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서울 한강

서울 사직동 경희궁 경교장

by 구석구석 2022. 10. 27.
728x90

정조가 즉위한 비운의 궁 - 경희궁

 신문로2가 1번지/02-724-0274~6 /사적 제271호/매주 월요일, 1월 1일휴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하는 특별전인 중국국보전을 보러 가기 전에 근처에 유적지가 더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서울과는 너무나도 먼 곳에 살고 있어서 어쩌다 가끔 오는 게 전부인지라, 정작 서울의 유명한 유적지들은 거의 못 봤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근처에 괜찮은 유적지가 있다면 한번 둘러보고자 하였다. 알아보니 서울역사박물관 근처엔 경희궁과 경찰박물관이 있다고 하였다. 이 중 시간도 그다지 많지 않고 해서 경희궁을 가기로 하였다.

경희궁은 조선시대 광해군 때 지어진 궁궐이다. 처음에는 경덕궁이라고 불렀는데, 서쪽에 있는 궁궐이라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리고, 새문동 집터에 세워졌기에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그리고 야주개 대궐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 속에는 여러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단 3채의 건물뿐으로, 나머지의 정취는 찾기 힘들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 철거 또는 이전되기 시작하면서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1988년부터 복원하게 되었고, 지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경희궁은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가는 길목, 아니 바로 그 옆에 자리잡고 있다. 입구엔 흥화문(興化門)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어, 이곳이 경희궁임을 말해준다. 우진각지붕의 내림마루 쪽엔 잡상이 있어 왕실건물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잡상이라는 기와는 사용이 매우 제한되는데, 이는 주로 왕실에서 쓰는 건물에만 국한된다. 따라서 전주의 경기전이랄지, 수원의 화성행궁 등에도 잡상을 쓴 건물이 더러 보인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이다. 이 문은 광해군 8년인 1616년에 세워졌는데, 1915년에 도로를 내면서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고,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이 되는 안타까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광복 후 이 자리가 영빈관으로 바뀌면서 영빈관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신라호텔이 세워진 후에는 이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는데, 1988년 서울시에서 경희궁 복원사업을 실시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흥화문은 궁성의 동쪽에서 동향으로 배치되었다고 한다. 단층의 우진각지붕으로 다른 궁궐처럼 2층이 아니라 단층인 것은 이곳이 정식왕궁이 아닌 이궁(離宮)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 문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이신(李紳)이 쓴 것이라 전해진다.

경희궁의 흥화문에는 잡상이 7개가 올라 있다. 잡상은 사실 그 수에 따라서 의미가 있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건물에는 잡상 11개가 올라가고, 이게 9개, 7개 같이 줄어든다. 우리나라도 초기에는 이 원칙을 잘 지켰으나 후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잡상을 올렸다.

잡상(雜像)이란 기와는 재미있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그리고 저팔계와 사오정 등이 등장한다. 우선 제일 앞에는 대당사부라는 이름의 삼장법사가 있으며 그 뒤에는 손행자란 이름의 손오공이 있고, 그 뒤에 저팔계가 있다. 잡상이 3개가 쓰일 때는 이렇게 3명이 올라가 있으며, 그 이상으로 쓰일 땐 저팔계 뒤에 사화상이라고 하는 사오정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잡상이 끝나고 그 뒤에 있는 게 용두이다. 그런데 이 경희궁의 흥화문에서는 특이하게도 용두에 긴 뿔이 달려 있고, 금속으로 된 장식이 꽂혔다. 장식은 사람이 두 팔을 벌려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서 가운데에는 약간 넓고 긴 판이, 그리고 좌우엔 불꽃모양처럼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듯한 장식이 각각 5개씩 표현되어 있다. 이는 바로 마름쇠라고 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마름쇠는 옛날 전쟁에서 쓰였던 방어무기의 일종이었다.

일반적인 마름쇠는 일종의 터지지 않는 지뢰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밤송이처럼 밟으면 가시가 발에 들어와서 상처를 준다. 마름쇠는 삼각뿔의 꼭짓점 중간 부분에서 가지가 뻗어 있는 것과 같은데, 주사위처럼 굴러도 이 중에서 하나의 가지는 반드시 위를 보게 되어 있어, 밟을 시엔 깊은 상처를 주게 된다. 용두의 마름쇠는 이와는 다르나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잡상을 다른 말로 어처구니라고도 한다. 어처구니라는 말에 갸우뚱거리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어처구니가 없다란 표현은 바로 목수가 건물을 완공해 놓고, 정작 중요한 잡상을 올려놓지 않았다는 말에서 어처구니가 없다란 표현이 나왔다고도 한다. 혹은 맷돌의 나무손잡이나 농기구의 손잡이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의견도 있다.

잡상은 건축에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존재로서 주술적 의미가 나타나고 권위를 표시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잡상을 중시하였다. 잡상은 왕실에서만 쓰인다는 점을 상기하고 답사를 다니다 보면, 사찰에도 몇몇 잡상이 있는 것을 볼 때, 그게 왕실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이처럼 사소한 것을 약간이라도 더 알면 좀 더 넓은 눈을 가지고 볼 수 있게 된다.

흥화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공원과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는데, 이곳은 본디 서울중·고등학교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1946년에 세워진 서울중·고등학교는 본래의 경희궁터에 있었는데, 1980년에 서초구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흔적은 지금은 잘 찾아볼 수 없고, 작은 비석만이 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경희궁에서 처음에 들어설 때 약간 고개를 갸우뚱한 부분은 흥화문에서 들어서서 숭정문으로 가는 게 정확한 일직선이 아니란 점이다. 이는 아마 후대의 실수로 보이는데, 그래도 가급적 웬만하면 일직선으로 배치하여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이는 게 낫지 않을까? 공원의 길을 좀 더 넓히거나 약간 조정을 하면 될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첫인상에 약간의 영향을 끼치는 것은 고건축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다.

너무 일찍 갔기 때문인가? 경희궁의 문은 아직 열려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경희궁에서 뒤돌아서서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가려다가 잠시 경희궁 오른쪽으로 갔다.

그쪽에서도 문은 잠겨 있었다. 경희궁 오른쪽 담장 쪽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기와나 백자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선시대의 기와들로 보이는 것들을 몇 개 주워서 들어보니 다른 시대의 기와보다 훨씬 무게가 느껴졌다. 위의 사진은 거기에서 주운 수키와 조각으로서, 앞에 단이 져 있는 유단식 수키와에 해당한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발걸음을 돌려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갔다. 사실 그때 서울역사박물관도 문을 열지 않아서 중국국보전을 보려는 이들이 일렬로 긴 줄을 서 있던 상황이었다. 나와 내 친구는 외부 전시를 천천히 둘러보면서 개관하길 기다렸고, 얼마 후 곧 문을 열었다. 우선 상설전시부터 천천히 관람한 후, 중국국보전을 보고나서 다시 경희궁으로 갔다. 그때 친구는 약속이 있어 먼저 가고, 홀로 경희궁으로 걸어갔다.



나쁜 사람을 들이받는 전설의 동물 해치

다시 경희궁을 찾으니 문은 열려 있었다. 경희궁 안으로 들어서면서 계단을 보니 품격이 있었다. 해태로 보이는 상이 각 계단에 한 쌍이 있어, 계단을 크게 3개로 나뉘어서 걸어다니게 해 놓았다. 그리고 2번째 단에는 해태와 함께 가운데에 네모난 조각이 있다. 봉황 두 마리가 노닐면서 주위에 구름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모습이다.

숭정문을 들어서서 안으로 들어가니 2열로 된 작은 비석 사이로 길이 나 있고, 이게 숭정전으로 향한다. 작은 비석들은 신하들이 서던 자리로서 정 1품부터 정 9품까지의 표시가 되어 있었다.

경희궁은 전체적으로 경사면에 세워 축대가 계속 쌓여 있고, 그 위에 건물이 있는 등의 배치가 되고 있다. 이는 자연 지세를 이용하면서도 다듬은 것으로서 풍수지리에 입각한 배치라 생각된다. 사실 경희궁은 여러 면에서 풍수지리를 이용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 와서 바뀐 게 많다고 하고, 대표적으로 흥화문의 경우 현재 위치가 아닌 지금의 구세군회관 쪽에 있었다고 한다.

숭정문 앞의 계단보다 더 고풍스러운 계단은 숭정전의 계단이다. 이곳에는 가운데에 보면 계단에 봉황의 무늬를 새겨놓았다. 본디 가운데의 계단은 일반인이 올라갈 수 없는, 향교에서는 신위가 올라가고, 궁궐에서는 왕이 올라가는 격이 높은 계단이기에 좌우의 계단과는 차등을 둔 것으로 본다. 그리고 해치장식의 난간이 계단 끝에도 설치되어 있는데, 그 해치의 모습이 무섭기보다도 익살스럽다. 해치는 전설의 동물로서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나 정의를 저버리는 사람을 들이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불로부터 보호를 한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화마를 막고자 이 해치조각이 궁궐 곳곳에 있던 것이다.

숭정전(崇政殿)은 경희궁의 정전으로서 광해군 10년인 1681년 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숭정전은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연회, 사신접대 등 국가적인 공식 의례를 행하던 장소로서, 경희전에서는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다.

경종, 정조, 헌종은 바로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이곳에 있던 승정전의 건물을 1926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다고 한다. 원래의 숭정전은 법당 건물로 개조되어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결국 현재의 숭정전은 과거부터 계속 있었던 것이 아닌, 오늘날에 들어서 발굴과 문헌조사 등을 통하여 복원된 건물이다.

숭정전 속에는 옥좌가 있다. 옥좌란 왕이 앉는 자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뒤에는 오봉산일월도라는 그림이 있다. 천천히 옥좌를 보고 있는데, 3명의 꼬마애들과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꼬마애들은 사극에서 옥좌를 많이 본 모양인지, 저것을 보고 올라가려고 하였다. 아주머니가 이들을 제제하려고 해도 한 녀석이 옥좌에 쪼르르 올라가서 앉아 다른 애들도 올라가서 앉았다.

처음엔 아주머니도 말리셨으나, 이내 잠깐만 거기에 앉게 하곤 사진을 찍었다. 사실 이때 기자는 고민을 많이 했었다. 저들을 말려야 하나, 아님 그냥 둬야 하나…. 문화재 자체는 보존해야 할 것이지만, 그런다고 너무 제지하는 것도 좋지는 않다. 적당히 풀어주고, 직접 조상의 모습을 떠오르며 그 숨결을 느낌다면 그게 더 나은 게 아닐까? 기자는 그런 생각에 그냥 웃으며 숭정전을 떠났다.



현판은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의 글씨

숭정전에서 자정전으로 갈 때는 일부러 회랑을 따라 걸어보았다. 회랑 끝에서 반대편 끝을 바라보니 나무기둥이 줄을 이어 길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 참 편안하면서도 질서정연하였다. 별거 아닌 회랑일는지는 몰라도 이곳을 천천히 거닐다보면 그 당시 궁 내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이곳을 걸었을지 상상해 본다.

숭정전 뒤에는 자정전이 있다. 자정전(資政殿)은 경희궁의 편전(便殿)인데, 편전이란 국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의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곳을 의미한다. 본디 편전이었으나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 빈전(殯殿)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선왕들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나 위패가 임시로 보관되기도 하였다. 이 또한 숭정전과 마찬가지로 발굴을 통해서 복원한 것이다.

자정전은 숭정전보다 더 작은 규모의 건물이며 총 9칸짜리 건물이다. 숭정전은 꽃살문임에 비해 여기는 그냥 네모난 창으로 되어 약간 밋밋하였고, 그 때문에서인지 숭정문에 비해선 약간 격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다포에 팔작지붕으로 역시 내림마루 쪽에 잡상이 올라 있어 왕실의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자정전 주위에는 전돌이 깔려 있는데, 그 중 좌측의 전돌은 많이 깨지고 훼손이 되어 있다. 왜 그런가 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은 발굴 당시에 출토된 전돌들로서 그나마 상태가 좋은 것들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것이라 하였다. 단순한 전돌일진 몰라도 오랜 세월동안 그 풍파를 견뎌온 돌이기에 현대에 끼워 놓은 돌들과는 다른, 그러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경희궁과 함께 해 나갈 돌이라는 생각에 왠지 달라 보였다.

좌측의 문을 통하여 걸어나가면 암천(巖泉)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작은 후원이 꾸며져 있다. 암천에서는 물이 흘러나오는데, 흔히들 이곳을 서암(瑞巖)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소개되나, 서암은 사실 지금은 사라진 우측의 바위라고 한다. 아쉽게도 암천에 가보니 그 주위가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게 가슴이 아팠다. 이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보존이 필요하리라 본다.

암천의 앞에는 태령전(泰寧殿)이 있다. 이곳엔 영조의 어진이 있다고 하마 본래 특별한 용도가 있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만 자정전처럼 정사를 의논하거나 경연을 열기도 하였다고 한다. 영조의 어진이 이곳에 걸린 것은 재미있게도 영조가 재위하던 당시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 또한 발굴을 통해서 다시 만들었다고 하며,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 즉 한호의 글씨 중에서 골라서 이를 써서 만들었다고 한다.

경희궁은 광해군이 이곳에 왕기가 걸렸다는 말에 사실상 빼앗아서 세운 궁궐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조선시대 때 생각보다 널리 쓰이진 못하였다. 인조,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정도가 이용하였으며 다른 왕들은 그다지 많이 이용하진 않았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들어 이 궁궐에 대한 훼손이 심해져서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원형을 찾기는 어려웠다. 

지금도 완벽한 원형을 갖추었다고 하기가 힘든 게 사실이다. 비록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비해서는 훨씬 초라한 모습이라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서울에 사는 이들이라면 주말이나 휴일에 도심의 궁궐을 찾아 산책을 하고 그 속에서 옛 정취를 느끼는 것도 매우 좋다고 본다. 또한 그에 대한 간단한 역사를 알고 들어가서 그 궁궐 속의 비애를 생각해 본다면, 이 또한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 자료 - 오마이뉴스 송영대기자

(참고 - 맷돌의 손잡이는 어처구니나 어이가 아니라 '맷손'으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표준국어대사전 등에 정식으로 등재되어 있고 실제로도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 관 람 료 : 무료
▣ 관람시간 : 하절기(3월~10월) 09:00~18:00 / 동절기(11월~2월) 09:00~17:00
▣ 휴 일 : 매주 월요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주무대였던 경교장(국가 사적 465호)이 60여 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게 됐다.

서울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내에 있는 경교장은 1939년 준공된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945m²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김구 선생이 1945년부터 1949년 암살당할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 김구 선생의 집무실(약 69m²)은 2층 서쪽에 2005년 복원돼 ‘백범기념실’로 운영되고 있으나 나머지는 병원의 클리닉과 약국 등으로 사용돼 왔다.

강북삼성병원은 당초 보호자 대기실(33m²)로 사용하던 1층 일부 공간과 지하층을 제외한 나머지만 시에 제공할 계획이었으나 협의를 통해 의료시설 전체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각계 전문가들로 ‘경교장 복원 추진위원회’(가칭)를 구성해 복원 설계를 마친 뒤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거쳐 완공했다. 

/ 동아일보 이인모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