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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광주 남한산 남한산성

by 구석구석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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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걷기

연합뉴스 / 송홍엽 걷기모임 ‘유유자적회원

 

 

 ●총 거리·시간: 7㎞·2시간 50분(휴식 및 관람 시간 불포함)
●찾아가는 길: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로 나와 9번 버스 타고 남문 정류장에 내린다. 승용차 이용시, 남한산성 ‘로타리 주차장(끝나는 지점)’ 또는 ‘남문 주차장(시작 지점)’을 이용한다. 주차료 1000원.
●돌아오는 길: ‘종로’에서 9번 버스 타고 8호선 산성역으로 간다.
●떠나기 전에: 성곽 안쪽서는 먹거리를 구하기 어렵다. 쉽지 않은 길이니 시원한 물과 간단한 간식을 챙길 것.

남한산성의 성곽

해발 498m 청량산을 중심으로 산세와 능선을 따라 돌로 쌓아 올린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오랜 세월 서울을 지키던 요새다. 겨레의 영광, 그리고 고난의 운명을 함께해온 성벽을 따라 느리게 걸어보자.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성벽을 왼쪽에 가까이 두고 걷는다’는 원칙만 기억하면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제3남옹성 동쪽의 제10암문

1. 남문~수어장대(1.3㎞/ 35분)

‘지화문(至和門)’이라고 써있는 남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1시 방향 돌계단을 올라 성벽을 만날 때까지 간다. 성벽을 왼쪽에 두고 길을 따라가다 계단을 오르면, 둘째 고개 정상에 정자 ‘영춘정(迎春亭)’이 있고, 셋째 고개 정상에 ‘수어장대(守禦將臺·서장대라고도 함)’가 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제공

경기도 유형문화재1호 남한산성 수어장대

장대는 전쟁이나 군사훈련 때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마련된 건물이다. 보통 성내에서 주변을 관망하기에 수월하고 넓은 대지가 있어 군사훈련을 하기 편한 곳에 건립된다. 전시에는 지휘소의 역할을 하지만, 일부 장대는 평상시에 성곽 관리와 행정 기능도 수행했다.

남한산성에는 1624년(인조2년) 축성할 때 동·서·남·북 4개의 장대를 두었고, 1686년 봉암성을 축성할 때 외동 장대를 설치해 총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이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로 산성 내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있다. 수어장대 뒤편에는 우물 2개가 나란히 있어 장대에 근무하는 장졸에게 음료수를 공급했다.

남문인 지화문의 야경

수어장대는 복원한 경우를 포함한 국내 장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조물이다. 애초 단층 누각으로 지어졌다가 1751년(영조 27년) 2층으로 증축됐는데, 1836년 개건한 이후 1994년 연목이상 해체보수와 기와공사 외에는 크게 보수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초석, 바닥과 마루 가구형식, 기둥 형태 등 건축 초기의 모습 그대로를 갖추고 있어 19세기 장대의 표준적 가구 형식과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달려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인조부터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국왕이 남한산성을 찾을 때 반드시 올라서 옛일을 잊지 않고 기억했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남한산성 서문전망대는 서울 야경을 감상하기 좋은 장소다. 남한산성은 남한산(522m) 위에 길게 이어져 있다. 서울의 동남쪽 끄트머리에서 성남, 광주, 하남을 아우르는 남한산성은 어느 쪽으로 올라도 가벼운 산행과 성곽길 산책을 두루 경험할 수 있다.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www.joongboo.com)

 

2. 수어장대~서문~북문(1.7㎞/ 35분)

수어장대를 둘러보고 다시 성벽 쪽으로 간다. 성벽을 왼쪽에 두고 야트막한 경사를 내려오면 서문을 만난다. 성벽을 따라 3분 정도 오르면 숯을 보관하던 ‘매탄처(埋炭處)’ 안내판이 보이고 서울 시가지가 시원히 드러난다. 성벽 따라 계속 가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 8부 능선 길을 만나고 큰길을 따라 걸으면 검은 돌에 쓰인 ‘북장대지(北將臺址)’ 안내판이 보이며 다시 성벽 길로 갈라져 오르게 된다. 울창한 솔숲이 오른쪽으로 내내 따라오더니 어느새 북문과 만난다.

남한산성의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3. 북문~동장대지(1.6㎞/ 50분)

계속 성벽을 따라 야트막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넘다 보면 ‘군포지(軍?址)’도 만나고 돌탑도 만난다. 길 아래로 나선형 돌계단이 뚫려 있는 ‘암문(暗門)’과 물 빠지는 구멍인 ‘수구(水口)’를 지나 굉장히 가파른 경사를 10분 정도 오르면 정상 부근에 ‘동장대지(東將臺址)’ 안내판과 돌탑이 나온다.

4. 동장대지~동문(1.4㎞/ 35분)

동장대지를 떠나 다시 성곽을 따라가자. 가파른 내리막이 10분 정도 이어진다. 완만한 경사를 내려오면 ‘장경사(長慶寺)’에 도달한다. 넓은 공터가 보이고 오른쪽에 화장실과 장경사가 있다. 절에서 나오면 길이 둘로 갈라지는데 성벽을 따라가는 왼쪽 길로 간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발 아래 ‘동문’의 기와 지붕이 보인다.

5. 동문~산성 종로(1.0㎞/ 15분)

동문 아래로 차도가 보인다. 왼쪽은 하남시로 오른쪽은 산성 ‘종로’로 연결되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간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큰길이어서 건너편 보행자 길을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남한산성 역사관‘로타리 주차장’을 지나면 산성 종로에 도착한다.

남한산성 연무관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제공

 

경기도 유형문화재6호 남한산성 연무관 

연무관은 중앙군인 수어영의 군사시설로서 군사훈련이나 행사, 무사 시험 등이 치러지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직접 거둥하여 문무관의 시험을 관장하였고, 새로 개발된 무기의 시연을 지켜보았으며, 음식을 마련하여 장졸들을 치하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조의 남한산성 행차 당시 백성의 숙원을 해결해 주었던 애민정신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연무관

1625년에 창건돼 그다음 해에 창설된 중앙 군영인 수어청(조선 시대 오군영의 하나)의 중심 건물로, 1795년 수어청의 본영이자 광주유수의 집무처로 사용됐다. 연병장을 바라보는 높은 위치에 건립한 연무관은 정면 5칸, 옆면 4칸으로 정면과 배면에 퇴칸을 두고 있으며, 중앙부에서 기둥을 뒷면으로 이주하고 벽을 세워 국왕이나 수어사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연무관은 건축 이후 한 번도 화재를 겪지 않고 현재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온 중요 목조건축이다. 특히 2019년 부재 연륜연대 분석을 통해 창건 초기의 부재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된 조선 시대 관아 건축물이다. 이와 함께 수어청과 관련된 직접적 시설로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화재로 그 가치와 역사적 의미가 크다.

남한산성에는 총 5개의 탐방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남한산성에는 총 5개의 탐방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그중 산성 로터리에서 북문과 수어장대를 지나 남문으로 내려오는 1코스는 남한산성 성곽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길이다. 수어장대 인근에는 굽이굽이 휘어지는 성벽 너머로 관악산과 북한산은 물론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라면 탐방코스 대신 산성 로터리 인근에서 가벼운 산책을 즐겨도 좋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하남시, 성남시, 광주시 등 3개 지자체를 관통하는 옛길이 조성되어 있다.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후기 10대로 중 하나인 봉화로의 일부 노선으로,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 중 하나였다. 봉화로의 일부 구간과 주변의 다양한 역사문화 자원들을 연결해 탄생시킨 것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이다.

제2남옹성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왕들이 여주의 영릉을 참배하러 갈 때, 보부상들이 보따리를 지고 인근 장터를 떠돌 때,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향할 때 지나던 길이었다. 이처럼 남한산성 옛길은 지난 시절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동서남북 4개의 특색 있는 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는 동시에, 바쁜 일상생활 속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또한 남한산성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편리하고 외식을 위해 일부러 방문해도 좋을 만큼 맛있는 음식점이 많은 것도 장점이다. 남한산성 관람 안내 등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https://gg.go.kr/namhansansung-2)를 참고하거나,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031-8008-5157)로 문의하면 된다.

남한산성 행궁

경기도 유일의 도립공원 남한산성

광주 최고의 볼거리는 단연 남한산성이다. 청량산(497m)을 끼고 앉은 남한산성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와 백성들이 45일간 항전했던 곳.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광주8경 중의 대표적인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나, 성 내부는 광주시에 속해 있다. 성벽은 주봉인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 동쪽으로 망월봉과 벌봉,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였다.

단풍놀이의 화려함만큼이나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은 수도권 시민들에게 더 없는 1일코스의 관광명소다. 

강원도 설악산, 전북 내장산까지 교통불편을 감내하며 찾지 않아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단풍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 그 곳에는 단풍의 흐드러짐이 있다.

개원사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이 단풍의 절정기를 맞아 붉으스레한 자태를 드러내며 관광객들에게 연일 수줍은 손 짓을 하고 있다. 경기도 유일의 도립공원 남한산성은 울긋불긋한 단풍색으로 관광객들을 유혹하며 최고 절정에 이르고 있는 그대로의 자태를 뽑내고 있다.

국가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은 산세가 어머니의 품같이 부드럽고 넉넉하며 사시사철 다양한 모습으로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을단풍은 수도권 인근에서 최고로 손꼽히고 있는 명소다.

경기도 지정기념물 제119호 개원사는 조선 인조 2년(1624)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도들을 총지휘하는 본영사찰로 건립되었다.

그후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으로 의승방번(義僧防番)이 폐지될 때까지 370여 년 간 번창했으며, 전국 사원들의 승풍(僧風)을 규찰하는 규정소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한 조선 불교의 총본산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인조 15년(1637) 이래 대장경이 보관되어 왔는데 1970년 화재 때 법당 누각 등의 건물과 함께 전소되었다. 그후 작은 건물 1동이 겨우 남아 있었으나 승려 선효가 신도들과 함께 10여 년 간에 걸친 원력 끝에 대각전, 요사 등의 건물을 신축한 후 새롭게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군기고 터, 누각 터, 종각 터 등에는 초석 돌계단 박석 등이 남아 있어 옛 개원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온조 14년에 하남 위례성에서 천도해온 이후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토성(주장성, 일장성이라 칭함)으로 축성했고, 조선 광해군 13년(1621년)에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했으나 이괄의 난으로 인해 중단됐다가 인조 2년(1624년)에 재시작하여 인조 4년(1626년)에 준공됐다.

1963년 1월21일 남한산성 성벽이 국가사적 제57호로 지정되고 1971년 3월17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경기도 유일의 도립공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남한산성은 주변지역에 백제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돼 있어 온조왕 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산성으로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시설과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성 내부의 구조물로는 동·서·남·북의 4곳에 성문이 있고 신남성의 두돈대에 각각 홍예문이 설치돼 있으며 남옹성의 포루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1개소 있다.

동문 안은 천진암과 주어사 등 천주교 발상지이자 성지로 유명하고, 서문은 인조 15년 인조가 세자와 함께 이문으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했던 장소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는 문으로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이곳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며, 북문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고 해서 전승문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산성 전체가 국가사적인 남한산성 내에는 수어장대를 비롯 숭열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등 경기도 유형문화재가 제1호부터 제6호까지 몰려 있고,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 제119호, 제164호인 망월사지와 개원사지, 남한행궁지가 있으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호와 제15호인 장경사와 지수당이 있어 지정문화재가 모두 11곳에 이른다. 

경기도 유형문화 재 제1호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 주봉인 일장산(日長山) 정상(해발 453m)에 세워진 성곽시설물로 조선 인조2년(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서남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이며, 이 곳에서는 성내와 인근의 양주ㆍ양평ㆍ용인ㆍ고양ㆍ서울ㆍ부천 및 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조된 2층 누각이며 축조당시에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라 불리었으나 영조27년(1751)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왕명을 받들어 2층 누각을 증축하였는데 외부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하였다.

 수어는 처음에는 총융청(摠戎廳)에서 맡았으나 성곽이 준공된 뒤 수어청을 따로 열어 전담케 하였는데, 이 수어청에는 전ㆍ중ㆍ후ㆍ좌ㆍ우의 오영(五營)이 소속되어 있었다. 전영장(前營將)과 좌영장(左營將)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고종 건양 원년(1896)유수 박기수(朴岐壽)가 개건하였으며 또한 1957년에 해체복원하였다. 구조는 한식 목조2층 와즙(瓦葺)으로 웅장한 규모의 성곽건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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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 숭열전은 남한산성내 일장산(日長山)중턱의 서문안에 건립되어 있는 백제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이며, 산성 축성당시 총 책임자였던 완풍군 (完豊君) 이서(李曙)를 배향(配享)으로 종사(從祀)하고 있다. 

조선인조 16년(1638)에 왕명으로 건립하였으며 이서는 이 산성축성에 공이 커 여기에 배향하였는데 매년 춘추로 택일해서 향제하고 향축은 예조에서 보냈으며 정조19년(1795)숭열이라 사액(賜額)하였다.

  건물양식은 한식 목조 단층의 와즙각우(瓦葺閣宇)이며 수차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조 제22대 정조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서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치하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신하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한사람 같이 있게 하여 달라고 하였기 때문에 정조가 곧 축성시의 공로자 이서를 종사케 하였다.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은 남한산성내 일장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의 서편에 위치한 당우(堂宇)로서 이회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인조 2~4년 사이에 산성의 동남편 축조공역의 책임자로 있던 이회가 간사한 무리들의 참언때문에 사형에 처해졌는데 그 원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본전의 구조는 한식 목조 단층 기와지붕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 건평 10.8평의 건물이다. 남한산성을 축조할 당시 총책임자는 이서이고 동남성 축조는 이회, 서북성(西北城)축조는 벽암대사의 승병들이 맡았는데 동남성 축조는 지세의 험악으로 기일 내에 완성되지 못하자 이회의 명성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동남성 축조공사가 부진하고 취약한 것은 이회가 공사경비를 주색에 탕진한 때문이라고 참언상소하였기 때문에 즉결 처분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현절사(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는 남한산성 동문안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의 척화신(斥和臣)인 3학사 홍익한 (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가 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에 의하여 심양에 압송되어 항거하다가 결국 인조 15년(1637)비참한 죽음을 당한 뒤 그 충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숙종 14년(1688)에 유수 이세백에 명하여 세웠으며 동왕 19년(1693)봄에 사액하였다.

침괘정은 남한산성내 마을 동쪽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정각인데 여기서 이 건물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을 축조한 이서라 한다. 

이서가 축성에 착수하였을 때 이 지점 수풀 속에 한 고각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몇 백 년이 되었는지 건조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주초가 견고하였으며 방의 온돌이 상하지 않았고 건물 중간 한 방의 온돌 높이가 수 척에 달하였다 한다. 시험삼아 불을 아궁이에 때어 보니 웃목부터 더워지고 차차 아랫목이 더워졌다 한다. 따라서 주민들의 전하는 말로는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라 하였다 한다.

침괘정이 온조왕의 왕궁지라 하는데 대해서는 이를 고증할 아무런 자료도 없기 때문에 무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현재의 건물은 후세의 것이고 이서가 발견할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7년(1751)에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중수(重修) 하고 침괘정이라 명명한 것이고 무기고 혹은 무기제작소의 사무를 관장하던 곳인 듯 하다.

산성 내에는 조선 현종 13년(1672년)에 이세화가 아름다운 연못가에 건립한 지수당이 관리사무소 옆에 있고, 장경사, 개원사, 망월사 등의 사찰과 승군을 훈련하던 국청사지, 남단사지, 한흥사지 등의 절터가 있으며, 남한산성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관도 있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남한산성은 계절마다 변화하는 자연경관도 매우 수려하다. 봄에는 화려한 벚꽃 길로,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으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단풍이 장관인 가을, 설경의 운치를 한껏 누릴 수 있는 겨울 등 다채로운 사계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연무관은 남한산성내 동편 산록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군졸들이 무기를 닦던 곳으로 건축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숙종 때에 와서 종전에는 연무당이라 불러오던 것을 연병관으로 개칭하는 한편 수어사 김재호로 하여금 일대 개수를 하게하고 「연병관」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예전에는 이 건물을 중심으로 무술을 닦고 연무관에서 무재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한양으로 보냈다 한다. 구조는 한식 목조 단층 와즙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에 건평 37평의 건물이다.

원기둥에는 4개의 주련(主聯)을 걸어 놓았으며 통나무에 글을 썼는데 안쪽을 파내어 기둥에 부착해 놓았다. 그 글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옥과 같이 단단한 진터와 철벽과 같이 견고한 성곽이 높은 산 위에 축조되어 있고, 풍운을 탄 용처가 기이한 힘을 내는도다. 궁상각치우 오음육률(宮商角緻羽 五音六律)이 경내에 진동하여 삼밀(三密) 신밀(身密) 구밀(口密) 의밀(意密)을 총본(蔥本)에 전하니 삼본(三本)위는 덕본(德本), 녹은 공본(功本), 직은 능본(能本)이 공허하도다.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고관들이 한유하던 낚시터이다. 건립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의 연못만이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이 있다. 정자에는 지수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의 남쪽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성을 관류하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정자 옆의 연못은 'ㄷ' 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이것은 을축년 대 홍수 때 매몰된 정자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원래 'ㅁ' 자 형의 정자를 완전 복원하지 못한 것이 현재의 정자 모양으로 남았다. 지붕의 양식은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정자 크기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되어 있으나 측면의 1칸은 반칸 크기로 되어 건물의 평면은 장방형 꼴을 이룬다.

정자의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주위에 30cm 높이의 난간을 둘렀으며 남북동 3곳의 난간 중앙을 트고 디딤돌을 놓아 출입토록 하였다. 천장은 연등(삿갓)반자와 우물반자를 겸하여 호화롭게 보이게 하였다. 기둥의 양식은 주심포에 사각기둥을 쓴 것이 특징이다. 

광지원 매표소 인근에서 시작된 부끄러운 듯 한 단풍이 차츰 산성 입구로 올라가면서 산 전체가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단장을 끝마친 상태다. 아름다움만큼이나 교통도 편리한 것이 장점. 여기에 산성안 깊숙히 직접 차량을 몰고 들어가는 낭만도 덤으로 만끽할 수 있어 가족단위 나들이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광주, 하남 그리고 서울 접경지역에 있는 남한산성의 단풍산행 코스로는 동문-북문-서문을 거쳐 남문으로 들어가는 2시간 일주코스가 일품이다.

남문에서 동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초록, 노랑 그리고 붉은 단풍잎들을 감상하며 광주와 성남 분당쪽으로 뻗어있는 수려한 산세를 감상하다보면 어느새 세태의 번거로움을 잊는 무염무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남한산성계곡 번천천

골짜기 계곡물이 단풍 잎을 안은 채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는 모습은 이 곳이 지상낙원 임을 확인케 한다. 단풍 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고요한 산세 한 켠에 자리한 사찰은 영혼을 맑게하는 청량제가 된다.산 중턱에 자리한 개원사가 사바 세계에서 겪은 모든 풍상을 보듬어주며 포근히 그리고 정겹게 포옹해 준다.

동문을 거쳐 북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장경사와 망월사도 산사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안다. 북문 정상에 오르면 막힘이 없는 산세 덕에 서울 시가지와 유유히 흐르는 한강, 수도권 시민들의 젖줄인 팔당호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능선과 성곽이 얽히고 밟히듯 9㎞나 뻗어 있어 30분부터 3시간에 이르는 다양한 등산·산책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성곽 전체를 일주하는 등산코스가 3시간 가량 소요되며 북문에서 수어장대를 거쳐 남문까지는 1시간 가량, 현절사 뒷편에서 벌봉을 거쳐 수어장대∼남문 코스가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 체력에 따라 등산코스를 즐길 수 있다. 특히 동서남북에 산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4개의 문과 사이 사이에 16개의 암문이 있어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등산으로 땀을 흘린 뒤에는 손으로 직접 빚은 산성손두부와 청정 도토리묵, 산성에서 자란 갖은 나물을 곁들인 산채정식, 오리, 오골계, 닭 등을 이용한 다양한 음식에 산성의 맑은 물로 만들어 낸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곁들인다면 신선도 부럽지 않다.

초입에서부터 맑은 물에 씻긴 바위와 돌들이 개울바닥에 깔려있고 잘 포장된 8km의 도로변에 벚꽃 가로수가 아름답다. 드문드문 이랑논이 있는 것도 나름대로의 운치이고 남한산성 주변에 흐르는 오전리 계곡, 불당골 계곡, 검북리 계곡은 깊이 따라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된다. 병풍바위 앞의 야영장이며 주필암 부근의 소(沼)와 작은 폭포들은 한여름 더위를 식혀주는데 족하다.

동문을 들어서면 각종 토속 음식을 팔고 있어 시장기를 메우고 병자호란 벽화전시관과 지수당, 연무관, 현절사 등 명소가 많고 4대문은 옛대로 복원하여 오색이 창연하고 성곽은 잘 다듬어져 아름답다.

성곽 일주를 하는 도로가 나 있어 정겨운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남한산성 서쪽 주봉인 일장산에서의 서해 낙조풍경은 한 폭의 그림으로 카메라맨들의 관심거리이다. 발아래 깔린 서울의 시가지가 한줌 장난감같아 호연지기의 기상을 키우기에 족하다. 광주가 자랑하는 명소로서 손색이 없다

/ 문의 031)760-2541∼2(남한산성관리사무소)

/ 자료 - 인천일보 / 경기도민일보 오인기기자 / 경기도 광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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