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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이것저것

핵물리학자 이휘소

by 구석구석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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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李輝昭, Benjamin Wiso Lee; 1935-1977)

1990년대 초, 중반 한국에서는 재미 물리학자 고 이 휘소 열풍이 불었다. 김 진명씨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해냄, 1993)."는 4백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소설은 미국에 유학하여 핵물리학자로 성공하여 세계적 물리학자가 된 주인공이 박정희 대통령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한국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고, 그런 가운데 미국 정보기관의 간섭으로 서울에서 뜻밖의 사고를 당해 주인공은 사망한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었다. 이로인해 김 진명은 친족들로부터 명예회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었다.

 이 휘소를 개인적으로 알던 다른 한국 학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더라도 이 휘소가 훌륭한 물리학자였던 것만은 인정할 수가 있다. 이는 그가 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에서 이론물리부장을 지내고 Fermilab의 도서관 벽에는 이분의 사진이 크게 확대되어 붙여져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Fermilab에서의 이론물리부장은 아무나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물리학자란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를 핵무기 개발과 연관짓는 발상은 순전한 소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의 전공 분야는 원자탄을 만드는 데 직접 대단한 도움이 되는 분야가 아니라, "저절로 대칭 깨짐(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이나 "게이지 이론(gauge theory)", "C-쿼크" 등을 연구하는 입자물리학자였다.   

  이 휘소는 1935년 1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화학 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후,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전과가 되지 않아 주한미군의 도움으로 미국 오하이오 주의 마이애미 대학으로 옮긴다. 미국에 온지 1년 6개월 후인 1956년 6월 수석으로 마이애미대학을 졸업하고 피츠버그 대학원(University of Pittsburgh)으로 옮긴다. 여기서 프랭클린 벤자민의 자서전을 읽고 감동하여 Benjamin W. Lee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박사과정은 펜실베이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으로 옮겨서 받는다.  학위를 받고나서 1966년까지 펜실베이니아 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있게된다.  1961년 이 휘소는 프린스턴고급연구소(Princeton, Institute of Advanced Study) 정회원겸 연구원으로 들어간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1962년 5월 7일 중국계 미국인 심만청과 결혼하여 이후 1남(천) 1녀(안)을 둔다.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뉴욕주립대(Stony Brook) 교수를 거쳐 1973년 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의 이론물리학 초대 전임부장에 취임하였다. 곧 Chicago 대학의 교수도 겸임하였다. 소립자 물리학자로서 우수한 논문을 많이 발표했고 연구활동이 절정기에 이르러서 세계의 주목을 크게 받고 있을 때, 1977년 6월 16일 향년 42세로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타계하셨다.  이휘소 선생의 타계 후 2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한국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로 평가된다.

 미국 뉴욕주립대학(Stony Brook)에 양첸닝(Chen Ning Yang, 195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교수와 이휘소가 있다는 소문은 중국과 한국에까지 대학생, 대학원생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래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주립 대학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었다. 강주상(현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교수)과 피서영(현 Boston University 물리학과 교수)도 그 가운데 몇 명이었는데 휘소에게서 박사 학위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강주상 교수는 요즘도 미국에 가는 일이 있으면 미망인과 그의 가족을 찾아 인사를 드린다고 한다.

 그는 소립자 물리학의 새로 전개되는 이론 선두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아간 세계 정상급의 이론가였다. 1960년대에는 수학의 그룹 이론이 소립자간의 핵력과 같은 강상호작용 현상연구에 많이 응용되었는데 SU(6) 그룹을 이용하여 양성자, 중성자 같은 핵자의 자기 모먼트 계산으로 입자계의 대칭성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카이랄 대칭과 유동대수 이론을 통하여 강입자들의 상호작용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므로써 세계적인 대가가 되었다. 이것은 곧 카이랄 역학으로 이어져 대칭의 자발적 파괴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휘소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게이지 양자장론에서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과 참 입자의 탐색에 관한 연구이다. 핵의 베타붕괴 같은 소립자의 약상호작용에 관한 Fermi 이론은 1950년대 후반 공간반전 대칭의 깨짐이 알려져 큰 변혁을 가져왔다. 그 후 전자기작용과 약상호작용을 통일장 원리에서 추구하는 이론들이 생겨났지만 약작용과 관련되는 게이지 장의 재규격화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 문제는 1970년대 초기에 이론적으로 해결되었는데 지금은 표준이론이 되어서 "전기"와 "자기" 현상을 통합설명하는 Maxwell 이론에 버금가는 물리학 이론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휘소 선생은 이 방면에서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물리학자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에는 K-중간자의 희귀붕괴 과정연구에서 새로운 참 쿼크가 예견되었는데, 이휘소는 참 쿼크의 탐색방도를 여러 방면으로 제시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1974년 가을에 발견된 J/Ψ 소립자로 이휘소는 단순히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에서 더욱 유명한 "현상론 물리학자"가 되었다. 그 후 이 논문에서 제시한 입자탐색 방법은 지금까지 고에너지 물리 현상 연구에 관한 정통적인 연구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재규격화 이론에 관한 그의 업적도 세계 정상급이었지만 참 입자 탐색에 관한 논문으로 그는 흔히 노벨상 수상자 후보였다는 평을 많이 받고 있다. 이 휘소는 42세의 아까운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14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셨는데 1974년부터 전산화된 SPIRES 데이터베이스에는 비록 60여편 정도 수록되어 있으나 인용회수는 모두 10,000회에 이르고 있다.

 이휘소는 그의 학문적 업적 이외에도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큰 기여를 하였다. 1974년 미국 AID 차관자금에 의한 서울대학의 이공계 교육 증진 계획을 적극 지원하였고, 이같은 외국 차관에 의한 국내 대학교육 기자재 구입, 확충은 1980년대 한국의 대학원 수준 향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실험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한국이 고에너지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60년대 후반 벨트만(Martinus J. G. Veltman)은 네델란드에서 Schoonschip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오늘날 Mathematica 프로그램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것은 수치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기호를 조작하여 대수적 연산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비가환성 게이지 이론을 섭동전개할 때 상당수의 파인만 도식에서 "무한대"들이 서로 상쇄되어 유한해지고 의미있는 이론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그의 지도학생이었던 토프트(Gerardus 't Hooft)는 비상한 수학지식을 활용하여 학위논문에서 이를 입증했다. 곧이어 이휘소는 "Spontaneously Broken Gauge Symmetry"라는 제목으로 5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틀을 굳건히 만들었다. 그 이전에 제안된 Feynman, Fadeev, Popov 등의 아이디어를 "Functional 방법"으로 깨끗이 처리하여 유니타리티 문제도 해결하고 비로소 자발적으로 깨지는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이론이 정립되었다. 파인만, 슈윙거(Julian Seymour Schwinger , 1918-1994), 도모나가(Sin-itiro Tomonaga, 1906-1979)가 가환 게이지 이론을 재규격화하였다면 이 휘소, 토프트, 벨트만은 비가환 게이지 이론을 재규격화한 것이다. 휘소의 Functional 방법은 그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론 물리학도들의 정통적인 연구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재규격화에 관한 업적으로 벨트만과 토프트는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휘소가 생존하셨더라면 1999년에 노벨상 공동수상이 확실했을 것이다. 이휘소의 서거 후 게이지 이론은 물리학의 주류가 되었다. 전자기-약작용의 통합 뿐만 아니라 핵력같은 강상호작용까지 포괄하는 소위 "표준모델" 이론이 통용되었고 대칭성에 근거한 여러 가지 변형된 "모델"이 심도있게 연구되고 있다. 현재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최대 관심사는 비가환 게이지 대칭이 자발적으로 깨져서 극히 짧은 작용거리의 약작용을 가능케하는 Higgs 입자의 존재를 밝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휘소는 물리학 발전과정에서 큰 획을 긋는 커다란 업적을 남기셨다. 그 밖에도 K-중간자의 희귀붕괴, 천체 물리학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내셨으며 이 모든 것이 향년 42세까지의 업적임을 감안할 때 선생같은 세계적 석학이 일찍 타계하시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물리학계 발전에 얼마나 큰 원동력이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나라에서 이휘소는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철학과는 무관하게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중반 주한미군 철수정책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데 마치 이휘소가 이 사업에 깊숙이 관여한 중심인물이어서 미국 정보기관이 교통사고를 가장하여 암살했을 가능성이 사고 당시 언론에 제기된 적이 있었다. 1989년에는 "핵 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책이 출판되어 이를 기정사실화 하였다.  1993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베스트 셀러로 등장하면서 사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비록 픽션이라는 단서를 달았어도 뼈대는 사실이라며 주인공으로 가명을 썼어도 이휘소의 작품명이라는 등 그럴듯하게 꾸며대었다.  널리 알려진 바처럼 핵무기 개발은 소립자물리 이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핵무기 개발 초기단계에서는 핵반응 산란단면적 등 과학적 데이터가 중요하였기에 핵 물리학자들이 참여했으나 이들은 이미 공개된 과학정보이고 핵무기 개발의 핵심은 핵연료 농축 등 제작공정과 관련된 기술이기에 그와는 더욱 무관한 것이다.

 이휘소의 개인 소유 학술자료는 북경대학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북경대학에는 도서관에서 흔히 보는 학술지 인쇄본이 기증되었으며, 유품 중 연구일지, 연구노트, 개인장서 등 귀중한 자료는 1991년 미망인 마리안 여사가 고려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여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강주상 교수는 기증 자료들을 인계하기 전 세밀하게 검사하였으나 한국정부와의 접촉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

 1974년 서울대 AID 차관 심사 때에도 주위에서 한국정부는 미워도 한국의 과학발전을 위해서는 도와야 한다라는 한국인 동료 과학자들의 조언 때문에 마지 못해 응했다는 것이다. 그 후 생각이 바뀌어 1978년 동경에서의 고에너지 국제학술회의 직후 여기에 참석한 세계 석학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학술회의를 열 수 있도록 가까운 해외 한인 동료들과 추진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가 계획했던 1978년 서울에서의 물리학 국제학술회의는 이휘소 추모 학술회의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 동안 상당한 과학기술 투자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아직 노벨과학상 수상자 한명도 배출하지 못하는가 하는 사회의 아쉬움이 크다. 가끔 언론매체를 통해서 홍보되는 많은 "한국의 노벨상 후보자"들이 과연 국제적으로 얼마나 그 수준으로 공인받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는지 궁금한 가운데 이휘소에 관한 세간의 인식은 상당히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노벨과학상 시상규정에는 최다 3명까지, 또 2개 분야 이내에서 시상하는 제한조건이 있고 한번 수상된 분야는 다시 시상되지 않는다. 물론 죽은 사람은 수상할 수 없다. 흔히 "이휘소는 가장 노벨상에 접근한 한국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다. 그러나 이휘소의 업적만으로는 노벨상 수상이 힘들고 생존해 계시다면 그 동안의 쌓은 업적으로 충분히 수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토프트와 그의 지도교수였던 벨트만이 1999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임을 볼 때 이휘소 생존했더라면 이들과 함께 수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는다. 노벨상 위원회는 "물리학에서 전자기-약작용에 관한 양자구조를 밝힌" 공로로 시상한다 했는데 이휘소 토프트, 벨트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상자가 될 것이다. 비록 그 동안 생존만 하시고 더 이상 아무 학문업적이 없으셔도 금년도 수상자 대열에 끼는 것은 재규격화 이론에 관한 그의 업적으로 볼 때 상당한 객관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휘소는 가장 노벨상에 접근한 한국인이라기보다 이휘소는 생존했더라면 1999년 노벨상을 확실히 수상했을 한국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생존하셨을 경우 과거 22년 동안 그 이전에 이미 이루신 이상의 학문업적을 성취하셨을 것도 틀림없을 것이다.

 이휘소가 타계한 1977년 이후 우리 나라의 과학계는 엄청난 발전을 하였다. 그러나 과학자 인력층이 넓어지고 다양해졌을 뿐 최소한 물리학 분야에서는 이휘소의 학문적 경지와 수준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없다고 본다. '우리 나라는 언제쯤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겠는가'하는 국민적 갈망을 가끔 듣는다. 이휘소가 생존해 있어 1999년도 수상자 대열에 포함된다면 그는 30대 후반 나이에 이룬 업적으로 25년 이상 지난 60대 초반에 수상하게 되는 것이다. 주위를 볼 때 앞으로 과연 20년 정도 후에 노벨상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세계적 수준에 이미 도달한 과학자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가령 그가 아직 생존, 1999년도 노벨상을 받는다고 가정해도 한국계 미국인이 받고 미국이 배출하는 것이며, 한국인이 수상 또는 한국이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는 노벨과학상을 배출한 26개국 대열에 아직 끼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과학교육에 무슨 문제점이 있기에 국내에서는 아직 이휘소와 같은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를 배출하지 못하는가 반성되는 바가 많다.

참고서적:
"소설 이휘소"    공 석하,   뿌리,   1993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박 성래,   교보문고,  1998
 "물리학과 첨단기술" 1992년 12월호
 한국물리학의 선구자와 재미한인 물리학자 - 윤석구
 "물리학과 첨단기술 1999년 12월호" 한국의 물리학자(이휘소)-강주상


최초의 핵물리학자 이휘소


밤 열 한시가 넘었는데도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만은 전들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CIA의 청와대 도청 사실에 대한 대응책>이란 대외비 문서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얼마전 뉴욕 타임즈지에서 미국의 CIA가 75년부터 한국의 청와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도청한 사실이 있었......"음을 보도한 바가 있었는데 세계박대통령은 지금 거기에 따른 대응 방안 계획서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박대통령은 조금 전에 불을 붙여둔 담배가 재떨이에 걸터앉아 뻘겋게 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새 담배를 꺼내어 라이터 불을 당기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의 얼굴은 몹시 경직되어 있었고 깡마른 광대 뼈에 겨우 붙은 듯한 얇고 검은 피부가 가끔 실룩실룩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를, 티우쯤으로 봤나? 어림도 없지. 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지, 티우처럼 카터의 힘에 무너지는 허수아비가 아니라구."
박대통령은 그 대외비 문서에서 잠시 눈길을 뗀 동안 그런 넋두리를 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1945년 9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하였지만 북위 17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대치되어 남은 자유진영 국가가 지원하고 북은 공산진영, 특히 소련이 지원하고 있었다. 이른바 남쪽의 베트남, 북쪽의 베트콩인데 이 두 정권의 다툼에 세계의 열강들이 끼여듦으로써 그 유명한 <월남전>이 되고 만다.

월남전은 1964년부터 베트남과 베트콩의 전쟁에서 미.소 양진영의 힘겨루기로 팽팽히 발전해 왔으나, 카터 미국정부가 들어서면서 1975년 4월 어찌된 영문인지 미국은 베트남에 참전한 군인들을 철수해 버린다. 그 순간 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베트콩에 의해 함락되고 이 무렵의 대통령인 티우는 미국으로 망명하고 만다.

우리나라도 1965년부터 카터 행정부가 베트남에서 철군하기 얼마 전까지 베트남에 참전했었다. 카터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할 때 그 이유를 '남의 나라 전쟁에 미국의 소중한 전력과 생명을 희생시킬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한마디에 미국을 영원한 우방인 줄로만 알고 섬겨 왔던 베트남 티우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의 팔에 매달려 정말 그럴 수가 있느냐며 어떻게 해서든지 강국인 미국이 베트남을 지켜줄 것을 눈물로 호소해 보았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은 냉담했다. 티우를 여지없이 뿌리쳐 버린 카터의 행동을 지켜본 박대통령도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남과 북으로 대치된 휴전선을 미군이 와서 지켜주고 있지만 언제 어느때 한국이라 해서 베트남처럼 카터 대통령의 냉담한 철군 호령이 떨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잖은가.

박대통령은 담배 연기를 후­ 뿜어냈다. 아니 긴 한숨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의 장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할수록 명쾌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힘! 국가의 힘! 힘이 없는 나라는 우방조차도 없다. 박대통령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때였다.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순간적으로 박대통령은 긴장을 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 전화는 주미 대사관과 연결된 핫 라인으로써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전화였기 때문이었다. 박대통령이 수화기를 황급히 귀에 갖다 댔다.

"각하, 이휘소 박사가 돌아가셨습니다."
"뭐요? 이박사가?"
무엇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박대통령이 주미 대사에게 반문을 던지자,
"각하, 이휘소 박사께서 미 국립과학연구소에 강의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주미 대사는 사고 경위를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하는 것이었다. 수화기를 힘없이 놓아버린 박대통령은 탈진 현상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며 어깨의 힘이 쭉 빠지고 만다.
이휘소 박사 사망. 교통사고. 이때가 1977년 6월 17일 밤 열 한시 삼십 분쯤이었다.
박대통령은 스프링에서 몸을 퉁기듯 의자에서 몸을 벌떡 세우더니만 비서실장을 불렀다.
"김실장! 김실장!"
김정렴 비서실장이 놀란 얼굴로 들어왔다.
"각하!"
"김실장! 미국과 단교를 선언해!"
박대통령의 그 의중을 알아차릴 수 없는 김실장은 의아한 표정으로"각하! 무슨 일이신가요?"
하고 반문을 했다.
"이휘소 박사가 사망하셨대."
박대통령의 그 말에 김실장의 눈은 거짓말이란 듯 휘둥그래진다.
"이휘소 박사께서요?......"
"말은 교통사고라고 하는데 내 판단으로는 석연치 않아. 미국 사람, 믿을 수 없어. 내 방까지 도청한 사실로 봐서도 말이야."
박대통령은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각하! 이럴 때일수록 각하께서......"
김비서실장은 박대통령의 흥분을 진정시키려는 의도로 담배를 꺼내어 권한다. 김비서실장으로부터 담배를 받아든 박대통령은 몇 번이고 담배 연기를 빨아 내뱉더니만 누그러진 음성으로"김실장, 내일 내가 직접 미국에 항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겠네. 김실장은 지금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토록 조치하게나. 내일 아침 바로 열 수 있도록."
"네, 각하."
김비서실장은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각하, 내일 항의 성명을 하실 때 이휘소 박사에 대해서는 보류해 주십시오. 도청 사실이야 보도 사항이니까 근거가 확실하지만 이박사 사건은 아직 사고 경위가......"
"알았네."


다음날 박대통령은 미국 대사를 직접 불러 다음과 같이 항의하고 내외기자 회견까지 가졌다.
<미국은 한국의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며 마치 한국을 식민지로 착각하고 있다. 주권 국가로 한국을 대접하는 것도 아니고 진정한 우방으로 대우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두번 다시 미국에 애걸하지도 않겠거니와 미국과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

이보다 앞서 가진 국무회의 석상에서는 이휘소의 사망과 도청 사건을 언급한 끝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미 미사일 부대 철수, 지상군 2만여명 철수, 연말까지는 전 미군을 철수, 이렇게 힘 약한 우방에게 압박을 가중시키고...... 이런 미국을 믿고 국방을 의논할 수 없어요. 우리도 미국이나 소련이 가진 무기를 가지면 돼."

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터뜨리기도 했었다.박대통령의 그 말 중 미국이나 소련이 가진 '무기'가 과연 무엇이기에 박대통령은 이휘소 박사의 사망을 애써 강조하면서 그 무기를 가지면 된다라고 하였을까?

이휘소(李輝昭). 그는 누구일까? 그가 어떤 인물이었기에 군사 혁명가, 강골 정치가, 야당 정치인으로부터 독재자로까지 지탄을 받은 박대통령,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박대통령에게 그토록 심한 충격, 그것도 슬픔의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단 말인가.이휘소를 아는 한국인은 그 당시엔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한국을 벗어나면 벤자민 리(Benjamin W. Lee)로 알려진 그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하듯 핵물리학의 기본 체계인 소립자, 즉 참(Cham) 기본 입자의 존재에 대한 이론으로 유명한 한국 최초의 핵물리학자이다.

1935년 서울의 보문동에서 태어난 이휘소는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에 수석 합격한다. 서울대학교 화공과 2학년 때 도미하여 마이애미대학 물리과에 편입하였다가 펜실베니아대학에서 스물 일곱 나이로 박사 학위를 취득, 그 당시 미국에서 손꼽히는 10명의 물리학자가 된 그는 핵물리학의 1인자로 부상한다.박대통령이 이휘소의 이름을 알게 된 때는 1971년이었다.주한 미군 철수에 관한 이야기를 카터 이전에 닉슨 때부터 시작되었다.

주한 미군의 철군에 따른 국가안보결정비록 48조에 의하면 1971년 3월 주한 미군 제7사단 2만여 명을 철수하고 잔여 병력 1만7천여 명만을 남긴 대신에 매년 2억 달러 정도의 무상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것으로 합의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박대통령은 한국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군사력 증강의 방법으로 미사일 제조와 핵개발에 대하여 초미의 관심을 갖게 된다.

"김실장, 미국은 저희들 맘대로 우리 국토를 양분시키고 저희들이 필요할 때 월남에 우리 군인들을 보내 주고 했는데 이제는 주한 미군을 철수해?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그해 3월 21일 그러니까 국가안보결정비록 48조를 합의하던 날 박대통령은 김비서실장과 집무실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핵개발에 대한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된다.

"이젠 미국을 믿을 수 없어. 우리가 미국을 믿으려면 우리의 힘이 그만큼 컸을 때의 일이야. 즉 우리도 미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주권 행사를 하려면 핵개발을 서둘 수밖에 없어."
"각하, 당연하신 판단입니다."
"그런데 핵개발을 하려면 비용이 얼마나 드나?"
"조사토록 지시하겠습니다."
"미국에 가 있는 한국인 과학자는 몇 분이나 되나?"
"제가 알기로는 한 2백여 명, 그 중에는 핵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도 상당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음......"
"특히 이휘소 박사는 대단한 핵물리학자입니다."
"이휘소?"
"미국의 핵개발에 직접 관여하고 있답니다."
"그래요?"
박대통령은 놀라움을 표시했다.
"세계의 여론을 종합해 보면 20세기 전반이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원자력이 운영되었다면, 20세기 후반은 이휘소에 의하여 세계의 핵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핵에 대해서만큼은 이휘소의 이론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김실장, 그분을 모셔 올 수 없을까?"
"지금 상황으로선...... 그분을 모셔 온다면 오히려 미국과의 갈등이 더 심해질 뿐만 아니라......"
"음!...... 국가가 필요하다면 와 줄 순 있겠지. 다음에 말이야."
김비서실장으로부터 이휘소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은 박대통령은 당장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을 불어오게 했다.
"최장관, 이휘소 박사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
"네, 제 고등학교 후배이자, 미국에서 재미 한국인 과학자협회 회원이었습니다."
"그럼 잘 아시겠군. 그분 능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저도 물리학을 전공하였지만 벤자민 리보다는......"
최장관의 그 말은 곧 벤자민 리(이휘소)가 자기보다 더 유망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요?"
박대통령은 이휘소에 대하여 바짝 관심의 끈을 당기기 시작했다.
"2년전 나사(NASA)에서 유인 인공위성을 발사했을 때 최종 이론 점검은 벤자민 리가 하였습니다. 그때 벤자민 리가 이론의 문제를 제기하여 두 번이나 연기했었죠."
"그래요. 대단하군요. 만약 우리가 그 분을 모셔 온다면 핵무기 개발은 어떨까요?"
"핵무기요?"
최장관은 박대통령의 핵무기 개발이란 말에 깜짝 놀라고 만다. 그리고 나서 자기가 지금 청와대에 호출된 이유를 알아차리게 된다.
"벤자민 리라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
박대통령은 한동안 침묵을 한 채 검지 손가락 끝으로 그의 이마를 꾹 누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이휘소 박사......"
하며 독백으로 이휘소 박사를 세 번이나 불러보는 것이었다.
"최장관."
"네."
"김실장과 함께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과학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보세요."
"네, 시행하겠습니다."

그날 최장관은 핵무기 개발에 관한 계획을 은밀히 추진해 보라는 지시도 받았다.

"핵개발이라?... 자칫하다간 미국과 더 큰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최장관은 그런 우려를 하며 청와대를 빠져 나왔다.아무튼 박대통령의 핵개발 추진 의지에 따라 김비서실장은 며칠 후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재미 한국과학협회를 찾아가 한국의 과학 발전에 협조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그 영향으로 미국의 과학자들 중 상당수가 귀국하여 침체 상태에 놓인 KIST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한다.그런데 한국의 은밀한 핵개발 추진 정보가 미국에 흘러들어가 미국을 경악케 하고 만다. 미국은 그토록 중요한 문제를 미국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박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데 대하여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게 된다.사실 한국이 핵을 개발할 경우 핵확산금지원칙에 위배됨은 둘째 이야기이고, 미.소.일.중 등 4개 국가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략계획에까지 수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그러나 박대통령은 미국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오히려 멍군을 부르고 있었다.

"미국은 자기 멋대로 주한 미군을 철수하면서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핵을 개발하겠다는 데도 불만이야."

박대통령의 그런 멍군이 빈번할수록 미국은 한국인 핵물리학자들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이휘소 박사에 대해서는 그가 해외 여행이나 공식적인 세미나에 참석하여도 꼭 감시자가 뒤따랐다.

한편, 박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한 후 국내외적으로 그것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도 핵개발 집념과 이휘소 박사의 면담 계획에 대해서만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1974년 이휘소 박사가 페르미연구소 물리학부장 겸 시카고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잠시 귀국한 적이 있었다.이때 박대통령은 측근을 통해 조만간 이휘소 박사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보라면서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하는 것이었다.

"이박사가 핵개발에 도움을 주겠다면 한국군 60만대군 전원을 이박사 경호원으로 쓸텐데......"

박대통령의 그와 같은 독백은 곧 핵개발 추진에 대한 강한 의지나 다름없었다.고국을 방문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이휘소 박사는 감당키 어려운 갈등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다.박대통령의 독자적인 핵개발 추진 의지와 그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는 미국 정부 사이에 이휘소 자신이 꼭 끼어버리고 말았다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군사력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38선 이북 쪽이 훨씬 우세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전선을 그어놓고 팽팽히 맞서 온 것은 미군의 주둔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미군이 철군해 버린다면 한국은 그 순간부터 북한과의 전쟁 게임에서 여지없이 참패를 당하고 말 것임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어떠한 형태로든 박대통령을 도와야함이 이휘소 박사의 도리가 아닌가.그러나 핵개발 문제에 대해서만은 신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1975년초 박대통령이 비밀리에 유도탄시험 발사를 하였는데, 그게 4km에서 터지고 말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휘소 박사는 비참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박대통령의 그 집념에 탄복도 하였지만, 한국인의 무기 개발 실력이 그 정도로 형편없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1976년 카터는 주한 미군 완전 철수를 선거 공약으로 압도적인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 일은 미국 측에서는 대환영의 이슈(issue)였지만 한국 측으로서는 초상집의 분위기보다 더 서글프고 암담한 일이었다.

대통령이 된 카터는 주한 미군 철수 외에도 <박정희는 도덕적으로 결여된 인물>이니 <인권탄압의 대통령>이니 하면서 인신공격 내지는 한국에 대하여 내정 간섭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2년전 포드 정부가 박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 중단을 조건으로 3만8천명 주한 미군 철군 동결과 4∼5억 달러의 군현대화 계획 및 경제원조를 약속한 바 있었는데, 카터는 이 약속을 파기하겠다는 것이었다.신문에서 그 보도를 접한 이휘소 박사는 눈을 꼭 감았다.내 조국 한국이 과연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카터. 무서운 대통령이야. 미국인의 특유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표본 인물이나 다름없었다.한편, 박대통령은 카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하루도 마음이 편해본 날이 없었다. 주한 미군 철수를 하겠다는 카터의 으름장, 인권 탄압을 중지하라는 정치적 압력 등, 참으로 인내하기 힘든 주문에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박대통령은 참다 못해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하여 UPI와 AFP통신 기자들과 만나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겼다.

"저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솔직히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기까지 주한 미군이 현수준으로 남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대한민국의 그런 희망을 거부하고 주한 미군을 철수한다면 구걸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인터뷰 기사는 국내외의 신문 방송을 통하여 퍼져 나갔다. 특히 '철수한다면 구걸하지 않겠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것을 이해하는 각도에 따라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한국 측에서는 대단한 결단이라며 이제부터 한국인은 한국인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살아가야 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라고 했고, 미국 측에서는 한마디로 괘씸한 발언이라며 노발대발했었다.핵개발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박대통령은 당시 신문협회, 방송협회장단과의 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은 소신을 피력했다.

"한국은 핵개발을 할 의사가 없다. 그러나 미국에서 핵을 완전히 철수시키면서 핵개발을 하지 말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라는 논리로 핵개발의 의사를 강력히 표명하고 나섰다. 박대통령의 그 발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당시 피터 헤이즈는 그의 보고서에서 '박대통령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했고 핵무기를 갖지 않는다고 약속했으나, 이런 약속에도 불구하고 78년까지 자체 핵무기 보유 계획을 세우고 있다.'라고 밝힌 바 있었다.이휘소 박사는 이런 일련의 사항들을 모조리 스크랩했다.어떤 흥미거리가 있어서 스크랩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모두가 조국 한국의 운명과도 직결된 문제들이기 때문이었다.

1977년 1월 20일, 카터는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자 제일 먼저 한국에 배치한 유도탄 부대를 철수시켰다. 한국 정부에 한마디 통고도 없이, 한국 정부의 간절한 요청마저 무자비하게 무시한 채 철수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2월에는 지상군 1만7천명도 한국 정부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또 철수했다.이휘소 박사는 카터의 행동에 대하여 반발하고 나서는 박대통령의 괴로운 심정을 전해 들었다.

"미국은 자기들 이해 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구걸의 시대도 지났고, 의존의 시대도 지났다. 이제 악몽의 시대에서 벗어나 우리나 우리 후손이 살 시점에 와 있다. 책임은 크고 할 일은 많다."

박대통령의 그 심정을 전해들은 이휘소 박사의 가슴은 그저 갈기갈기 찢어질 지경이었다.이휘소 박사는 미국 정부가 신임하는 과학자 프레이저 박사, 양진녕 박사, 톨 박사, 살람 박사 등을 만나 주한미군 철수 반대에 협조해 달라고 일일이 만나 부탁했다. 그런 가운데 이휘소 박사는 페르미연구소에서 핵연구에 더욱 열중했다. 세계 여론은 76년 아니면 77년도의 노벨물리학상은 이휘소 박사가 수상할 것이라고 했다.1977년 3월 20일, 이휘소 박사는 페르미연구소를 방문한 어떤 사람 편으로 박대통령의 친서 한 통을 전달받았다. 고급 화선지에 작은 붓으로 정성스럽게 쓴 박대통령의 필적 편지를 받은 이휘소 박사는 고압 전기에 감전되듯 전신이 꿈틀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휘소 박사 혜람

이휘소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그 동안 박사님의 소식은 이곳에서도 자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본인이 선포한 유신에 반대한 것 때문에 저대로 많은 고민도 했습니다.본인은 언제까지나 대통령직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본인이 대통령직을 그만 두느냐 계속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것이 국방에 달렸다고 사료됩니다. 지금 나라는 어지럽고, 국방은 허술하고 언제 공산화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내놓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이박사도 아시다시피 우리 정부에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이미 미군 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사일 부대는 이미 철수를 끝낸 단계이고 1만7천명이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월남에서와 같이 공산화되어도 좋다는 전제의 신호이기도 합니다.<중략>

이박사도 아시다시피 본인이나 한국정부가 요구해서 들어줄 단계도 이미 지났습니다. 가능성도 없는 구걸 행각으로 국가의 이미지만 손상을 입히는 추한 모습을 또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때가 오리라는 생각으로 박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독자적으로 유도탄 개발과......<중략>

그러나 지금, 조국은 위태로워졌고 사정은 급박하여졌습니다. 이미 카터와의 싸움은 시작되었고, 여기서 비굴하지 않게 승리해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비굴한 기운만 보이면 깔고 뭉개는 묘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이제는 의존 시대에 종막을 고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우리 자체가 독자적으로 미사일개발, 핵무기개발, 인공위성개발까지 해서 감히 누구도 우리를 넘볼 수 없도록 해야겠습니다.다시는 6.25의 쓰라린 경험 같은 것은 맛보지 않게, 우리 백성들이 전쟁으로 살상되는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이박사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중략>

그 동안 재미물리학자들의 협력을 얻어 미사일개발부터 서둘렀고 또 시험도 해보았지만 하나같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지금도 이박사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박사님의 처한 위치가 어떠한지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께서도 조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눈뜨고 보고만 계시지만은 아니할 것입니다.이박사님께서 조국을 위해, 한번 일어서 주십시오.

1977년 3월 18일
대한민국대통령 박정희 배상



박대통령의 참담한 내용이 솔직하게 적혀진 편지를 다 읽고 난 이휘소 박사는 온종일 서글프기만 하였다. 괜히 눈물이 흘러 내렸고, 눈물을 닦고나면 또 편지 사연이 떠올라 자신의 서글픈 심경을 달랠 수가 없었다.조국, 내가 태어난 조국, 나의 부모 형제, 친구들이 버젓이 살고 있는 한국이 단지 힘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하고,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공산화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조국이 있으매 내가 있었고, 나는 곧 조국의 떳떳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그러나 현실은 이휘소를 그런 애국자가 되도록 길을 열어 놓고 있지 않았다. 미국의 치밀한 감시는 이휘소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한하고 있었다.20여 일이 채 안돼서 이휘소 박사는 박대통령으로부터 또 편지를 전해 받았다. 편지 사연인즉 한국은 지금 미군이 철수해 버려 위기의 궁지에 몰려 있으니 당장 한국에 돌아와 핵개발에 참여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였다.그날밤 이휘소 박사는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박대통령의 그 간절한 호소에 감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스케줄 메모를 살펴보았다. 4월 28일 하버드 대학 특강, 5월 20일 동경대학술회...... 이휘소 박사는 어려운 결심을 하듯 5월 20일 스케줄에 빨강 매직펜으로 동그라미를 굵게 그렸다.그런데 그러한 결심의 스케줄이 얼마 후에 의문의 죽음으로 이어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의문사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휘소 박사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동경대 학술회의 참가를 결심하고 나서부터 의문사를 당하기까지의 정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추측과 추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5월 20일 동경대 학술회 관계로 전날 동경에 도착한 이휘소 박사는 청와대로 <5월 21일 PM11 나리따 공항 대기>라는 전문을 쳤다. 동경대 학술회는 5월 20일 예정대로 끝났고, 다음날 이휘소 박사는 나리따 공항으로 달려가 대기중인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KAL 비행기에 올랐다. KAL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이휘소 박사는 곧바로 청와대로 안내되었다.


박대통령과 이휘소 박사는 장시간에 걸쳐 한국의 현안문제를 의논하였고 박대통령이 제시한 핵개발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그런데 이게 무슨 비보인가. 미국으로 돌아간 지 불과 이십 며칠만에 사망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대통령은 이휘소 박사의 사망에 대해서 더욱 믿지 않았다.특히 교통사고 사망이란 점에 대해서 그러했다.아무튼 이휘소의 사망은 미 정부가 발표한 대로 교통사고다. 그러니까, 1977년 6월 16일 미국 시카고의 교외 고속도로에서 중앙 분리대를 넘은 트레일러가 마침 승용차에 타고 있던 이휘소 박사의 가족을 덮쳤다. 운전대에 앉은 이휘소 박사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부인 마리안 여사와 두 자녀는 경상을 입었다. 이런 사고 경위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이휘소 발사의 사인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그런 가운데 그가 몸담아 왔던 페르미연구소에서 수백 명의 조문객에 의하여 장례식이 치러졌다. 박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그간의 이휘소 박사에 대한 애국심을 알린 뒤 훈장을 추서토록 지시하였다.1977년 8월 24일 박대통령은 이휘소 박사의 어머니 박순희 여사를 통하여 그가 발휘한 한국인 정신은 길이 받들겠노라는 뜻이 담긴 국민훈장동백장을 전달하였다.
"정말 훌륭하신 분이었는데. 한국인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 주신 과학자였는데......"

그날 박대통령은 박여사의 손을 꼭 붙잡고 그 말만 되풀이하였다. 더이상 긴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눈물이 와락 와락 쏟아졌기 때문이다. 박대통령의 손수건은 아까부터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이휘소의 죽음과 함께 박대통령의 핵개발에 대한 의지도 사그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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