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사적 제413호(1999.6.11) 방산동 청자백자요지
방산동 요지(窯址)는 수십 년 전부터 동내에서만 구전으로 알려져 왔으나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1년 신현3통장인 안병권씨와 김재원 교사가 시흥시 문화공보실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에서 이 지역에 대한 실사를 하였고 이 때의 조사로 인하여 이 지역에 고려초기 청자요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시에서는 경기도와 함께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조사를 실시하기로 계획하고 예산을 편성하여 해강도자미술관(031-634-2266)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였으며, 이에 대한 1차 발굴 조사가 1997년에 이루어졌고 이어 2차 발굴조사가 1998년에 실시 되었다. 조사 결과 요업활동의 시기는 대략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노출된 가마의 총 규모를 살펴보면 아궁이에서 최초의 1차가마 굴뚝부까지 총 길이가 39.1m, 2차가마는 36.5m, 3차가마는 35.8m로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이는 현재 남아있는 3차가마의 아궁이 끝에서 측정한 것이므로 3차가마의 길이만이 정확한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아궁이는 길이가 약 300cm, 폭이 약 130cm 가량 되며 가마벽과 마찬가지로 벽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발굴을 통해 출토된 유물의 종류에는 청자와 백자, 토기 그리고 각종 요도구류가 있으며, 청자와 백자의 기종으로는 발(대접), 완, 접시, 화형접시, 잔, 광구병, 유병, 주자, 호, 합, 벼루, 제기, 장고, 잔탁 등이 있다.
출토된 유물의 비율을 보면 청자가 백자에 비하여 약 95대 5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청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마가 갖고 있는 성격은 중국적인 요소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가마축조법에서 방산동 요지는 벽돌을 이용하였는데 이는 중국 요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축요방법과 같다. 다음으로는
요업방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통일신라의 전통이 강한 도기질의 요업체계가 어느날 갑자기 자기를 생산하는 요업체계로 바뀌고 있는 현장이 확인됨으로서 한국의 청자와 백자발생의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91년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한 황해도 봉산군 원산리의 요지가 발굴된 것을 제외하고는 남한지역에서 상태가 양호한 벽돌가마가 최초에 해당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방산동 청자 백자 요지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 시흥시 일대를 세력하에 두었던 호족이나 세력가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므로 시흥 역사의 한 부분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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