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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서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창경궁

by 구석구석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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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문화유산 서울 창덕궁

 

      

이련지의 단풍

 

돈화문 매표소 은행나무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비원

대조전 뒤편 화계에는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쌓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몸체는 회흑색의 벽돌로 쌓고 윗줄은 붉은색 벽돌로 쌓아 몸체와 구분짓고 있다. 몸체 상단에는 붉은 색 벽돌로 한 줄을 쌓아 경계를 삼아 변화를 주었다.

대조전 화계의 굴뚝과 홍매화

 

굴뚝을 만들더라도 그 기능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아무렇게나 쌓지 않았다. 화계를 장식하는 하나의 조형물로 간주하여 담과 화계와 조화를 이루도록 공을 들였다. 굴뚝의 붉은 색조와 맞추기라도 한 듯 그 옆에는 분홍색의 홍매화를 심어 놓았다. 매화는 예로부터 기품있는 선비의 고고한 기개를 나타낸다. 곧게 서 있는 굴뚝과 처마부분의 붉은 색깔과 잘 어울린다.

낙선재 앞뜰에는 갖가지 나무가 있다. 매화와 살구꽃은 거의 지고 앵두나무는 꽃잎의 반은 땅에 흘리고 반은 가지에 달고 있다. 한겨울 낙선재의 제일경은 장락문에 기대어 승화루 꽃담과 함께 상량정을 보는 것이라면, 꽃이 피는 철에는 낙선재 앞마당에서 꽃과 함께 낙선재의 지붕선을 쳐다보는 것이다. 지금은 꽃 중에 철쭉이 제일이어서 철쭉몽우리와 사모지붕, 팔작지붕, 맞배지붕 등 여러 지붕이 어우러져 멋있다.

철쭉이  핀 낙선재

 

홍매화가 있는 일각문

담을 째고 후원이나 사랑채로 통하는 조그마한 문을 내는데 이 문을 일각문이라 한다. 삼삼와와 칠분서 옆 담장엔 일각문이 나있고 그 옆엔 홍매화가 심어져 있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1847년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으로 '오래도록 즐거움이 있다'는 뜻

 

단청이 없어 조금은 초라하고 옹색해 보인다.

중희당의 서문이었던 자시문 앞, 'ㄱ'자로 꺾인 담 밑에 늙은 매화나무가 있다. 담이 직각으로 꺾인 공간에 화단을 만들어 거기에 심어 놓았는데 담은 직선 무늬로 화려하지 않고 정갈하여 노매와 잘 어울린다.
이 매화나무는 선조 때 명나라에서 보내 온 것이라 전해지고 있어 나이는 400년으로 추정된다.

겨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연경당 앞마당의 목련이 봄이 되니 진한 향기를 내뿜으며 자태를 뽐내고 있다. 목련은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쪽을 향해 핀 목련은 임금에 대한 충절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연경당을 향해 늘어진 목련의 자태는 연경당 주인의 인품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고아(高雅)하다.

고아(高雅), 목련과 연경당/오마이뉴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쓰게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금천교를 건너면 인정문을 지나면 인정전이다.  위엄과 절제, 세련의 모습. 우아한 정전 ‘인정전’이다. 은은한 조화와 깊이 있는 격조의 한국적 미를 무겁지 않지만, 가볍지 않은 자태로 표정 짓고 있다. 널찍하고 네모 반뜻하게 다듬어져 인정전의 앞마당을 깔아 덮고 있는 까칠한 표면의 박석들, 그리고 그 위에 벼슬의 위계와 관직서열을 의미하는 품계석의 질서 있는 도열을 보니 마치 시대를 거슬러 조선시대의 한 중앙에, 그것도 조정의 신하들과 궁인들이 줄지어선 곳에서 임금이 주재하는 조회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고 서 있는 듯하다. 그 엄숙함과 순간의 긴장감이 으스스하지만 신비롭게 잠시 지나쳐 가 생경스럽다.

인정전전경

  당초문으로 조각된 계단으로 오르는 곳 중앙에는 임금님만 밟고 오를 수 있다는 ‘답도’가 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흐릿하게 무뎌진 봉황을 돋을새김 한 네모진 석조물은 지나간 시절 임금님의 자취를 회상하게 만들고 있다. 2층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인정전의 날렵한 네 귀 추녀마루의 솟아 오를듯한 비상의 날갯짓은 그야말로 감탄, 감탄스러울 뿐이다.

추녀마루에 서있는 듯, 앉아있는 듯 나래비 서서 각각 사방으로 시선을 나누어 잡귀의 범접을 불허하고, 화마, 수마, 병마 등을 막아내고 있는 ‘잡상’들은 어찌 보면 귀엽고(?) 기특한 모습이다(그 상징적 의미는 별도로 하고). 이것이 아마도 지나친 엄숙함과 절제된 근엄함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정전의 장중한 권위를 조금은 친근하고 발랄한(?) 느낌으로 조화시켜주는 장식용 소품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부용정과 더불어 연꽃과 관련이 있는 정자가 애련정이다. 부용이 연꽃의 한자어라면 애련은 '연꽃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중국 송대의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따온 것이다.

부용정이 마치 막 피려는 연꽃 같다면 몸집에 비해 지붕이 커서 지붕이 유난히 돋보이는 애련정은 활짝 핀 연꽃 같다. 이래서 애련정이 가냘프게 보이고 사랑스런 지 모르겠다. 연꽃을 사랑한다는 애련과 달리 가엽고 사랑스런 의미의 애련(哀憐)과 같아 가냘픈 가지에 곱고 아리따운 꽃을 피운 능수벚꽃과 잘 어울린다.

애련지와 애련정으로 숙종18년(1692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로 숙종은 '애련정기'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은 이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히고있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되어있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관람정

  

 

지하수로 만든 옥류천 특별관람코스에 있는 사람의 손을 안탄 이끼 뒤쪽에 보이는 것이 존덕정이고 연못가에 있는 것은 관람정으로 평면부채골모양

물소리가 너무도 좋은 옥류천과  100자 옥류폭포, 비록 낮고 작은 폭포지만 거대한 폭포로 느낄수 있는 여유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존덕정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천교단풍
금천교 돌거북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에 이르니 새빨간 단풍나무와 노란 단풍나무 두 그루가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진선문을 가리고 있다. 금천교는 돌다리 아래 비단 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물은 흐르지 않고 대신 비단보다 더 고운 단풍들이 금천교를 장식하고 있다.

진선문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지붕인 선정전의 짙푸른 청기와가 단풍과 어울려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편전에서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아 가을 단풍을 바라보며 국사를 논의하던 임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선정전

선정전의 남쪽을 보니 저 만치에 자그마한 규모로 자리 잡은 ‘어차고’가 눈에 들어온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건물 내부에는 일제 강점기에 임금이 타고 다니던 가마, 마차, 자동차 따위가 어느 고수집상의 보관창고처럼 보이는 쇼윈도(?)안에서 옹색한 행색을 하고 앉아있다. 영국제 다임러, 미제 캐딜락 자동차 그리고 주정소와 키가 높은 가마들….

고위 관원들이 궁궐에 들어왔을 때 사용하던 공간으로 격이 높았던 ‘빈청’을 전시장 같은 어차고(임금님의 차고)로 만든 일제시기의 간교한 잔재를 생각해 본다. 조선 궁궐과 정치문화를 능멸하고 부정하려는 치밀한 계산이 깔린 그 곳을 아직도 ‘어차고’라고 설명하고 있다니. 안내판에는 여전히 일제시대가 연장되고 있는 것인가?

'선평문' 열린 사이로 중전의 침전인 '대조전'의 편액과 용마루 없는 지붕이 보인다.

희정당’의 안쪽으로 접어들어 그 내부를 살펴보니 부옇게 먼지가 앉고 색이 바랜 응접용 가구가 중앙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역시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전등과 샹들리에 그리고 썰렁함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1920년경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다가 그 자재를 써서 복원하여 지었다 하는데, 응접용 의자에 앉아 한 숨 짓고 있는 구한말 임금의 무력한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희정당 북쪽의 가파른 계단위에 있는 ‘선평문’을 들어서니 왕비의 침소이자 공식적인 활동 공간인 ‘대조전’이다. 그런데, 희정당과 대조전 사이의 공간이 너무나 협소하고 좁아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평지붕이다. 용마루가 없는 이유는 용이 임금을 상징하므로 임금(용)과 용마루가 같이 있음은 두 마리의 용이 다투게 되는 의미가 있어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 한다.

대조전의 서쪽으로 돌아 나오다 보니 내부의 벽면을 타일로 마감한 건물이 나오는데, 이 곳이 바로 대장금의 추억이 아직도 진한 ‘수라간’이다. 아궁이에서 올라오는 불의 그을음을 닦아내기 위한 위생적인 고려와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타일벽면을 택한 모양이다. 똑똑하고 야무지며 예쁘게 생긴 ‘생각시’ 장금이가 잠시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부용정과 부용지의 용머리상으로 조선 궁궐의 연못은 천원지방사상에 의해 조성되었고 부용지도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 속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만들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태극정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주합루

부용지 건너편에는 정조 즉위(1776)에 지어진 주합루(宙合樓)가 단풍에 휩싸인 채 고즈넉이 어수문(魚水門) 위로 자리잡고 있다. 어수문은 임금을 물水에, 신하들을 물고기魚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해서 담고 있다고 한다. 반듯하게 새겨진 '宙合樓'란 편액은 정조가 친필로 새긴 것인데, 그 건물 1층은 국내외 도서를 소장한 왕립도서관 격인 규장각(奎章閣)이었다고 하고 2층은 열람실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젊은 인재들과 함께 글을 읽고 정리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산실을 만들고자 했다. 정조는 이곳 규장각을 도서실에서 연구소로, 연구소에서 왕의 비서실과 정책개발실로 확장하여 부친인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능멸하고 권력투쟁만을 일삼는 무리 배들을 제거하여 나라의 발전을 바로잡는 개혁의 불길을 당기고자 했다.

정조는 이곳에서 정약용, 이승훈 같은 깬 사고를 가진 젊은 미래학자들을 불러 모아 인재를 키우며 썩어빠진 정치의 늪을 새로운 연못으로 바꾸는 개혁의 불을 당기고자 했다.

어수문 겨울풍경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옥류동 오솔길 / 오마이뉴스
옥류천 단풍 / 오마이뉴스

점점 더 은밀해지는 비밀의 정원, 관람지에 배를 띄우고...

 옥류천으로 가기 위해 애련지를 벗어나 몇 걸음을 숲 속을 향해 걸어가니 노란 배추 속 같은 단풍이 선연하게 나타난다. 옥류천으로 가는 관람지(觀纜池) 부근에는 점점 더 은밀한 비밀의 정원 분위기가 극에 달한 듯한 느낌표가 그려진다.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는 관람정(觀纜亭) 위에는 붉은 단풍나무 가지가 물결에 출렁거리듯 드리워져 있다. 관람지는 연못에 닻줄 즉 배를 띄워 구경을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참으로 옛 조상들의 상상력이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람정 위에 육각으로 되어 있는 존덕정(尊德亭)이라는 잘 생긴 겹 지붕 정자 하나가 보인다. 존덕정의 기와지붕 골 사이에는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여 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천정에는 청룡과 황룡이 어우러져 있는데, 그 아래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란 정조의 글씨가 새겨 있습니다. '수많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임금'이 되고자 했던 정조. 그는 개울(백성)을 골고루 비추는 달이 되고자 했으나, 시대의 아픔을 안은 채 지금은 그 시대의  임금도 백성도 낙엽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다.

존덕정을 지나 다소 가파른 비탈길에 올라서니 언덕의 정점에 규성이 모였다는 취규정(聚奎亭)이란 정자가 서 있는데, 그곳에도 여지없이 단풍이 불타고 있다.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와 숨을 고르기에 딱 좋은 장소다. 별로 채색을 하지 않는 단아한 정자가 오히려 주변의 단풍과 어울려 자연미를 더해주고 있다.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청의정

취규정 큰길에서 북쪽으로 좁은 오솔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이 바로 후원의 가장 깊숙한 곳, 옥류천(玉流川)으로 가는 길이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모두가 시인이 된 듯한 착각마저 느끼게 하는 오롯한 오솔길이다.

 

사진찍기 좋은 곳
창덕궁의 최고 명소라면 단연 부용지다. 영화당 안에서 또는 부용정 옆에서 부용지를 배경삼으면 좋다. 또한 애련지에 걸린 애련정은 크기가 작고, 난간 양 사방이 액자같을 틀로 짜여져 있어,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마치 액자속에 든 모양의 인물사진을 만들 수 있다. 

관람시간
창덕궁은 다른 곳과 달리 개별적인 관람을 할 수 없다. 매 30분 마다 인원을 모아 안내원의 인솔하에 관람을 하게 된다. 관람코스도 금,토,일에는 주궁시설과 비원외에 낙선재를 볼 수 있고, 월,수,목에는 연경당이 관람코스에 포함된다

 

창경궁은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궁궐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창건됐는데,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었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다가 중건됐으며, 험난한 역사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숙종 때 장희빈과 그 일족이 처형됐으며, 영조 때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채 숨을 거두기도 했다. 또 1911년에는 일제가 궁내에 박물관을 설치하면서 순조 3년(1909)에 만들어진 동물원과 식물원을 포함해 창경원(昌慶苑)으로 이름을 바꿔 격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창경궁이란 원래의 이름을 되찾은 것은 1983년이다. 이때부터 3년에 걸쳐 일제가 파괴하거나 변형시킨 창경궁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는 공사가 진행됐다. 현존하는 궁궐 정전(正殿) 중 가장 오래된 국보 제226호인 명정전(明政殿)과 창경궁의 정문인 보물 제384호 홍화문(弘化門), 성종태실(成宗胎室) 등을 둘러볼 만하다.

매주 화요일 정기휴일이며, 겨울철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관람할 수 있다. 관람료는 어른 1천원, 청소년 500원.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 (02)762-4868 
 

자료유네스코 한국위원회 / 창덕궁 홈페이지와 '관람객솜씨자랑' / 여성동아 오마이뉴스2007  최오균, 2008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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