는 원비 의인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고, 계비 인목왕후와 공빈 김씨 등 여섯 후궁(실제 후궁은 더 많았다)에게서 모두 열네 명의 왕자를 낳았다. 그중 인목왕후의 외아들로 이복형 광해군에 의해 유배돼 죽은 영창대군만 적자였고, 나머지는 후궁 소생의 서자들이었다. 정원군은 후궁 인빈 김씨가 낳은 네 아들 중 셋째로, 선조에게는 다섯 번째 왕자였다.

실록은 선조의 열네 아들 중 임해·정원·순화군이 골칫덩이 삼총사였음을 보여준다. 서장자 임해군(臨海君, 1572~1609)은 재물 욕심이 특히 많았던 인물로 기록돼 있다. 그는 (절에 시주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절에서 시주를 받아갈’ 정도로 재물을 탐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여섯째 순화군(順和君, 1580~1607)은 술에 취하면 사람 죽이기를 쥐 죽이듯이 해 그에게 무고하게 살해된 사람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다섯째 왕자 정원군 또한 악명이 높았다. 그가 남의 농토나 노비를 빼앗아 가난한 선비나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정원군의 하인들이 그의 위세를 등에 업고 난동과 패악을 저지른 일도 있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큰어머니인 하원군부인을 궁노들이 정원군 집 문간에 감금한 사건까지 일어나 조정을 시끄럽게 하기도 했다. 

광해군일기에는 정원군이 어려서부터 인물이 범상치 않고 우애가 깊어 아버지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이는 정원군이 죽은 광해군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아들 인조가 왕위에 올라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한 후에 추가된 기록이다. 어려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살아있던 당대의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왕자로서 그에 관한 기록은 졸기(卒記)에 묘사된 그의 성품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순화군 이보의 졸기에는 정원군을 포함한 세 왕자의 행실을 압축해 표현한 대목이 눈에 띈다. ‘이보는 성질이 패망해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이나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했다.’ (선조실록, 1607년 3월 18일)

임해·정원·순화군의 이 같은 행태는 백성들로 하여금 차라리 나라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원망까지 하게 했다. 그럼에도 우유부단한 선조는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 순화군을 연금하는 외에는 자식들을 따끔하게 혼내주지 않았다. 순화군은 연금된 집에서 뛰쳐나와 ‘묻지 마’ 살인 행각을 계속했다. 선조는 오히려 왕자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지적하는 신하들을 꾸짖는 등 비뚤어진 자식 감싸기로 간관들을 통탄하게 했다. 시대와 신분을 떠나 고슴도치식 자녀 사랑이 자식을 망치고 사회를 멍들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조의 둘째 아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 동복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제거했다. 인빈 김씨의 아들 넷 중 정원군의 두 형 의안군과 신성군은 광해군 즉위 전에 어린 나이로 죽고, 정원군과 동생 의창군만 남아있었다. 이들은 광해군에 의해 직접적인 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광해군의 생모 공빈이 산병으로 죽은 후 서모인 인빈이 세자시절 광해군을 잘 감싸줘서 그가 그 은혜와 의리를 잊지 못했던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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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즉위 초기에는 이복형제 중 연장자인 정원군을 왕실의 종친으로서 나름 신경 써서 예우했다. 하지만 정원군의 집터와 그의 어머니 인빈의 선영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을 들은 광해군은 그를 의심하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615년(광해 7)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 등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광해군은 능창군을 강화 교동으로 유배하고 자진하게 하며, 왕기가 서려 있다는 정원군의 집은 몰수해 허물고 그 터에 자신의 궁궐(경덕궁)을 지었다.

정원군은 정실인 연주군부인 능성 구씨와의 사이에서 첫째 능양군(1595~1649), 셋째 능원군(1598~1656), 넷째 능창군(1599~1615) 등 세 아들과 측실 김씨에게서 둘째 능풍군(1596~1604, 어려서 죽음)을 얻었다. 막내 능창군이 죽은 후 정원군은 광해군이 또 무슨 죄목으로 남은 두 아들을 해칠까 하는 걱정과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

장릉 원경[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출처 : 한국아파트신문(http://www.hapt.co.kr)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광해군일기, 1619년 12월 29일)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든 정원군은 1619년(광해 11) 마흔 살 한창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광해군은 정원군이 죽은 후에도 그의 장례를 재촉하고 조문객을 감시하는 한편, 그의 묘도 경기도 양주 곡촌리에 임시로 장사지내게 했다.

연주군부인 구씨는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1590년(선조 23) 정원군과 가례를 올리고 군부인에 봉해졌다. 그녀는 남편 정원군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1623년 맏아들 능양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인 1626년(인조 4) 마흔아홉의 나이로 죽었다. 그녀의 무덤(園)은 당초 고양으로 정했으나 지관들이 묏자리에 흠이 있다고 해 김포로 바뀌었다. 그해 4월 김포현 뒷산에 묻힌 그녀의 봉분 오른쪽은 양주에 있던 남편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비워뒀다.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죽은 아버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에 추봉하는 한편, 살아있던 어머니 연주군부인은 연주부부인으로 승봉하고 계운궁(啓運宮)이라는 궁호를 올렸다. 또한 인조는 즉위 3년 후 어머니 연주부부인이 세상을 뜨자 김포현에 장사지내면서 원호를 육경원(毓慶園)으로, 앞서 세상을 떠 양주에 묻힌 아버지 정원대원군의 원호는 흥경원(興慶園)이라 각각 정했다. 그 후 1627년(인조 5) 인조는 양주에 있던 흥경원을 김포의 육경원 옆으로 옮겨 쌍분으로 조성한 후 원호는 흥경원으로 합쳐 불렀다.

부모의 묘를 한 곳에 모시고 난 인조는 부모를 왕과 왕후로 추존했다. 즉위 후 1625년부터 1630년 사이에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인조의 뜻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이어졌다. 일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고 추존을 밀어붙였다. 

마침내 1632년(인조 10),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각각 ‘경덕 인헌 정목 장효(敬德仁憲靖穆章孝)’와 ‘경의 정정 인헌(敬懿貞靖仁獻)’의 시호를 올려 추숭하고 흥경원을 장릉(章陵)으로 격상시켰다. 이어 1634년(인조 12)에는 아버지에게 원종(元宗)이라는 묘호를 추상했다.

부모를 각각 왕과 왕후로 추존한 데 이어, 인조는 이들의 신주를 종묘의 정전(正殿)에 모시는 태묘(太廟), 부묘(祔廟)를 추진했다. 조정 대신들이 ‘살아서 왕위에 오르지 않았던 왕을 태묘에 부묘할 수는 없다’며 반대했지만 이번에도 인조는 이를 밀어붙였다. 예조(禮曹)에서는 원종을 정전이 아닌 별묘에 들일 것을 건의하고, 삼사와 삼정승에 이어 성균관 유생들까지 원종의 태묘 부묘에 대해 반대했다. 인조는 반대하는 일부 신하들의 관작을 빼앗고 도성 밖으로 내쫓으면서까지 부묘에 대한 결심을 꺾지 않았다. 결국 1635년(인조 13) 3월 19일 원종 부부의 태묘 부묘가 이뤄졌다. 

한편 원종과 인헌왕후의 신주를 태묘에 모시면서 옛 신주는 장릉에 묻었다.

정원대원군과 계운궁이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숭되면서 능으로 격상된 장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다. 인조는 흥경원을 장릉으로 격상하면서 도감을 설치해 능의 석물을 다시 마련하게 했다. 한편 원(園)에서 능(陵)으로 바뀌면서 장릉에 설치할 석물에 대해 예조에서는 기존 홍경원의 석물에 없었던 석호·석양·석마와 난간석을 추가로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인조의 뜻에 따라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석호·석양·석마 등 수석(獸石)만 각각 둘씩 추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장릉은 경사진 지형에 따라 향·어로가 계단식으로 조성돼 있다. 또한 장릉에서는 대부분 왕릉에서는 사라진 연지(蓮池)를 볼 수 있다.

김포 장릉은 풍수지리상 조산(祖山)이자 안산(案山)인 계양산과 능 사이에 얼마 전 들어선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인해 문제가 된 능이다. 이로 인해 전체 조선왕릉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지위에 영향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주택가 가까이 있어 휴일이면 능역 내 연지와 저수지 주변을 산책하는 길에 능을 둘러보러 몰려드는 주민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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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한국아파트신문 2022.11 유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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