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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고령 연조리 주산 대가야왕릉

by 구석구석 2022.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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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번국도 

찬란한 철기 문화를 꽃피웠던 시절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후손들에게 알리지 못한 이유로 대가야의 문물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령 또한 관광지로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 왕릉 전시관, 선사시대의 암각화, 그리고 양질의 고령토로 빚어낸 빛깔 고운 도자기 등도 만날 수 있는 고령. 고령은 점령당한 국가의 슬픈 애환을 간직한 채 곳곳에 보석과 같은 관광유적지를 품고 있다. 

고령에 가 보면 번성한 대가야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고령읍과 성산면의 경계로 대가야와 신라군의 격전지이기도 했던 금산고개를 넘어서면 고령읍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과 남쪽은 험준한 산줄기가 에워쌌고 동쪽은 낙동강이 가로막은 천연의 요새. 그곳에 대가야의 궁궐터가 있다. 이외에도 1천4백년 전에 멸망한 고대 왕조의 유물과 유적이 곳곳에 널려있다. 

삼림욕장내 소나무숲길. 대가야의 유적탐방과 문화산책은 주산 등산로 입구인 대가야유물전시관에서 시작된다. 아담한 전시관에는 사적 79호인 지산동 고분군의 44· 45호분과 32~35호분 등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은 장신구류· 가야토기 등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최신식 돔의 형식을 빌어 지어져 있는 대가야 왕릉 전시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인 고령 지산동 44호 고분을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한 것이다. 터치스크린 등의 최첨단 현대 시설과 어우러진 발굴 당시 그대로의 순장석곽과 철기, 도자기 등의 출토 유물들은 죽은 후에도 내세 세계를 믿었던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막강했던 권력을 짐작케 한다.

왕릉모형

관람료가 없고 담당 공무원의 설명을 들을수 있어, 가야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특히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대가야유물전시관 주변은 대가야 국성지로 옛 대가야의 왕궁터로 알려지고 있다. 이 일대에 가야공원과 대가야국성지비· 대가야국악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가야 역사관을 관람한 후에는 널찍한 산길을 따라 삼림욕장과 주산정상을 거쳐 지산동 고분군을 둘러보고 되돌아 오는 코스를 권하고 싶다. 특히 길이 1시간~1시간 30분 정도 길이의 등산로는 가족들과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며 걷기에 좋은 곳이다. 꿀밤나무와 해송숲이 이어지는 주산 삼림욕장에는 중간중간 휴식공간과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녹음이 짙은 숲길을 따라 산새소리가 해맑다. 고령의 진산인 주산정상(3백11m)에 오르면 북서쪽으로 가야산과 미숭산이 멀찌감치서 절묘한 자태를 드러낸다.

동쪽 산아래로는 고령읍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능선을 넘나드는 한줄기 바람에 가슴까지 시원하다. 여기서 전망대를 거쳐 미숭산 자락에 있는 고찰 반용사까지 등산로가 마련되어 있으나 가족들과 걷기에는 다소 먼거리.

 주산정상에서 고분군으로 내려오는 길 옆에는 명상의 숲을 꾸며 놓았다. 나무벤치 앞마다 주옥같은 명시를 기록해 나그네를 잠시 쉬어가게 이끈다.  대가야 시대에 축조된 지산동고분군은 주산의 남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서 낙타등 처럼 이어진다. 언뜻 보면 거대한 봉분들만 눈에 띄지만 능선 아래로 크고 작은 무덤들이 마치 잊혀진 역사처럼 풀숲에 수도없이 묻혀있다. 줄잡아 2백여기. 주산 전체가 고분으로 뒤덮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하다.

높이 6m· 지름 25~27m 규모인 제51호 고분을 비롯, 32호 고분까지 규모가 큰 고분이 이어 지는데, 특히 지난 78년 발굴· 조사 결과 우리나라에서 첫 확인된 순장묘로 밝혀진 제44호 고분이 눈길을 끈다. 

/ 자료-매일신문

 

왕릉 능선에 어린 '미완의 제국' 가야

가야 사람들은 언제나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며 무덤을 조성했다. 김해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함안 아라가야의 말이산 고분군, 창녕 비사벌가야의 교동 고분군, 그 중에서도 여기 고령 대가야의 지산동 고분군이 가장 장대한 것이다. 고령의 뒷산인 이 주산(主山)의 산상에는 2백여개의 고분이 들어차 있고 현재 봉분을 복원해 놓은 것만도 70여기가 된다.

지산동 고분군은 길가에 있는 대가야왕릉 전시관에서 오르게 되어 있다. 이 전시관에는 제44호분의 내부구조를 실물대로 재현해 놓고 있다. 44호분은 거대한 순장묘로 주실(主室) 외에 모두 32개의 소형 순장무덤이 딸려 있다. 여기서 수습된 22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순장자는 40대 남자부터 10대 소녀까지 다양했다. 이 순장묘는 피장자의 권세가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는 물증으로 곧잘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가야가 왜 일찍 멸망했는가를 여기서 읽어본다.

무려 32명의 생사람을 죽여 순장한 이 잔인한 무덤은 죽음과 실존의 문제를 높은 종교적 차원에서 풀어갈 정신문화가 없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고대국가에서 종교란 신앙의 한 형태이자 동시에 국가 통치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던 것인데 가야는 이렇게 샤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이제 솔나무.참나무가 얼크러진 산비탈 돌계단을 밟으며 지산동 고분군으로 오르면 잡목이 모두 제거돼 하늘이 넓게 열린 산자락에 둥그런 고분들이 줄지어 오르는 장관이 펼쳐진다. 일없이 고분의 일련번호를 점호하듯 헤아리며 오르다가 순장묘 44호분에 다다르면 높이 6m, 지름 27m가 넘는 그 규모의 거대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전시관 안내책자에 소개된 순장묘그림

여기서 비탈길 한단을 더 오르면 지산동 고분군 중 가장 큰 47호분이 나오고 연이어 48호.49호.50호.51호 4개의 거대한 고분이 어깨선을 이어가며 산상으로 오를 듯한 기세로 뻗어 있다. 처음 아랫자락을 오를 때만 해도 겹쳐진 두개의 봉긋한 고분을 보면서 대지의 젖가슴 같다며 귀여운 감성을 발하던 사람도 48호에서 51호까지 장대하게 펼쳐지는 '왕릉의 능선' 앞에서는 가벼운 감상을 누그러뜨리고 망연히 바라본다.

왕릉의 능선 오른쪽으로는 고령읍내가 한눈에 다가오고 왼쪽으로는 야로면의 산세가 겹겹이 펼쳐지니 그 산.들과 고분이 어우러지는 모습이란 어떤 조경이 이처럼 장대할 것이며 어떤 환경미술이 이렇게 감동적이랴 싶어진다. 왕릉의 능선에 서면 가야는 정녕 위대해 보인다.

그러나 가야는 불행히도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는 단계에서 멸망했다. 그래서 가야사를 세권의 책으로 펴낸 김태식 교수는 '미완의 문명 700년 가야사'(푸른역사)라 했다. 게다가 가야는 자기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에 관한 지식들은 모두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삼국에 딸린 조연으로 기록된 것이거나 중국에서 이민족의 풍속지로 쓴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것, 그리고 의문투성이인 '일본서기'의 단편적인 기사뿐이다. 그래서 가야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타국과의 관계사 속에서만 논의될 뿐 가야 그 자체의 역사와 문화로 말해지는 것이 없다. 가야는 미지의 왕국인 것이다.

그러나 가야는 사자(死者)를 위한 죽음의 유물로 말하고 있다. 왕릉의 능선을 비롯한 가야의 고분과 고분에서 출토된 무수한 부장품들은 만만치 않던 가야의 문명을 내보이고 있다. 고령지역에서만 모두 세개의 금동관이 출토됐고, 수많은 금귀고리.금팔찌.금반지 등이 발굴됐다. 철의 왕국답게 철제 갑옷.마구(馬具).농기구들이 원상의 모습으로 부장되기도 했다.

그런 중 가야의 저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가야 토기들이다. 가야 토기는 신라 토기와는 완연히 다른 독자적인 미감을 갖고 있다. 목 긴 항아리.굽다리접시. 그릇받침.잔, 그리고 각종 상형토기들은 어떤 면에서 가야가 신라보다 기법적으로 우수하고 조형적으로 세련됐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가야 토기 중 내가 특히 사랑하는 것은 토기잔이다. 사슴뿔잔.방울잔.오리잔 같은 상형잔은 물론이고 평범한 일상의 잔들이 한결같이 현대적 멋까지 풍기고 있다. 그래서 가야 토기잔들은 머그잔.와인잔.조끼잔.크라운컵 같은 별명도 갖고 있다. 몇 해 전 제주도 오설록에서 열린 태평양박물관의 '한국의 토기잔' 특별전을 보면서 나는 가야 토기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런 가야였건만 가야는 끝내 문명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역사 속에 묻어버리고 만 것이다. 삼국은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제각기 다른 고전적 기풍을 낳았다. 고구려는 강인함, 백제는 우아함, 신라는 화려함에 기초했다. 그렇다면 가야가 지향한 미적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전아(典雅)함이 아니었을까. 그런 미련 때문에 왕릉의 능선에선 그립고도 아쉬운 마음이 솟구쳐 일어난다.

들국화와 억새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가을날이건 고분마다 잔설을 뽀얗게 머리에 이고 있는 겨울날이건 지산동 고분군에 오르면 '미완의 문명' 가야는 언제나 '그리움의 왕국'이 되고 그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나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 자료 - 중앙일보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

 

대가야 체험축제

'대가야의 대항해'(The Great Voyage of Daegaya)란 주제로 열리는 2009년 축제에는 1천500년 전 대가야가 뱃길을 이용, 일본과 중국 등과 활발히 국제교역을 펼쳤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40여개의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가야시대 국제교류 실상을 보여주는 '바닷길을 따라 떠나는 대가야 항해의 비밀' 주제관을 비롯해 항해구역에서는 당시 일본과 중국 등과 교역할 때 이용했던 목선과 돛을 직접 만들어 물 위에 띄워 노를 저어 보는 항해 체험을 할 수 있다.
 
또 지역에서 출토된 야광조개국자와 연화문도 제작해 볼 수 있으며 당시 봉수대 깃발을 소재로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깃발도 만들어 보는 코너도 마련돼 있다. 특히 해적의 습격 등 낙동강 줄기를 따라 벌어지는 대항해 시대 역사를 재현한 '대가야 항해의 미스터리' 역사 재현극과 유물 관련 퍼포먼스는 관람객들의 눈을 사로잡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1970년대 후반 고분 발굴 이후 3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대가야왕릉 발굴 현장을 방문객이 직접 돌아보며 생생히 관람할 수 있다. 행사장 남쪽 기슭에는 토기, 철기, 가야금 등 고대문화와 입체영상을 통한 첨단문화 등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테마공원인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가 축제에 맞춰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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