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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대구광역시

달성군 용연사 대견사지 비슬산

by 구석구석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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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5번국도(용연사~비슬산) 

달성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비슬산이다. 비슬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청도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산 정상의 바위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비슬(琵瑟)'이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하기도 하고, '비슬'이란 말이 인도의 범어의 발음 그대로 음으로 표기한 것이라고도 하였는데, '비슬'의 한자 뜻이 '포(苞)'라고 해서 일명 '포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비슬산 정상인 대견봉(1083m)에서 남쪽으로 월광봉, 조화봉, 관기봉이 거대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특히 월광봉에서 대견사지 능선부근까지 30여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진달래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대견봉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붉은 기운이 상 정상부근에 가득 깔려 있었다.

진달래 군락지 능선 반대쪽에는 대견사라는 사찰이 있던 '대견사지'가 있다. 이곳에는 석탑과 연화대석, 큰 규모의 돌 축대들만이 옛 사찰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대견사지 높은 벼랑 끝에 삼층석탑이 있다. 그 석탑 앞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높은 산 정상 부근이면서 벼랑 끝에 서 있는 석탑은 1988년 달성군에서 흩어진 석탑재들을 수습하여 재건립한 것이다.

 

대견사지 위 능선에서 조화봉으로 가다 보면 여러 개의 칼들을 꽂아놓은 듯한 바위들이 보이는데 이를 칼바위 또는 톱바위라 한다. 비슬산 정상 부근에는 이 칼바위를 비롯하여 암괴류(너덜강), 토르 등 여러 형태들의 바위들이 발달되어 있어서 천연기념물 43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대견사지터 비슬산의 최고봉은 1,084km의 준봉으로 여기서 뻗어나간 산맥이 청룡산, 앞산으로 이어져 거대한 비슬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겉으로 보아 그리 높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산이지만,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 장중한 산세와 맑은 공기에 반해 누구라도 다시 찾게 된다. 또 유가사, 용문사, 소재사, 용연사 등 사찰과 암자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1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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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의 겨울 예로부터 비슬산은 영험 있는 수도처로 알려져 왔으며, 성인 천명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특히 명승 일연이 20대를 보낸 수행지였다는 사실은 이 산의 깊은 내력을 말해준다. 당시 일연 스님은 비슬산 보당암에 머물면서 다양한 신앙과 경전을 접했는데, 이것은 훗날 삼국유사의 폭넓은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달성에는 신라 신덕왕 때 창건한 용연사라는 유서깊은 사찰이 있다. 공단의 넓은 도로를 지나 오르막을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길은 좁아지고, 매표소를 지나면 차 한 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길 옆으로 음식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극락교와 천왕문
청운교

3층석탑 뒤편으로 정면3칸의 맞배지붕을 이고 있는 극락전이 자리잡고 있다. 극락전 내부에는 영조 때 조성된 후불탱화와 삼장탱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10여년 전쯤 도난당했다고 한다. 후불탱화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빈궁 조씨가 효장세자의 삼년상을 마치고 시주하여 만든 불화인데, 슬픔을 갈아 만든 불화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통도사의 금강계단, 설악산의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는 우리가 흔히 5대 적멸보궁으로 각인되어 있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당나라로부터 가져온 부처와 사리와 정골사리를 안치한 5곳을 말한다. 하지만, 이곳 용연사에도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한 석조계단과 적멸보궁이 자리잡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가 안치된 석조계단의 앞에는 적멸보궁이 자리잡고 있다. 진신사리는 부처님과 동일하다. 따라서, 부처가 열반에 들고난 후 불상이 조성될 때까지는 유일무이하며 경건한 숭배대상이었다. 적멸보궁이라는 전각은 부처님과 동일한 진신사리를 예배하는 장소로 마련된 절집의 공간이며, 진신사리가 안치되어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불상이 없는 전각이 된다. 진신사리가 있는 방향으로 창이 나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적멸보궁

임진왜란 때 왜군은 통도사의 사리를 탈취하게 된다. 사명대사가 설득해 반환받게 되는데, 이 사리의 처분을 위해 스승인 서산대사를 찾아가자 한 개의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안치하고, 나머지 하나는 다시 통도사에 안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사명대사마저 입적하게 되자 제자인 청진이 두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사리 한 과는 통도사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하나는 용연사에 모시게 되니 바로 이것이 바로 용연사 석조계단이다.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같은 계단형 사리탑으로 보물 5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중기단 위로 석종을 올려놓은 듯한데, 기단에는 각 면에 2구씩 팔부중신을 새겼다. 도드라지게 표현된 팔부중신의 모습은 옷자락과 무기,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불행하게도 석조계단의 사방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철침을 박아놓았고, 희끄무리한 중국인 닮은 석상을 8구나 세워놓았다. 그 덕에 하늘을 나는 용감무쌍한 팔부중신상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예전에는 사리탑 사방에 사천왕상이 한 구씩 있었다고 하는데 도난의 위험성 때문에 극락전에 갖다 놓았단다. 결국 부처님의 사리는 쇠창살 안에 갇힌 채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중국인 석상의 호위를 받고 있는 셈이다.

 

/ 자료 글-오마이뉴스 서종규 / 대구광역시 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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