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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장성 영천굴 백학봉 운문암

by 구석구석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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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혈(米穴)의 전설이 서린 영천굴

전남 장성 백암산 약사암을 나와 다시 산자락을 오른다. 길은 여전히 가파르다. 그러나 이미 고갯길에 익숙한 몸은 더는 투정부리지 않는다. 적응이란 마음이 시비를 걸지 않는 상태를 두고 이르는 말이던가. 100여 m나 올랐을까. 천연석굴인 영천굴이 나온다. 석굴 안은 20평 남짓한 넓이다. 텅 빈 석굴 안을 석조관세음보살상이 홀로 지키고 있다.

옛날에 이곳에 수도하는 스님이 살았는데 바위 구멍에서 항상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다.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그에게 공양을 대접하려면 더 많은 쌀이 필요했다. 스님은 쌀이 더 많이 나올까 하여 작대기로 구멍을 쑤셨는데 그 뒤로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곳곳에 전해내려오는 미혈(米穴) 전설이다.

쌀 대신 물이 나왔을 때, 그 스님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욕심 때문에 제 분수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뻔하디 뻔한 교훈이 담긴 이야기다.

영천굴 아래에 있는 샘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샘으로 깊숙이 바가지를 밀어넣어 물을 떠 마신다. 전설이 설하는 교훈은 식상하기 짝이 없지만 물맛만은 폐부를 찌를만한 시원함이 있다.

영천굴에서 나와 다시 백학봉을 향한다. 가파른 고갯길엔 끝이 보이지 않는 목재 계단이 설치돼 있다. 이제 계단이 다 끝났나 싶으면 또 다른 계단이 시작된다. 계단 옆으론 천애절벽이 우뚝하다. 마치 고매한 정신 같다.

어쩌면 옛사람들이 이 봉우리에다 백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고매한 정신의 흔적을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학은 드높은 정신의 은유일 터. 얼마나 수많은 계단을 딛고 올라서야 백학이 노니는 곳에 갈 수 있단 말인가.

백학봉(651m) 꼭대기에 올라섰다.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읍과 순창의 들판이 보이고 저 멀리 남쪽으로 눈길을 주니 사자봉이 삼매에 잠겨있다.

백암산의 정상인 상왕봉을 향해 간다. 한동안 굴곡 없이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암릉 길을 지나다 멋들어진 풍모를 지닌 소나무 두 그루를 만난다. 혹 백암산 산신령이 심심할 때 벗하는 소나무가 아닐까.

추사가 그린 <세한도> 속 소나무가 지조와 절의를 상징하듯 깡마른 모습을 하고 있다면 이 소나무는 이인문이 그린 <송계한담도> 속 소나무를 닮았다. 세속의 번거로움을 벗어나 조용히 은일의 삶을 즐기는 탈속한 선비처럼 보인다.

산죽이 우거진 길을 지나서 마침내 백암산의 고스락인 상왕봉에 이른다. 어찌나 밋밋한지 여기가 과연 최고봉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앉아서 쉬었다 갈 바위를 찾으려고 조금 아래로 내려가자 스님 한 분과 보살 두 분이 바위에 걸터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약수암 가는 다리 근처에서 보았던 그 스님이 분명하다. 스님과 난 서로 반대 방향에서 상왕봉에 오른 것이다. 스님은 백양사 강원 강사 스님이라고 한다.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옹스님이 살아계실 적 백양사에서 처음 열렸던 '무차선법회'에 대한 이야기 등.

스님에게 백양사 선원인 운문암에 들를 수 있는지에 대하여 자문했다. 운문암에는 현재 약 스무 명가량의 스님이 결제에 참가해 용맹정진 중이라 한다.

"물론 결제 중이이라 조심스럽겠지요. 그렇지만 잠시 조용히 들르는 거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스님의 말씀은 수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하면 된다는 뜻이렷다. 친절하게도 스님은 운문암으로 가는 길까지 자상하게 일러준다.

왜 나는 구태여 일반인의 출입을 막느라 문을 닫아건 선원에 들리려고 하는가. 눈 푸른 납자들이 결사 정진하는 선원이야말로 절집의 꽃이다. 그런 곳에선 가만히 흘러가는 뭉게구름마저도 고귀한 법문이 된다. 그러니 어찌 그곳에 가서 법문 몇 구절이나마 귀동냥해 듣고 싶지 않겠는가.

스님과 헤어져 운문암으로 가는 길을 서두른다. 길섶 여기저기 꽃들이 피어 있다. 암벽 중간에 무리지어 핀 바위채송화 꽃이 어여쁘다. 돌나물과에 속하는 바위채송화는 돌나물과에 속하는 꽃이다. 봄철에 생으로 무쳐먹기도 하는 돌나물과 생김새가 비슷하다 하여 개돌나물이라고도 부른다.

암벽 꼭대기엔 각시원추리 꽃들이 피어 있다. 각시원추리는 해발 약 800m 정도에서 자라는 꽃이다. 추운 겨울이 되어도 묵은 잎이 말라비틀어진 채로 남아 어린싹을 내내 보호하다가 봄이 되면 비로소 썩어 마치 엄마가 아기를 보호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옛사람들은 이 꽃을 모애초(母愛草)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산문 개폐의 실익을 따지다

운문암으로 가는 길과 청류압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 삼거리에 이른다. 운문암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얼마 걷지 않아 사립문이 불쑥 길을 막고 선다.

"정진 중이오니 돌아 가십시요."

약간 멈칫거리다가 사립문을 밀치고 운문암으로 가는 길을 유유히 걸어간다. 재작년 초파일 봉암사에서 사찰을 엄호하던 스님과 '봉암사가 일 년 내내 산문을 봉쇄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하여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산문을 닫아걸고 대중의 접촉을 막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괄목할 만한 수행의 성과를 내놓든가, 아니면 차라리 대중에게 불전을 개방함으로써 부처전에 공덕을 쌓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실익이 크지 않느냐는 것이 내 얘기의 요체였다.

내가 보기에 근래의 봉암사 선방은 예전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봉암사가 일반인에 대해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 속(俗)에 대한 승(僧)의 우월주의나 권위주의의 일단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 점에서 본다면 이 운문암 선원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개울을 건너자 높이 쌓아올린 축대 위에 꿈꾸듯 고즈넉이 앉아있는 운문암이 고개를 내민다. 발걸음 소리조차 두려워하며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간다.



운문에 해는 긴데 이르는 사람 없고

운문암은 상왕봉 아래 자리하고 있다. 백양사가 창건될 즈음에 함께 세워졌다고 하는 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운문암 자리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회하는 터라고 하는 말을 25년 전 백양사에 며칠 머물 때 지관이던 분에게서 들었다.

그분은 또 운문암은 대둔산 태고사, 부안 월명암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큰 스님들이 많이 나오는 곳 중의 한곳이라고도 했다. 이른바 혈(穴)이 많은 곳이다.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선객들 사이에서 이 운문암은 한 철 공부하고 싶어하는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운문암 터가 좋아서였던가. 백양사에선 조계종 종정만 다섯 분이나 나온 바 있다.

제5대 종정을 지내시고 지난 2003년에 입적하신 서옹스님은 이렇게 '열반송'을 읊었다.

雲門日永無人至 (운문일영무인지) 운문에 해는 긴데 이르는 사람 없고
猶有殘春半落花 (유여잔춘반락화) 아직 남은 봄에 꽃은 반쯤 떨어졌네.
一飛白鶴天年寂(일비백락천년적) 한 번 백학이 날으니 천년동안 고요하고
細細松風送紫霞 (세세송풍송자하) 솔솔 부는 솔바람 붉은노을을 보내네

- 서옹선사 1주기 추모 문집 <참사람의 향기> 22쪽

자신이 가고 난 뒤의 일을 염려했음일까. "운문에 해는 긴데 이르는 사람 없다"고 스님은 탄식하신다. 건성으로 들락거리는 선객들은 많다만 정작 확철대오한 스님은 많지 않구나. 잠시 법당 앞에 서서 백양사 쪽을 바라보노라니 어디선가 스님의 탄식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난 스님과는 좀 다르게 '세상사는 복잡미묘해서 전무(前無)를 한탄할 수는 있지만 섣불리 후무(後無)까지 앞질러 절망할 필요는 없다'라고 애써 낙관을 품는다.

운문암 계단을 내려간다. 작은 단풍나무 곁을 스쳐 지난다. 아기 손톱처럼 앙증맞은 이파리들이 가만히 흔들린다. 어린 단풍나무여. 이따 저녁에 산들바람 찾아오거든 소리소문없이 나 여기 다녀갔다 전해다오.

/ 글 - 오마이뉴스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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