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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서울 신림동 규장각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by 구석구석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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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규장각 02 880 5316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9,567㎡) 

1) 국보 7종 7,078책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삼국유사 등
2) 보물 8종 28점 - 곤여전도 목판, 목우자수심결, 벽역신방 등
3) 역대 국왕 친필, 현판, 고지도 등  

 

유네스코기록유산 - 승정원일기

국보제303호 1999년 4월 9일지정 서울대규장각소재,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유산등재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 기록인 동시에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이며, 또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려 가치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호(1999.4.9)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1623)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왕명을 담당하던 기관인 승정원에서 처리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취급하였던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매일 기록한 것으로 수량은 총 3,243책 393,578장에 이르며, 종이질은 닥나무종이이다.

현존본은 승정원일기(1623∼1894)와 승선원일기·궁내부일기·(전)비서감일기·비서원일기·(후)비서감일기·규장각일기(1894∼1910)로 구성되어 있다.내용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실의 기록으로 계품(啓稟), 전지(傳旨), 청패(請牌), 청추(請推), 정사(呈辭), 상소(上疏), 선유(宣諭), 전교(傳敎) 등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기재 방식을 보면 한 달을 기준으로 책머리에 월간 경연상황, 내전(內殿)의 동향을 기록하고 다음으로 승정원의 관리 및 당직자의 표시와 출근실태를 표시하고 마지막에 승정원의 업무현황, 왕 및 내전의 문안, 승정원의 인사관계(人事關係) 등의 내용을 실었다.

이 책에 관여한 사람들은 정3품 승지 6명, 정7품 주서 2명이며,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병조, 우승지는 호조, 좌부승지는 예조, 우부승지는 공조, 동부승지는 형조의 공사를 나누어 담당하였다. 주서가 기록을 담당했고, 그가 자리를 비우면 가주서가 대신 그 일을 맡았다. 전쟁기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전쟁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사변가주서가 담당했다.

이 책은 생산기관의 명칭과, 책명을 변경해가며 1623년 3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280여년간 그 작업이 계속되었다. 역사를 연도에 따라 서술하는 편년체로서 날짜순으로 배열하였고, 월별로 책을 만들었는데 분량에 따라 한 달에 2책으로도 만들었다.

조선 전기의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리고 말았다. 또 1592년 임진왜란 이후 1623년까지의 일기도 이괄의 난 때 거의 불에 타버렸다. 인조 때 1592년 이후의 일기를 보수하였으나, 영조 20년(1744) 승정원에 불이 나면서 모두 타버렸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일기 역시 보수한 부분이 상당히 많으나 보수에 최선을 다하여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국가의 중대사에서부터 의례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국정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정원의 전모가 기록되어 있을 만큼 방대하여,『조선왕조실록』편찬을 위한 첫 번째 사료로서 그 가치가 대단히 높게 평가되는 기록물이다.사료적 가치는 중국의 「중국 25사」(3,386책, 약 4,000만자) 및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888책, 5,400만자)보다 더 방대한 세계 최대의 연대 기록물(총 3,243책, 글자수 2억4천250만자)이며, 「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라면「승정원 일기」는 당시의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등에 대한 생생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조선시대 1차 사료인 것이다. 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의 일기 내용은 일제에 의한 내정 간섭기 궁중기록이므로 조선왕(황제)의 결제를 요하는 사건과 기타 궁중의 비화를 기록한 것이므로 근대사 연구의 1차 기본 사료가 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승정원일기」 원본은 보존을 위하여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영인본 승정원일기」(국사편찬위원회 1961∼1977 간행)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철종2년(1851)부터 순종융희4년(1910)까지의 일기 필사본은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향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영인본 전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으로 일부 제공하고있다.

/ 자료 - 문화재청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1973년 12월 31일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413년(태종13)에 태조실록이 처음 편찬되고, 25대 철종실록은 1865년(고종 2)에 완성되었다. 《실록》의 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루어지는데, 춘추관 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에서 담당하였다.

실록청의 총재관은 재상이 맡았으며, 대재학 등 문필이 뛰어난 인물이 도청 및 각방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시정기와 사관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 각사 등록, 승정원일기가 실록편찬의 기본자료였고, 문집 일기 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 비변사등록과 일성록도 사용되었다.

실록편찬 과정은 초초(初草)·중초(中草)·정초(正草)의 3단계로 나누어졌다. 초초는 각방의 당상과 낭청(郎廳)이 자료를 분류하고 중요자료를 뽑아 작성한 초안이다. 중초는 도청에서 그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이고, 정초는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초를 교열하고 최종적으로 수정·첨삭을 하여 완성한 것이다.

정초본을 인쇄하여 사고에 봉안하고 편찬에 이용된 시정기·사초 및 초·중·정초는 모두 세초(洗草:없애는 것)하였는데, 이는 앞으로 필화를 막자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실록청의 기사관이 편찬 작업 중 알게 된 사실을 누설하여 처벌받은 일도 있었고,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명기하도록 하여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었으나, 대체로 편찬과정의 공정성과 익명성은 보장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사고에 수장시킨 《실록》은 충해와 습기에 의한 오손을 막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포쇄하도록 하였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형지안(形止案)을 작성하였다. 실록은 선왕 및 신하들의 행적과 정책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제례나 사신 접대 등 주요 행사가 있을 때 전례를 참고하기 위해 사관이 내용 일부를 확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열람도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 등 4곳에 사고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으며, 1603년(선조 36)에서 1606년까지 전주 사고본 실록을 근거로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을 다시 4부씩 인쇄하였다.

춘추관,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강화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춘추관실록은 이괄의 난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마니산 사고의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의 피해를 입어 현종때 보수하여 1678년(숙종 4)에 가까운 정족산 사고로 옮겨졌으며 묘향산 사고본은 1633년에 전라도 적상산 사고로 옮겼다.

이후 각 사고의 모든 《실록》은 조선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들어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을 조선총독부로 이관하였다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으로 이장ㅎ하였고,적상산 사고본은 장서각으로 옮겼으며, 오대산 고고본은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는데 1923년의 간토대지진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장서각 소장의 적상산본은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백산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었고, 정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1929~193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1/4축쇄판(縮刷版) 888책 한장본(漢裝本)으로 30절(折)을 영인(影印) 출간하였으며, 1958년에는 역시 태백산본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8축쇄판(A4판) 48책 양장본으로 간행, 보급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에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완료하였으며, 남한에서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2년부터 분담하여 국역작업을 시작하여 1994년 4월에 마무리지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실 중심의 서술방식과 명분론적 시각, 당론(黨論)에 의한 곡필(曲筆)의 문제 등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임은 물론,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다.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문화적 가치

첫째, 조선왕조실록은 25대 군주의 실록이며,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이기에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실록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대청역조실록(大淸歷朝實錄)도 296년간에 걸친 실록에 불과하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세계적인 역사서이다. 일본의 삼대실록(三代實錄)은 빈약한 것이고, 남원조(南院朝)의 대남실록(大南實錄)은 548권으로 편성되었다. 중국의 황명실록(皇明實錄)은 2,964권으로 된 대질이나 권수만 많을 뿐이지 기록내용은 소략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총 6,400만 자인데 대해 황명실록은 총 1,600만자에 불과하다.

셋째로, 조선왕조실록은 내용이 다양하여 가히 백과전서적 실록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예, 종교 생활로부터 천문, 지리, 음악, 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나 천문현상과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종합사서요,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담겨져 있는 민족문화서인 것이다.

넷째,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편술까지 담당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記述)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던 전문관료였다. 사관의 기록은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비밀이 보장되는 제도가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보장하였다.

다섯째로, 활자로 인쇄 간행된 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인 것이다.

조선은 세계적으로 금속활자를 가장 앞서 실용한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활자개량에 힘쓰고, 각종 도서를 간행해 온 전통이 있었다.

여섯째, 조선말기까지 이들 실록이 완전하게 보존되어온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보기 힘든 일이다.

선왕의 실록편찬사업이 끝나면 최종원고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각지 깊은 산중에 소재하던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왔다.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 자료 - 네이버 백과사전 / 문화재 지식정보 센터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조선 왕조가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국보 제151호입니다.

전쟁이나 화재 등으로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실록의 사고는 궁궐의 춘추관 외에 충주시, 성주군, 전주시에 설치된 4곳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습기와 해충 방지를 위해 실록을 약제와 함께 기름종이와 붉은 보자기로 감싸고, 실록을 담은 상자를 다시 기름종이와 붉은 보자기로 봉인하는 것도 모자라 3년마다 한 번씩 햇볕을 쬐어주는 포쇄 작업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왕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져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마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1404년) 2월 8일 왕이 사냥하던 중 낙마한 것이 부끄러워 기록하는 사관이 모르게 하라고 지시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그 말까지 기록에 남겨두고 있습니다.

오직 사실과 진실을 오롯하게 기록했는데 임진왜란으로 조선 땅이 쑥대밭이 되었을 때는 성주사고, 충주사고, 한양 춘추관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소실되었습니다. 마지막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도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유생인 안의와 손홍록이 사재를 털어 사고의 책들을 전부 내장산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이듬해 관청에 넘겨줄 때까지 번갈아서 지켰는데 우리의 조선왕조 초기 역사를 지켜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첫 문장은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7일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순종실록 4권, 순종 3년 8월 29일 일본국 황제에게 한국 통치권을 양도하다.

고종, 순종실록도 존재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편찬되어 객관성이 떨어져 역사 사료로서 가치를 상실하여 국보 지정에서도 빠졌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빠졌습니다. 다만, 일반 백성들이나 민족 운동가들이 남긴 기록물과의 내용 대조를 통해 일본 제국이 한국의 역사를 어떠한 방식으로 왜곡하려 했는가를 연구할 때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 자료 - 따뜻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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