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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도

과천 과천향교 - 관악산

by 구석구석 202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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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이 살아있는 과천향교.

관악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과천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창건되었으나 터가 좋아 등과유생이 없다는 이유로 숙종 16년(1690)에 현재 위치로 이전ㆍ개축되었다. 한 때 시흥군에 포함되어(1959) 시흥향교로불리다가 1966년 성균관의 승인에 의해 과천향교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과천향교는 전학후묘의 배치에 딸 유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이 앞쪽에 있고, 문묘 (대성전)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성현과 우리나라 유학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 (제사의 높임말)하는 곳으로 봄 (음력2월), 가을 (음력8월) 초정일에 지내는 석전제와 매월 초하루 (음력 첫째날), 보름에 재는 삭망분향례가 있다. 

관람포인트인 향교 계단은 보통 3줄로 되어 있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되, 계단에 오를 때는 오른 쪽, 내려올 때는 왼쪽을 이용하는 것이 예의이다. 중앙계단은 신(神)의 계단이므로 함부로 오르내리면 안 된다. 

향교는 고려시대 이후에 공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유학이라는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방에 세운 일종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 과천향교는 조선 1대 왕인 태조 7년 (1398년)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본래의 위치는 과천관아 동북 2리 (갈현동 부근이라 추측함)에 있었으나, 향교의 터가 좋지않아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학생이 없고 벼슬을 하는 인재가 나오지 않자 숙종 16년 (1696년)에 당시 과천현감 황이명이 과천관아 서쪽 2리인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1944년 일본 강점기에 안산향교와 시흥향교가 과천향교에 합쳐지고 1959년 과천향교의 이름이 시흥향교로 바뀌었다가 1996년 본래의 이름인 과천향교로 바뀌었다. (1914년부터 과천은 시흥군 과천면이었다.)

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라고 하여 앞쪽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명륜당이있고, 뒤쪽은 공자를 비롯한 25명의 훌륭한 학자들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인 대성전이 있다. 과천향교에는 홍살문, 외삼문 (향교에 들어가는 문. 명륜당 앞에 있음), 내삼문 (명륜당과 대성전을 경계짓는 문), 수복가 (제사를 맡아보는 사람이 거처하는 집) 등이 있고 옮기기 이전의 향교에는 사직각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제내는 곳), 동제 (양반 자녀들이 머무는 곳), 서제 (평민의자식이 거처하는 곳) 가 있었다.

자료 - 경기관광공사

 

○ 지정번호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호
○ 지정일 : 1975년 2월 5일
○ 소유자 : 경기도 향교재단
○ 규모/면적 : 3,976㎡
○ 시대 : 조선시대
○ 주차 : 공영주차장 이용

 

찾아가는길 서울외각순환도로 (일산에서 판교) 이용시 학의분기점에서 과천, 의왕간 고속도로 이용 과천청부청사 방향 관악산 등산로 입구

 

관악산

관악산은 산세가 합천의 가야산과 더불어 석화성(石火星, 마치불꽃이 타오는 듯 형상을 한 바위의 모습) 형상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높이 또한 629m로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능선 곳곳에 암봉과 암능이 있어 스릴감 넘치는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알고 있다.

또한 관악산은 서울 관악, 금천구와 경기도 과천, 안양시를 끼고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등산로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곳으로도 유명한 산이다.

그중에서도 서울대 기점과 안양유원지 기점이 등산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코스로 알려져 있다. 가장 빠르게 오를 수 있는 코스는 과천향교에서 올라가는 코스라고 한다. 이 코스는 사람에 따라 약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등산로 길은 대체적으로 험준하지 않은 데다 정상으로 가는 길목 옆으로 약수터가 몇 개 있어 등산객들에게는 간간이 갈증을 풀 수 있는 코스였다. 다만 돌길이다 보니 관절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무리가 따를 것으로 보인다.

 관악산의 자하동 중 과천쪽 계곡은 가장 절경을 이루고 있어 과천8경의 하나이며 예부터 자한 신위, 추사 김정희, 우암 송시열 등 많은 묵객들이 시를 짓고 암각문을 남긴 명소로 맑은 물이 흐를 때는 속세를 떠나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이 길을 오르다보면 산 정상 주변에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主寺)의 말사인 연주암이 있다. 연주암은 신라 677년(문무왕 17) 의상대사가 현재의 절터 너머 골짜기에 창건했으며, 1411년(태종 11) 현재 위치로 절을 옮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주암이란 이름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태종의 뜻을 알고 유랑하다가 이곳 연주암에 머물게 되었는데, 암자에서 내려다보니 왕궁이 바로 보여 옛 추억과 왕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을 세인들이 보고 부르게 된 것이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외에도 대웅전 앞뜰에는 효령대군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된 높이 4m의 3층 석탑과 비단에 그려진 16나한의 탱화와 고려시대 것이라는 약사여래석상이 있다. 특히 이 석상은 영험(靈驗)이 많다 하여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한편 연주암에서 약 10분 정도 오른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경기도 기념불제20호)가 나온다. 그곳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즐거움을 배가시켜 준다.

이외에도 주변에 아주 작은 불당이 보이는데 이곳이 1392년(태조 1)에 이성계가 무악대사의 권유로 국운의 번창을 빌기 위해 연주봉 절벽 위에 석축을 쌓고 30㎡ 정도 되는 대(臺)를 구축하여 그 위에 암자를 지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이곳에는 효령대군의 초상화가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 연주대 뒤편에는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을 지닌 말바위(馬巖)가 눈앞에 보인다.

 / 오마이뉴스 최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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