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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해군

응징보복대 해병812망치부대 망치작전

by 구석구석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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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리 죽여라,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1980년대 초 북한군의 잦은 도발에 대응, 백령도 인근 해상(海上)에서 구체적인 북한 침투 작전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망치작전’으로 불리는 이 계획은 1982년 1월부터 2년10개월 동안 해병대 요원들을 선발해 백령도 인근 NLL(북방한계선) 해상에서 기만(欺瞞)작전을 펼치며 백령도에서는 북한의 월례도(島), 연평도에서는 북한의 용매도 대수압도에 침투해 ▲군사시설 파괴 ▲요인 암살 ▲납치·교란 등 2시간 만에 작전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작전계획은 1980년 11월 전남 횡간도 무장간첩 침투, 1981년 8월 북한 미그기(機) 백령도 상공 침공 및 미(美)정찰기 SR-71(블랙버드) 격추 시도 등 고조된 남북(南北) 대치 상황에서 수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1981년 10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국군의날 행사에서 “단순히 적의 도발을 물리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도발에 대한 철저한 응징력도 함께 갖춰야 한다”면서 “특히 도발의 대가가 더없이 비싸다는 사실을 증명할 막강한 군사력의 유지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망치작전에 관여한 한 관계자는 “무장공비 및 간첩선(船) 침투 등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해병대 정예요원을 선발해 포항에서 집중 훈련을 한 후 백령도와 연평도에 배치해 인근 NLL 해상에서 훈련 및 기만작전을 실시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다.

 “해병대 각 부대에서 1차로 선발된 요원들은 1982년 4월까지 포항에서 훈련을 받은 후, 백령도로 이동해 소대 규모로 훈련 및 작전을 펼쳤습니다. 주로 공수교육 또는 특수수색교육 이수자와 무술유단자 등이 신원조회를 거쳐 선발됐습니다.”

철저한 신원조회 거쳐 요원선발 

1981년 9월 UDT, 공수교육 등 이미 특수 교육을 이수한 인원 중 최정예 대원을 뽑는 것으로 1차 요원 선발이 시작됐다. 이들은 기본 교육 후 이듬해 1월부터 ‘망치교육’이라 불리는 ‘특수침투훈련’을 받고 백령도로 파견됐다.

야간에 중무장을 하고 6, 7명이 한조가 되어 100kg에 가까운 고무보트를 들고 산과 계곡을 뛰었다. 시간당 10km 이상을 달려야 했다. 일반 육군의 행군 시간은 1시간에 4km다. 한 번에 12km 바다수영을 시키고 중간에 낙오되는 사람은 모두 자대로 복귀시켰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는 훈련을 받으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몰랐다.

정신교육은 대남 침투 경험이 있는 남파 간첩 출신의 첩보부대 소속의 개장사같이 생긴 전향 요원이 교육을 맡았다. 주로 북한군의 체계, 편성, 북한의 생활방식, 교통, 언어, 지리를 맡았고, 보안사 소속 미국 유학파 출신인 장교가 임무완수를 하고 생환시 국가 최고유공자 처우 보상을 받을거리고 장황하고 달콤하게 사기를 북돋았고, 충성심, 복종심, 담력 배양훈련을 맡았다.

같은 해 8월엔 백령도에 이어 연평도에도 소대 규모 병력이 추가됐다. 작전에 참여했던 한 장교는 “공황장애 또는 내부혼란을 막기 위해 사단계획 수립 당시 ‘단순 전지훈련’이란 용어를 불가피하게 사용했지만, 지휘관들은 정확하게 작전의 목적을 알고 있었고 장병들도 대부분 눈치로 파악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훈련받은 교육장에는 '모조리 죽여라,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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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부대는 백령도 장촌항 인근에 있었다. 망치처럼 때리고 바로 거둔다고 망치부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군의 공식 편제에 없었던 부대인 데다 공식적인 부대장도 없었다. 대청도, 소청도에 1개 소대규모(약 45명), 백령도에 1개 소대 규모가 있었으며 1개 소대를 5팀으로 나누어 정찰조, 돌격조, 폭파조, 지원조 등으로 나누고, 보트당 8명이 타며 고무보트는 '코만도보트'를 사용하였고, 모터는 45마력짜리를 사용하였다.

소대규모로 편성된 ‘망치부대’는 3개월 단위로 교체돼 훈련 및 작전을 수행했고, 1983년 10월 말까지 총 300여 명의 요원이 6차례에 걸쳐 투입됐다. 작전 관계자는 “장기간 배치될 경우 고도의 특수훈련과 심리적 압박 등의 이유로 작전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면서 “3개월마다 현장 인원을 교체하는 한편 포항에선 다음 기수를 위한 훈련이 진행됐다”고 했다. 

신원조회 결과 문제가 있는 요원은 곧바로 복귀 조치했다. 당시 작전을 담당했던 고위급 장교는 “신체검사나 경력에서 결격사유가 없는 대원인데, 상급부대의 지시로 훈련 중 제외된 인원이 다수 있었다”며 “친인척 관계까지 정밀하게 신원조회를 실시한 듯하다”고 했다.

출처 / 국악인 김준호

2차 망치교육에 들어가면 본격적인 실전 교육을 받았다. 망치작전은 대통령의 특별작전지시에 의거한 특수 공작이기에 평소에는 접할 수 없는 작전에 필요한 1급 비밀 보안들이 지휘부에 제공되었다.

상부에서 제공한 서해 북단에 위치한 적진의 여러 섬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확보하였다. 그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표적 지역의 상세한 특수정보인 항공사진과 위성사진에 해안포, 해안진지, 적성장비 등이 망치작전의 침투할 목표로 나와 있었다.

요원들은 임무지역의 상세하고 정밀한 표적에 대한 숙지훈련을 반복적으로 실시했다.
뿐만 아니라 동해안 모 지역에 북한의 장산곶과 옹진반도 일대의 4군단 주요 지휘소가 위치한 곳과 유사한 지형에 북한군의 모형 시설을 만들어 놓고 목표까지 접근하는 실제 기동타격훈련과 생환 탈출훈련도 반복 숙달 시켰다. 

 

천안함위령제에 함께한 812부대 근무해병

특히 백령도에 배치된 이들이 훈련 및 작전을 펼친 곳은 지난 3월 26일 침몰한 해군 초계함(哨戒艦) 천안함의 함수(艦首)가 가라앉은 지점 부근이다.

백령도 앞바다에서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해상침투훈련을 반복했던 부대원들은 28년 후 벌어진 사건에 대해 남다른 소회를 밝혔다.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당시에도 물이 혼탁하고 조류가 빨라 훈련 강도가 굉장히 높았습니다. 훈련은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이번 천안함 사고가 나는 순간 구조 및 인양 과정이 분명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고(故) 한주호 준위의 희생도 참 안타까웠고요. 망치부대가 지금까지 존재했더라면, 좀 더 익숙한 바다에서 구조작업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대의 작전은 정찰팀이 해안에 근접(소총유효사거리인 450-500미터)한 거리에서 야투시경과 투투(무소음소총), 석궁, 각검(마린보이표창 같은것)으로 무장한 '척후쉬임어'가 해안을 향해 조용히 침투하여 석궁이나 대검 등을 이용해서 초병을 살해하고 투시경을 이용하여 해안에 떠있는 본대에 신호를 한다.

척후쉬임어의 유도에 따라 본대가 들어가고, 정찰조는 돌격조와 폭파조를 목표지역까지 안내하며 돌격조는 상황에 따라 목표인을 살해, 납치하고, 폭파조는 주요시설물에 폭약을 설치한다. 백령도에서 해안포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 모든 일이 30분안에 마쳐야 하는데 북한의 해군기지에서 비상이 걸리고 pk가 망치부대의 침투지역까지 오는데 30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망치들은 정찰조의 유도를 받으며 침투한 해안에 도착하면 척후쉬임어의 안내를 받아 보트에 승선하고 그때부터는 보트 엔진을 최고속으로 놓아 퇴출해야 하는데 보트는 40-45노트까지 속력을 내지만 북한군 pk를 뿌리칠 순 없다. 살아서 돌아올 확률은 0%다.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월내도 안으로 침투해야 했다. 지급된 실탄 200발, 발각되면 살기 위해 남쪽으로 헤엄치라는 지침 외에 안전장치는 없었다. 혹시라도 잡힐 경우에 대비해 개인당 2발씩 수류탄이 지급됐다. 옷 고리에 안전핀을 묶어 둔 수류탄은 언제든 자폭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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