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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종묘 영녕전

by 구석구석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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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5호로 지정 /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는 서울의 어떤 궁궐과도 다르다. 너무나 조용하다.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위패인 신위가 모셔 있는 곳인 만큼 숙연하고 경건하다. 종묘에 들어가 큰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고성방가는 실례다. 이 때문에 정적인 분위기가 종묘 전체를 휘감고 있다. 바로 정문만 나서면 시끌벅적한 종로 대로라는 것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사방의 높은 건물들로만 확인될 뿐이다. 조용한 곳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좋은 장소가 없을 듯 하다.

한적한 곳으로 치면 다른 곳도 있지만 종묘는 방문객들의 마음을 가라 않게 하는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라도 한번쯤 거닐어 볼만 하다. 

정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조약돌로 구분된 중앙의 3차선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 길에나 다 있는 것이 아니다. 정문으로부터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이 길은 일반인들이 밟아서는 안 되는 길이다. 그렇다면 왕이나 귀족들이 걷는 길이냐고 되묻는다면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가운데 높은 길은 ‘신도-신이 다니는 길’이다. 왕이라 해도 이 길을 걸어갈 수 없으며, 신위가 모셔져 있는 곳에는 아예 신도만이 놓여져 있다. 또한 길이 이어지는 곳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중 가운데 문은 ‘신문’이라 해 마찬가지로 영혼만이 드나드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 등 19명의 임금과 왕비의 신위를 모셔 놓은 정전은 단연 종묘의 정점을 이룬다. 이런 특성상 정전을 중심으로 길은 양갈래로 나뉜다. 전사청(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 있는 오른쪽 길을 택한 사람이라면 숲길을 한참을 거닌 후 돌아 내려오다가 다시 정전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크기나 규모면에서 처음에 봤던 정전과 다르다는 것을 곧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모르고 이미 봤다면서 길을 따라 내려갔다가 똑같은 건물을 발견하고 다시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맛배 지붕과 붉은 기둥, 하얀 박석이 깔려 있는 월대 등 정전과 닮아 있는 이 건물은 영녕전이다. 태조의 4대조 조상과 단명 등으로 인해 비교적 업적이 적은 왕과 그 왕비의 신위를 모셔 놓은 곳이다. 규모도 작고 월대의 기단높이도 2단으로 정전보다 한단 낮다. 흔히 정전은 웅장함을 영녕전은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이밖에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등의 궁궐과 달리 종묘는 공통적으로 단청 등에 화려한 장식이 없으나 오히려 단아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 프라이데이 이지혜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전퇴
동익사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그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이후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정종의 신위를 모시고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겼다. 현재 정전(宗廟正殿) 19칸에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영녕전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 부부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제수준비를 하는 전사청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宗廟正殿)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계절의 일곱 소신 칠사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 하던 곳)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종묘 안에 있는 조선시대 박공지붕으로 된 사묘건축물(祀廟建築物)로 정전 외에 월대(月臺)·신문(神門)·동문(東門)·공신당(功臣堂)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395년(태조 4)에 태실 7칸, 좌·우익실 각 2칸이 완성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11실이, 1726년(영조 2)에 4실이, 1836년(헌종 2)에 2실이, 70년(고종 7)에 2실이 각각 중건되었다.

국왕이 제사준비를 했던 어숙실

조선시대에는 정전(宗廟正殿)에서 매년 춘하추동의 첫달과 그해 12월 섣달에 대향을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일제 때 중단되었다가 1971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옛날 복식과 제찬을 갖추고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도깨비 뉴스 1906년  종묘 의 모습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였다.

중국 우(虞)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사직단(社稷壇)과 함께 나라에서 가장 중시하는 제례(祭禮)의 대상이었으며,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건평 1,270㎡의 정전은 동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된다.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이며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고려31공민왕 신당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서울국악예술고교 무용과 학생들이 팔일무를 추고 있다. 한겨례신문 김태형 기자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나타난 의례 절차, 음악, 무용 등은 중국의 고대문명을 바탕으로 형성된 하, 은, 주 시대의 의례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대문화의 특징과 의의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고대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2010년 종묘대제와 어가행렬

종묘제례악은 조선 왕실 제례악으로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때 고려가요(향악)들을 바탕으로 만든(원곡은 세종대왕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악으로 궁중희례연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보태평과 정대업에 세조10년(1464) 제례에 필요한 악곡 22곡을 첨가하였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육일무 등의 춤을 춘다.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전의 선율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 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종묘는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가 있다.

 

/ 자료 - 세계문화유산 종묘 / 네이버, 야후 백과사전 / 뷰코리아 서울종묘 / 야후블로그 '곡천', '고산과수원'


정전에서 밀려난 왕가 별묘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2-1)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게도 등급을 매긴다.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남긴 업적에 따라 새로운 지위를 내리기도 하고, 그 신주를 모시는 장소도 달리 한다. 신주를 모시다가 저승집이 꽉 차면 기둥과 지붕을 이어 붙이기도 하고, 아예 새로운 저승집을 짓기도 한다.

종묘 영녕전은 '저승(정전)이 꽉 차 따로 지은 작은 저승집'이다. 조선시대 죽은 왕들이 사는 저승의 별채쯤으로 여겨지는 영녕전은 정전(국보 제227호)에 모시지 못하는 왕과 왕비,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왕과 왕비들 신주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한 마디로 저승(정전)에서 작은 저승으로 밀려난 왕가들의 별묘라는 그 말이다.    

영녕전을 꼭꼭 숨기고 있는 대문 기둥에는 빛이 약간 바랜 빨강 파랑 노랑 태극무늬가 예쁘게 박혀 있다. 영녕전 안으로 들어서자 촘촘촘 박힌 널찍한 돌마당을 물고 있는 초록빛 예쁜 잔디밭에 까치 몇 마리 앉아 초록빛을 열심히 쪼고 있다. 길라잡이가 가까이 다가가자 까치 몇 마리 서너 번 통통통 튀더니 이내 초록빛을 물고 정전 쪽으로 날아간다. 

영녕전은 정전과는 달리 가운데 건물이 볼록 솟아올라 양쪽 건물을 날개처럼 펼치고 있다. 전체 건물보다 약간 높게 지은 이 가운데 건물에는 방이 4개 있다. 그 방에 조선 태조 4대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와 왕비들 신주가 있다. 이는 조선을 세운 태조의 조상들이니 더 높이 받들겠다는 뜻이다.  

그 곁, 서쪽 5번째 방부터 16번째 방까지 정종과 왕비, 문종과 왕비, 단종과 왕비, 덕종과 왕비, 예종과 왕비, 인종과 왕비, 명종과 왕비, 원종과 왕비, 경종과 왕비, 진종과 왕비, 장조와 왕비,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태자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하지만 신주를 직접 볼 수는 없다. 그저 굳게 닫힌 방문과 안내자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여야 할 뿐이다. 

누가 왕들에게 등급을 매겼을까.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어디로 간 것일까. 정종과 문종, 단종, 예종, 인종, 명종은 정전에 있는 왕들에 비해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덕종, 원종, 경종, 진종, 장조는 또 어떻게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을까. 이 모두 왕과 왕비를 둘러싼 세도가들의 권력 암투과정에서 빚어진 일이 아니겠는가.      

정전은 사실 종묘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왜? 지금 우리가 종묘라 부르는 곳에는 처음 영녕전은 없고 정전만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종 원년, 서기 1419년 조선 2대 왕 정종이 승하하자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다. 종묘에는 이미 태조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태조의 신위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정종의 신위를 정전에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를 모실 수 없게 된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 신주(정종)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다"고 의견을 모은다. 이와 함께 중국 송(宋)나라에서 별묘였던 사조전(四祖殿)을 세워 4조를 모시는 예를 받아들인다.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가진 영녕전(세종 3년, 서기 1421년 10월)은 이렇게 세워진다. 그때부터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불렀다. 영녕전을 처음 세웠을 때에는 태실(太室) 4칸과 양옆 익실(翼室) 각 1칸을 합쳐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세워지자 조정에서는 그해 12월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긴다.

그때부터 정전에는 익조의 신위를 제1실에 모시고, 도조 환조 태조의 신위를 차례로 모신다. 이어 세월이 흐르면서 정전에 모셔야 할 왕의 신위가 자꾸 늘어나면서 정전 또한 계속 늘려 짓는다. 이와 함께 신위 또한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기 시작하면서 종묘는 정전과 별묘인 영녕전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서울시 안내자료에 따르면 영녕전은 선조 25년, 서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전과 함께 불에 타고 만다. 선조는 이에 41년, 1608년 1월에 정전을 고쳐 짓는 공사를 시작한다. 이어 5개월 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전 공사가 매듭지어진다. 그때 정전은 4칸, 좌우 협실 각 3칸을 합쳐 모두 10칸이었다. 영녕전은 한참 뒤인 헌종 1년, 서기 1835년 10월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을 설치되면서 고쳐 짓기 시작, 지금의 모습인 정면 16칸, 측면 4칸으로 탈바꿈된다.

영녕전의 특징은 정전에는 있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다는 점이다. 까닭은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와 익조, 도조, 환조는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른 왕이므로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그 이후의 왕들은 신하가 없는 태조 4대조가 있는 영녕전에 신하를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 오마이뉴스 이종찬기자 

 

종로4가 종묘광장공원 / 관리사무소 02-731-0575

종묘는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종묘 건축물은 문화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정기총회 의결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종묘 앞 일대 39,669m²(1만2천여평)의 마당에 주차시설을 갖춘 종묘광장공원은 서울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공원 안에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이 종묘를 드나들 때 물을 마셨다는 우물이 다시 만들어졌고, 월남 이상재선생의 동상과 편의시설을 갖춘 녹지대가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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