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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이것저것

여순사건의 배경

by 구석구석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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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만에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2021년 제정]

여순사건의 배경 - 전남 동부지방의 시대적 상황과 여순사건의 배경

전남 동부지방 (특히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곡성)은 46년 10월의 ‘추수봉기’기간동안 전남의 중·서부 지방과는 달리 경찰, 지방관리, 지주에 대한 습격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전남의 동부지방 경우엔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긴장, 대립관계 속에서도 공존할 수 있었던 지방정치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전남 동부지방은 당시의 중앙인 광주로부터 떨어진 지리적 위치 등으로 1946년 추수봉기권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고, 그러한 지리적 여건과 더불어 전남 동부지방의 ‘인민위원회’는 전반적으로 구성인원의 과거경력, 직업적 출신배경, 정치적 성향이 매우 다양, 복잡하고 좌·우익이 타지방과는 달리 공존한 상태였다.

1945년 8월 20일 결성된 ‘여수건준’의 경우는 위원장이 우익계 인사였으며 군청을 접수하지 않고 진남관에 본부를 두고 업무수행을 하였으며, 치안대도 경찰서에 접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순천건준’의 경우는 여수건준과는 대조적으로 좌·우익간의 갈등이 빈번했던 지역이었다. 순천건준은 좌익측을 배제한채 우익인사로 의해 전격적으로 결성하였다. 이 지역은 우익세력과 좌익세력이 만만치 않아 갈등이 빈번하였다. ‘광양건준`과 `곡성건준`은 좌우합작에 의해 결성되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광양이 좌익세력의 우세지역이었다면 나머지는 우익세력이 우세하였고 좌·우세력의 갈등이 빈번한 지역은 순천이었고 나머지는 평온한 공존관계였다.

그러나 1948년 초까지 지속되었던 전남 동부지방의 좌·우익간 공존관계도 48년 봄을 기점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인플레이션, 강제적인 미곡공출등으로 민중의 삶은 극도로 악화되어가고 있었고, 동시에 ‘2·7 구국투쟁’과 ‘5·10 선거저지투쟁’따위의 소위 ‘단선단정부반대투쟁’의 바람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46년 추수봉기권에 들지 않았던 전남동부지방에서도 단선저지투쟁이 확산되어 갔다. 순천의 경우가 가장 빈번히 나타난 지역이었다. 바로 이 무렵 단선단정부반대투쟁이 절정에 달했으며 동시에 춘궁기까지 겹치는 1948년 5월초에 여수에 14연대가 창설되었다. 여수 제 14연대는 ‘5·10 선거저지투쟁’과정에서 경찰의 추적을 받는 전남의 좌익들과 가난에 쫓기는 실업자들의 은신처였으며, 물론 남로당의 당지도부도 이들을 조직적으로 침투시키고 있던 터였다.

이러한 부대내의 좌익극렬분자들은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 지창수 상사 등을 중심으로 행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때마침 제주도 폭동의 진압을 위하여 제14연대의 1개 대대가 출동명령을 받게 되자 그 준비로 부대 전체가 바쁜 틈을 이용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언론보도

광 주 일보        1988년 12월 9일

--여수시민들 "여.순반란사건"개칭운동--

반도의 오명40년 이젠 벗자

(여수.순천) 여수시민과 사회단체들이 40년전 군부대가 일으킨 반란사건이 교과서와 역사책에 '여순반란사건'으로 기록돼 마치 여수 순천 시민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오인되고 있다며 명칭 변경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시민운동에 나섰다. 이같은 범시민운동은 여수문화원(원장 문정인)과 여수청년회의소 회원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이들은 당시의 진상과 시민운동의 취지를 담은 책자를 제작 배포하기로 했다. 또 인근 피해 지역인 순천에서도 같은 운동을 전개할 움직임이다.

{여.순 반란사건}은 지난 1948년 10월 19일은 여수 지역에 주둔하기 위해 제14연대의 창설 요원으로 차출된 1개 대대 병력 가운데 일부 좌익 군인들이 동료들을 선동 반란을 일으켜 여수 순천을 7일간 죽음의 도시로 만들고 구례, 광양 까지 확산됐던 사건이다. 당시 이 반란사건으로 여수에서만도 남녀학생과 상공업계인사, 문인, 시민 등 무려 1천여명이 학살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군내부 좌익분자 폭동사건}으로 기록돼야 하는 데도 {좌익군인} 이라는 표시도 없이 단순히 {여.순 반란사건}으로 호칭됨으로 4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시민의 반란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다는 것.

소설가 김승옥씨 (순천 출신)는 {국민학교 시절이 반란사건으로 무수한 이웃들이 시체가 돼 학교운동장에 널려 있는 것을 보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받기도 했다} 며 {그 이후 성장기에도 이 사건 명칭이 바꿔지지 않아 받아야 했던 정신적 고통이 많았다}고 말해 오랜 세월 동안 이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이 컸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 전남대 이상구 교수(사학)는 {사건을 날짜나 주동자 중심으로 표기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 사건의 경우는 피해 지역을 사건명으로 표시해 잘못 인식될 우려가 있었다} 며 {잘못된 역사는 당연히 고쳐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교수는 또 {학문이 정치로 부터 독자성이 이루어지지 않아 해방이후의 각종 사건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다}며 {이 기회에 국민대중 중심사관에서 역사를 재조명 진실추구와 함께 정확한 개념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무 등 일 보        1992년 2월 12일

 --여.순사건 14연대 반란사건으로--

여수.여천. 순천 문화원 서명 운동 전개

[여순 반란사건을 제14연대 반란사건으로 바로잡자]

여수.여천.순천 시민들이 1948년 일부군대 세력에 의해 주도된 반란사건의 명칭을 바로 잡고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대대적인 서명운동에 나섰다.

여순 사건은 당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의 좌익군인들이 일으켰음에도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 국사교과사와 각종 공문서에는 모두 [여순 반란사건]으로 기록돼 여수.순천 지역민들이 모두 폭동에 가담했던 것으로 오인되고 있는 것.

이에 대해 여수.여천.순천 3개 문화원에서는 지역사 바로잡기 운동을 전개키로 결의 지난해 12월에 3개 문화원 연석회의를 열고 사업의 방향을 결정한 뒤 2월부터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현재 2백여명이 서명했는데 1차적으로 3만명 서명운동이 끝나면 전남도 교육위원회를 통해 정부측에 개명을 정식 탄원할 방침이다.

이들 지역민들이 이렇게 지역사 바로잡기에 나서고 있는 이유는 반란의 동기와 경위가 확실한데도 마치 지역민의 반란사건으로 명명되고 있는 그릇된 사실을 후대에 남기지 않겠다는 취지에서비롯된 것

1948년 10월 20일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은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이 내재하고 있던 당시의 국내 여건속에서 여수 제14연대에 소속한 좌익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시민들을 선동했던 것으로 반란의 시작이 시민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제14연대 반란군의 강압과 살륙, 그리고 진압군의 무자비한 진압과 반군 처단 과정에서 여수시민은 1천2백여명, 순천 시민은 1천1백50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좌익과 우익의 대립에 대한 후유증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일부 시민들은 아직도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기를 꺼려하며 일체의 사건에 대해 함구하고 있을 정도이다.

여수.순천 지역의 이 같은 역사 바로잡기 움직임은 지방자치 시대를 맞아 지역사를 지역민의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운동의 시작으로 관심이 되고 있다.

/ 백 형모기자

 

조 선 일 보        1992년 2월 15일

 --[여.순반란] 명칭 빨리 고쳐라 --

[14연대 반란] 양민에 오명씌워

교과서 - 공문서 등 개칭 필수적

여수반도와 순천 및 동부6군의 시군민들은 지금으로부터 44년전인 1948년 10월 20일 고요한 새벽의 정적을 깨는 몇방의 총소리로 부터 시작되어 약 1주일 만에 끝난 불행하고 참혹한 사건으로 인해 학생 및 청장년 6천여명이 학살당했다. 여수의 중심 문화재와 기록문화를 몽땅 잃고 말았다.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에 의하여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군이 잘못된 정보를 입수, 반란군이 이미 빠져 나가고 없는 시가지를 향하여 무차별 함포사격과 반란군을 색출한다는 명몫으로 전 시민을 4개 학교 운동장에 감금시킨 다음 시가지를 불태워 버렸다.

뒤에야 과잉진압이었음을 간파한 국방부는 사건의 책임을 시군민에 덮어 쒸우기 위해 반란군이 학살한 여수, 여천 시 군민은 18명 정도이고 교전중 사망한 경찰이 75명인데도 진압군이 학살한 시군민 1천2백명(사실은 배로 추정)을 반란군이 학살했고 시가지를 불태웠으며 진압군은 한사람도 안죽였다고 전사에 기록했다.

또 학생들이 오빠, 아저씨 하면서 진압군을 사살한 것처럼 기록하면서 진압군을 사살한 것처럼 기록하여 모든 책임을 여수 시군민들에게 돌렸으며 사건의 이름마저도 [여순반란사건]으로 규정했다. 이에따라 여수와 순천의 시군민들이 반정부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오도 전달됐고 이고장의 젊은층마저 그렇게 알고 있다.

사건 이름의 재조명을 하는 것은 과거를 들추자는 뜻이 아니고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생긴 불행하고 참담한 희생자요 피해자인 시군민들에게 꺼꾸로 뒤집어 씌워진 오명을 벗기기 위한 것이다.

하루속히 교과서, 공문서, 신문, 방송 등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여순반란사건]이라는 명칭대신 [14연대반란]이라고 개칭할 것을 주장한다.

일본에 대해 왜곡한 역사를 바로잡으라고 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바로 기술해 여순 시군민이 반세기 동안이나 앓고 있는 한의 병을 치유해 주기 바란다.


여순반란(麗順反亂)의 재현(再現)과 폭력(暴力)

 

재현(再現), 폭력(暴力), 텍스트(Text)

여순반란(反亂, 1948.10.19-10.25)은 사건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이후의 일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남한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즉 여순반란의 대응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자신을 급속히 ‘국방국가’로 전화시켰고, 이것은 이후 현대 남한 및 한반도전체의 역사진행의 기본적 틀로 작용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여순반란의 재현과정 속에서 민족 이익의 옹호자로 자신을 형상화하면서, 자신의 통치와 권위의 정당화(legitimation)와 나아가 자신의 근대민족국가성 획득에 여순반란을 전용(轉用)하였다.

여순반란의 역사적 위치에 유념하면서 본 논문은 대한민국과 여순반란에 대한 문화적 접근의 일환으로서 대한민국은 여순반란 직후 그 사건을 어떻게 재현하였는가를 다루고자 한다. 특히, 본 논문은 여순사건의 진행과정에서 발생한 인명손실이 당시의 신문과 기타의 것에서 어떻게 재현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명 손실 또는 폭력은 여순사건 발생 당시부터 그 사건의 공식적 재현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온 주요한 레퍼토리, 즉 “폭력(暴力)과 학살(虐殺), 파괴(破壞)와 폐허(廢墟), 그리고 대한민국(大韓民國)에 대(對)한 반란(叛亂)”의 하나를 이루어 왔다. 그렇다면, 왜 폭력․학살은 주요 레파토리의 하나가 되었는가? 또 무엇이 다종다양한 ‘잔혹행위들’이 동시대의 신문 지면을 위를 차고 넘치게 했던가? 이러한 질문에 본 논문은 답하고자 한다. 이러한 난문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먼저 ‘폭력’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자.

폭력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물리적(物理的) 침해(侵害), 내지는 위해(危害)를 가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폭력이 인간의 신체를 대상으로 한 행위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폭력이 물리적 행위인 한, 그것의 실행은 리치스(Riches)가 주장하듯이 “분명하게 감각(感覺)될 수 있”는, 즉 사람의 눈이나 코, 손으로 쉽게 포착(捕捉)되고 확인(確認)될 수 있다. ‘폭력’의 이러한 성질은 ‘폭력호명(呼名)의 정치학’을 발생시킨다. 즉, 오랫동안 받아들여왔던 ‘전근대/근대’ 담론에 따르면, ‘근대’는 ‘신(神)중심’이나 ‘신분중심’의 전근대와 대비되면서, 근대의 지표가 ‘인간중심’(humanism)에서 구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위해, 즉 폭력은 ‘전근대적인’ 행위로, 폭력에 의존한 정치체는 ‘전근대적’ 내지는 ‘(반)봉건적’ 권력으로 정의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의 시대”인 근대에 있어서, 모든 추상적인 인간은 민족적 존재로 상상되어진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폭력은 구체적인 시․공간에서는 민족적 존재에 대한 위해로 현상되어진다. 이러한 근대적 담론과 상상에서는, 폭력이라 규정된 행위나 사상(事象)은 기본적으로 인간애적, 민족적 정당성(legitimacy)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어떠한 정치적 분쟁의 일(一)당사자가 상대방의 행위를 폭력으로, 상대방을 폭력의 행사자로 규정하고, 이러한 규정을 제삼자에게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당사자에게 커다란 정치적 자산을 부여한다. 즉, 상대방의 행위를 ‘반인간적,’ ‘반근대적,’ ‘반민족적’ 행위로, 자신의 행위를 ‘인간적’ ‘근대적’ ‘민족적’ 행위로 정당화하고, 나아가 상대방의 존재를 부인하는 반면에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이, 폭력이 존재와 행위의 정당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체의 손상을 수반한 분쟁 내지는 사회적 사상(事象)이 발생할 때마다, 관련당사자는 그것을 폭력으로 정의하고, 동시에 상대방을 폭력행위자로 지명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근대역사에서 물리적 힘을 동반했던 갈등은 항상 행위의 폭력성여부와 폭력의 가해자의 규명을 둘러싸고, 분쟁당사자간 경쟁을 수반해 왔다.’ 이러한 것은 여순반란(麗順反亂)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점에 주목해서, 본 논문은 여순사건에서의 인명손실이 당시의 신문과 같은 텍스트에서 어떻게 폭력으로, 또 어떠한 성격의 폭력으로 재현(再現)되었는가, 또 그 과정에서 어떠한 전략이 구사되고 있는가를 추적하고자 한다.

앞의 목적 하에서, 본 논문은 여순사건 직후 대중적으로 유포된 활자자료와 시각 자료를 텍스트(text)로 다루도록 하겠다. 대중적으로 유포되고 소비된 신문 등과 같은 자료들을 텍스트로 한 것은 본 논문이 무엇보다도 대중적 차원에서 여순반란이 어떻게, 어떠한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텍스트는 단순한 기록물, 즉 사상(事象)의 그대로의 반영물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에서 재현된 것은 실재 발생했던 것과는 관계가 멀다. 아니, 사이드(Said)의 주장에 따르면, 재현된 것과 그것의 사실성 여부는 전연 별개의 차원이다. 즉, 일정한 권력관계 하에서 생산되어진 텍스트는 그것이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텍스트 소비자의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여, 텍스트 생산자와 소비자의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텍스트는 발생했던 일과는 다른 것을 생산하면서, 그것 자체가 하나의 ‘실재’로 존재한다. 텍스트가 지닌 이러한 성격에 주목해서 본 논문은 텍스트 그 자체를 하나의 ‘역사적 사건(event)’로 취급하여, 텍스트의 재현전략과 그것을 낳은 맥락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도록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주(主)텍스트로 다루고 있는 신문은 그 자체가 특정 이데올로기의 생산자이자 전파자로서 존재한다. 즉, 파라다(Parada)가 이야기하듯이, 신문은 “진위여부에 상관없이 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무수한 세계적, 민족적, 그리고 지역적 사건들로부터 사실들을 선택하는 속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이데올로기를 분명히 하고 또 유포시킨다.” 또한 신문에서는 “폭팔적”으로 발생한 사건은 “다시 통제되고,” 또 “무질서한” 상황은 다시 질서가 회복되는 과정으로 “서술, 재현”(narrative representation)된다. 이는 신문의 소비자에게 모든 역사적 사건의 필연적 정돈을 암시하면서, 실제 발생한 역사적 사건에의 독자의 개입의욕을 차단하면서, 그 사건으로부터 독자를 분리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신문은 역사적 사건의 영향력을 차단한다. 뿐만 아니라, 신문은 지식의 생산자로서의 자신과 소비자로서의 독자의 관계를 주조하여, 지식을 통한 권력관계의 유지, 강화에 이바지한다. 이러한 것은 신문이 기존 권력관계의 재생산과 새로운 권력관계의 창출에 이바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장은 여순반란 당시의 남한의 신문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정부 승인 하에서 발행, 배포되었던 당시 남한신문들은 개별 언론인들의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대한민국을 절대적으로 지지하였고, 또 그것에 충심으로 복무하였다. 그래서,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당시 신문들은 여순사건을 ‘폭력과 파괴의 생지옥’을 낳은 ‘반란(叛亂)’으로 재현하는 동시에, 민족적 정통성시비에 고통 받던 대한민국의 민족국가성과 근대국가성을 현시하였다. 또한 신문들은 남한 사람들이 여순사건의 “실재”에 의해 영향 받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남한사람을 규율(規律)된 대한민국국민으로 변형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것을 고려할 때, 그때 남한 신문들은 ‘여순반란의 재현과 권력구조의 (재)생산과의 관계’의 추적이라는 본 논문의 문제의식에 유용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재현전략의 추적을 위해, 본 논문은 현지특파원과, 문인조사단의 일원이었던 박종화 등 저명 문인들의 “현지보고기사”에 보다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현지보고기사들은 보통의 “정보” 기사들보다 다양한 글쓰기전략 하에서 보다 상세한 설명을 독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현지르뽀기사들은 재현된 이미지와 주제, 그리고 동기와 재현전략을 분석하는데, 보다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에 유의하여 본 논문은 현지보고기사에 보다 커다란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러한 활자자료 뿐만 아니라, 사진과 그림 등의 시각 자료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시선”(視線, vision)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순수할 수 없다.” 오히려 푸코(Foucault)가 자신의 “일원감시망”(一元監視網, panopticism)에서 분명히 하듯이, 시선은 근대적 지배의 작동원리이다. 즉, 시선은 자신의 동기와 전략에 따른 이야기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시선의 물질적 구현물인 사진 역시 ‘사진 생산자의 관심과 가치체계의 반영물’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여기서 검토하는 시각 자료들은 정부에 의해 조직, 파견되었던 문인조사단 소속 사진가와 화가에 의해 생산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다루는 사진들은 분명한 시각화(視覺化)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자료들은 여순반란의 재현과 그것의 전략을 다루고자 하는 본 논문의 유용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수량(數量)적 재현(再現)

여순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처음부터, 대한민국 당국은 여순사건의 폭력상(相)을 열거하면서 그 폭력성(性)을 강조하고 나섰다. 여순반란의 폭력상․성을 구축(構築)하고자, 당국은 여순반란의 폭력성을 양적(量的)인 측면에서 접근, 폭력상을 재현(再現)하고 있었다. 당국의 첫 번째 여순사건 보고에서 국무총리 이범석은 수십명의 장교와 현장의 반수 이상의 경창관, “양민”들과 청년들이 인민재판에서 살해되었음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수십명”과 같은 추정치를 사용하여 희생자의 규모를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당시 여수와 순천이 “반란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대한민국 당국이 반란의 구체적 진행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무총리 공식성명의 격에 어울리지 않게 추정치를 발표하였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반란 발발의 초기부터 대한민국정부가 여순반란을 ‘살육’의 현장으로 재현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은 앞에서 이야기한 ‘폭력호명의 정치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살육의 현장으로서의 여순반란 재현은 여순반란을 낳은 ‘복잡한 역사적․사회적 상황’과 반란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사건들을 단지 ‘하나의 폭력적인 사건’으로, 아니 ‘폭력’으로 환치시켜, 여순반란의 역사․사회적 의미를 탈각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무총리의 재현작업은 그것의 조악성으로 말미암아 텍스트로서 치명적인 제한점을 안고 있었다. 하나의 기록물이 인간 행위와 인식의 내용을 규정하는 힘을 가진 텍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기록물이 그것이 묘사 내지 설명하는 대상의 실재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야 하고, 또한 기록물의 소비자에 의해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러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추정치에 의거한 재현은 텍스트로서의 권위를 행사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추정치에 의거한, 폭력상의 조악(粗惡)한 재현은 대한민국 ‘정부군’의 순천 진주(10월 22일)라는 상황전개에 따라 곧 극복되게 된다. 순천에 들어간 합동통신사의 현지특파원은 “기자 현지답사”라는 형식으로 일견 정확한 듯이 보이는 수치를 제공하면서, 일층 더 정교하게 여순반란의 폭력상을 양적으로 재현한다.

시내에 들어가 한 때 반란군의 인민재판소로 되었다는 경찰서 정문을 들어서자 차마 바라 볼 수 없는 정복 경관의 시체는 무려 50여명이나 눈에 띠고 시내 이곳저곳에는 2일간의 격렬한 격전을 말하는 듯이 무수한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인민재판소를 설치하는 한편 그들 청년학생들의 안내로 각 관공리 及 경찰가족 우익정당, 청년단체를 모조리 검거하여 인민재판소에 부치었다고 하는데 검거된 사람은 무려 4백여명에 달한다고 한다...기자가 들은 인명피해 상황을 나열하면.....9백여 명에 달하리라고 한다. (강조 필자)

이 “현지답사”는 수치를 동원하여 재현의 객관성을 부여하여, 앞서의 조악성을 극복하면서, 재현의 진실성을 입증하려 하고 있다.

앞의 재현이 구체적인 숫자를 동원하였다면, 이러한 ‘정치적 산술(算術)’은 다시 한번 통계의 동원에 의해 일층 발전하게 되면서, 수량을 중심으로 한 ‘수량(數量)적 재현’은 정점에 도달한다. 한 신문은 “전남비상시국대책위원회 여순사건 피해상황 집계를 정부에 제출”이라는 표제의 기사를 싣는다. “집계(集計)”는, “주택피해”와 여타의 물질적 “손해”와 함께 “인명 피해”를 항목화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 항목에는 지역별로 “사망,” “중상,” “경상,” “행방불명”이 각각 “집계”되어 “소계”와 함께 “총계”가 제시되고 있다. 통계의 동원은 “인명 피해”라는 항목에 ‘과학적인,’ ‘객관적인’ 외양(外樣)을 띄게 한다. 이러한 외양의 획득으로 말미암아, 수량적 재현전략은 객관성의 외양이 제공하는 이점을 누리게 된다. 즉, 수치에서의 사소한 교정은 허락된다하더라도 “폭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의심하거나 부정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확정’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통계술 또는 산술은 수량적 재현을 그 최고도로 발전시키면서, “인명 피해”와 “여순반란의 폭력성”을 부각시킨다. 이 과정에서 ‘여순반란(反亂)은 학살과 파괴 그 자체였다’는 ‘정치적 등식’을 안출, 독자에게 제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수량적인 재현은 그 재현전략 자체 내의 제한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즉, 재현이 보다 과학적인 외양을 띌수록, 그것은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화되면서 실제의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수량적 재현이라는 추상적인 뼈대에 살을 붙이는 구상적(具象的) 작업을 요구한다.

구상적(具象的) 재현(再現)

추상적으로 재현된 여순사건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첫 번째 작업은 재현작업에 생생(生生)한, 때로는 피빛의 색채(色彩)를 입히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은 현지 특파원과 직업적 문필작가의 “현지 르뽀”나 “현지보고”라는 형태로 수행된다. 여수에 파견된 한 특파원은 “반란군의 잔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목전(目前)에는.....새까맣게 불에 탄 소(燒)시체가 궁글궁글 볼 수 있다.....경찰서를 찾아들었다.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시체와 시체의 내음새 뿐이다. 뒷 방공굴속 뒤마당에는 5, 60개의 시체가 거퍼거퍼 산적되어 있다.”(강조, 필자) 이 신문기사는 “여수 현지보고”라는 표제를 통해, 또 “목전에,” “볼 수 있다,” “찾아들었다,” “내음새” 등의 구절을 통해 기사문의 일인칭시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보도 대상과 보도자 사이의 무매개성(無媒介性)의 암시 내지 강조는 독자들에게 보도된 내용의 사실성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그 “현지 보고”는 “새까맣게,” “궁글궁글,” “내음새,” “거퍼거퍼 산적되어” 등등의 어구 등을 통해 시각과 후각 등의 원초적인 감각에 호소하면서 ‘처참한 현지’를 형상화시키고 있다. 처참한 현지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앞의 어구의 채택은 수량 중심의, 추상적인 정보라는 뼈대에 내용물을 채워, 신문독자로 하여금 재현된 내용의 사실성을 받아들이게 하고 나아가 앞에서 언급한 ‘정치적 등식’ 즉 ‘반란=폭력’을 받아들이게끔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지 보고”가 비록 수량적 재현과 다른 기술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하더라도, 전문 작가들의 “현지 보고”에 비하면 신문기자의 그것은 아마추어의 영역을 벗어날 수는 없다. 즉, 진정한 의미의, 문자를 통한 형상화는 아직 전문 작가의 재능을 기다려야만 했다.
문인들은 ‘육하원칙’과 같은 신문기사 작성을 지배하는 직업적 원칙에 구애되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과 능숙한 언어능력 특히 ‘말의 의미가 여러 모로 쉽사리 확장될 수 있는 상징어’ 조작능력으로 여순사건의 ‘잔혹사’를 형상화하는 데 커다랗게 이바지하였다. 예컨대, ‘문학을 위한 문학’으로 유명하던 김영랑은 여순반란의 폭력성을 『동아일보』라는 대중적 담화(談話)공간(discursive space)에서 「절망(絶望)」이라는 시로 형상화했다. 입체감 있게, 그러나 다소 상투적으로 쓰여진 「절망」은 여순반란의 ‘잔혹성’을 다음과 같이 형상화한다.

죽어도 죽어도 이렇게 죽는 수도 있나이까
산채로 살을 깍기여 죽었 나이다
산채로 눈을 뽑혀 죽었나이다
칼로가 아니라 탄환으로 쏘아서 사지를 갈갈히 끊어 불태웠나이다

순수시인 영랑은 정치적인 기호로 가득찬, 읽기에도 꺼림직한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일종의 공포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즉, “현지보고”류(流)에서 나오는 “총 맞아 죽은 시체와 타죽은 시체” 식(式)의 단조로운 묘사 대신, ‘산채로 깍긴 살,’과 ‘산채로 뽑힌 눈,’ ‘갈갈히 찢겨진 사지’를 클로즈업하여 독자들의 심상(心象)에 투사(投射)하고 있다. 이러한 공포영화류의 형상화는 구상적(具相的) 재현(再現)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재현작업에 시인과 시가 참여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우리의 관심을 끈다. 문학적 저널리즘(literary journalism)을 연구한 스퍼(Spurr)는 작가의 현장성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작가가 “현장에 그 일부로 함께 있다는 것”은 작가가 “실제적으로 일어난 일과 직접적으로 조우”하면서, ‘그 외의 어떠한 정치적 고려와 이데올로기적 고려로부터 독립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위를 작가에게 부여’한다. 이러한 권위의 획득은 ‘작가와 작가의 생산물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함의와 그 이데올로기성(性)을 은폐’시킨다. 여기에서 스퍼(Spurr)는 재현작업에서 “작가의 위치”가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물론, 그의 주장이 지금 논의하고 있는 김영랑과 그의 「절망」에 문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김영랑은 “독립적인 위치”를 주장할 수 없는 여순반란의 한 당사자였다. 즉, 그는 해방공간에서 헌신적인 우익활동가였고 또 대한민국에 전심으로 충성하여 제헌의회 선거에 출마하고, 대한민국 수립이후에는 고급관리를 역임(1949.9-1950.4)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궤적으로 말미암아 그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위치”는 심각히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덧붙여, 그의 시를 공간한 『동아일보』 역시 대표적인 대한민국지지 신문이었기 때문에, 그 신문도 또 그곳에 게재된 「절망」도 ‘독립적인 위치’를 주장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김영랑은 당시 시인으로서의, 그것도 순수문학가로서의 부정할 수 없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시, 나아가 재현물(物) 일반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성격을 은폐하면서, 재현의 사실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시 말해, 순수문학가로서의 명성은 「절망」의 독자로부터 직접적으로는 그 시의, 나아가 재현작업의 이데올로기성(性)과 정치성을 은폐하면서, 재현된 것의 사실성을 주장할 수 있는 권위를 제공해 준다.

더 나아가, 시라는 문학적 형태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을 일반화시켜 재현작업을 일층 발전시킨다. 즉, 시라는 장르(genre)는 신문보도기사문과는 달리 특정 시․공간의 명기(明記)를 요구받지 않고 오히려 상징어와 같은, 다의(多義)적, 수사적 언어의 채택이 필수적인 요구이다. 이와 같은 시의 장르상 특성은 제재(題材)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인멸(湮滅)시키고, 제재를 시․공간적으로 일반화시킨다. 시가 지닌 이러한 기능 내지 속성은 「절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절망」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특정 형태의 주검에서 그것의 특정성을 지우고, 대신에 “산채로 살을 깍”긴 죽음을 여순반란에서의 죽음 일반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러한 일반화에 대해서는 이후에 보다 충분히 논의될 것이다.) 이로써, 「절망」은 신문보도기사문이나 “현지 보고”보다도 더 한층 훌륭하게 여순반란의 역사성을 탈각시키고, 여순반란을 폭력 그 자체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전환은 ‘만일 반란(反亂)이 일어난다면, 야수적 행위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것이다’라고 독자에게 암시하고 또 협박한다. 그리하여, 앞의 전환은 재현작업의 궁극적 목표, 즉 대중에 대한 규율적 지식(disciplinary knowledge) 생산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시가 상징어에 의존하는 한, 시를 통한 재현은 사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의심될 수밖에 없는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재현작업은 사실성의 고취에 있어 지극히 효과적인 사진의 도움은 받는다.

문자를 통한 형상화 작업의 속편 즉 시각적 형상화의 주제(leitimotif)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시각적 재현작업을 추적하기 위해 1949년에 발행된 전국문화단체총연맹의 『반란과 민족의 각오』(문진문화사)에 수록된 사진과 그림을 읽어보도록 하자. 전체 24장의 사진과 그림 중 8장이 직․간접적으로 폭력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 표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천인공로할 학살된 경관의 시체” (23쪽), (2) “학살당한 양민의 시체들” (23쪽), (3) “반도의 야수적 만행에 희생된 양민” (24쪽), (4) “부모도 집도 다아 잃고 실신한 듯 외로이 앉아 있는 소년” (21쪽), (5) “가족 잃고 울고 섰는 부녀자” (24쪽), (6) “남편을 찾어 울고 섯는 량민의 부인” (25쪽), (7) “구사일생의 동지끼리의 상봉” (28쪽), (8) “폭학한 반도의 이 만행을 보라” (25쪽). (*원자료 그대로 표기)

열거된 표제들에서 쉽게 확인되듯이, 이 사진들은 ‘학살당한 양민과 그 가족들의 비통’을 주제로 하여, “폭학한 반도의 이 만행을 보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러한 영상물들은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바 있는 재현전략, 즉, 사진 (1), (2), (6)에서의 수량적 재현전략과 사진 (1), (3), (7), (8)에서의 구상적 재현전략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앞 사진들 중 생존자들의 환희를 보여주는 사진 (7) 역시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므로 구상적 재현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앞의 사진들은 재현 전략에 따라 카메라 촬영 각도와 화면 초점이 달라지고 있었다. 수량적 접근의 사진은 초점을 흐리게 하면서 광폭의 빗각 촬영법을 채용하여, 개별 희생자의 신원파악을 불가능하게 하면서도 가능한 한 많은 “희생자들”들을 독자들의 심중(心中)에 투사(投射)하고 있다 (사진 I). 반면에 구상적 접근의 사진은 하나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개별 “희생자”에게 가해진 잔혹행위를 보여주고자 근접촬영법을 채택하고 있다 (사진 II). 이러한 정치적 사진술은 문자를 통한 재현이 가지는 문제점, 즉 사실성 여부가 끊임없이 독자에 의해 의심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을 극복하게 한다. 즉 사진은 재현작업에 대한 독자의 의심을 일축하고 재현의 사실성을 실증할 수 있게 해 준다.

동시에, 사진을 통한 재현은 재현물의 소비자를, 달리 말해 재현작업의 수용대상을 확대할 수 있게 해준다. 즉, 문자를 통한 재현은 사진을 통한 것보다 덜 ‘직각적’(直覺的)이고, 또한 문자적 재현물의 소비는 대중의 문자해독능력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한국의 높은 문맹율과 반문맹률을 고려할 때 문자를 통한 재현은 수용자층의 범위를 축소시킬 수 있다. 반면에, 사진을 통한 재현은 문자의 매개 대신에, 시각이라는 직접적 감각에 호소하여 ‘잔혹상’을 보다 많은 동시대인들의 시각에, 심중(心中)에 재현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진을 통한 재현은 여순반란의 폭력상을 시각적 이미지로 전화케 해 하고, 동시에 그러한 이미지의 수용층을 확대한다.

지금까지 수량적 재현과 구상적 재현이라는 재현전략에 대해서 논의하였는데, 지금부터는 논의를 보다 진전시키기 위해 잠시 당시 일반 남한 사람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의식과 여순반란 전후시기에서의 동향을 소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앞에서 대한민국이 여순반란을 폭력 그 자체로 등식화시키려는 노력을 추적하였다. 이러한 것은 기본적으로 여순반란의 역사사회적 의미를 탈각시키려는 노력이자, 동시에 여순반란의 주도자와 참가자를 폭력의 행사자로 규정짓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 안녕(安寧)의 보장자로서 대한민국을 형상화해 대한민국의 근대국가성을 현시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양당사자 즉 대한민국과 여순반란의 참가자 이외의 ‘제3자’ 즉, 일반 남한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재현작업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아젠다(agenda)에 동의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은 이론상의 것에 머물거나 아니면 제한적 일수 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폭력의 재현과 폭력 가해자의 규명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대한민국의 재현작업에 남한사람들이 동의하도록 할 조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은 당시의 상황, 특히 일반 사람들의 의식 동향 내지 그것에 대한 엘리트들의 인식에서 쉽게 간취할 수 있다. 의식 동향 내지 그것에 대한 인식은 합동통신 기자 설국환의 「반란지구 답사기」에서 잘 나타나 있다. 우선 그의 “답사기”를 읽어보자.

나는 이때 또 한가지 광경에 놀랐다. 이렇게 살벌한 공기에 싸였지만 농부들은 면화밭에서 솜을 따고 논에서 벼를 베고 밭에 거름을 나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경기가도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를 쳐다보는 농민들의 표정을 연상하고 지금 이 피비린내 나는 내란의 길가에서 이것을 쳐다보는 농민의 표정이 어떻게 그와 같을 수가 있는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나라의 이와 같은 전란은 중국이 그렇단 듯이 그들의 머리를 지나가는 상례적인 정치행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들은 군대가 지나갈 때 마침 그들이 길 위에 있게 되면 두 손을 들 줄 알면 족한 것으로 이 사태에 대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이상 이 사건에 기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무표정하였다. 우리 농촌의 민중이 이렇다는 것은 금후 어떤 정치도 이들에게 침투키 어려울 것이라는 징조같이도 보였다.

“답사기”는 “농민들의 표정”에 대한 설국환의 “놀람”을 보여주고 있다. 설국환이 본 농민들은, “피비린내 나는 내란의 길가”에서조차도 “이 사건에 기이고 싶지 않”아 하는 “무표정”의,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무표정”한 “농촌의 민중”의 존재는 재현작업의 최종적 목표, 즉 일반 남한사람들의 동의와 수용 및 내화(內化)를 근저에서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답사기”는 “농촌의 민중”에게는 “향후 어떤 정치”도, 환원하면, 대한민국의 어떠한 정치적 포섭노력도 무망(無望)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이러한 전망을 우리의 현재 논의와 연결시키면, 그 전망은 재현작업의 최종적 목표의 달성이 그리 용이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당시 농민의, 나아가 일반 남한사람들의 의식동향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상황은 대한민국이 만들어낸 여순반란이, 그 재현작업을 관통하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의제(state agenda)가 농민에게, 일반 남한사람들에게 “침투키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제현작업자들에게 일반 남한 사람들이 더 이상 “무표정”하게 있지 않도록 할 방책을 마련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에 재현작업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지금부터 논의하도록 하자.


잠재적(潛在的) 희생자(犧牲者)의 생산
대한민국은 잠재적 희생자의 생산을 통해, 자신에 의해 재현된 ‘여순반란의 폭력성’에 남한사람들이 “무표정”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전략의 잠재적이고 실제적인 힘은 대한민국 경찰의 당시 동향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당시 대한민국 경찰은 자신에 대한 대중적인 비난과 규탄, 그리고 실제 물리적 공격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은 자신의 생존과 복수에의 욕구에 사로잡혀 해방공간에서, 예컨대 1946년 10월 인민항쟁 또는 대구 10월 폭동에서, 또 제주도의 4․3항쟁 또는 4․3반란에서 일종의 결사대로서 행동했다. 마찬가지로, 여순사건의 진행과정과 진압과정에서 현지에 진주한 경찰관들은 “순천의 거리에 서로 묶이어 총살된 채 썩고 있는 동료들”을 목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금 이 진압행동에서 만일 반도를 놓치게 되면 그것은 곧 후일 다시 경찰관이 그들[반도]의 손으로 살해될 위험성을 의미한다는 직접적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열거된 사진들의 제목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살해된 경찰관의 모습은 신문과 사진 등의 매체와 기타의 방법에 의해 반복적으로 또 인상 깊게 부각되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경찰관들은 군인과 함께 “혼연일치가 되어 그들의 협심(協心) 육력(戮力)으로 국가적 사명과 직책을 충실히 수행한 결과 단시일에 이[전남사건]를 단시일에 진정시켰으며 애국적인 행동으로 이번 사건에 민심수습과 사건처리에 최대한 희생”하였다. (그들의 “희생”은 죽은 경관들이 사망군인 등과 함께 “호국 영령”이라 칭해졌을 정도였다.) 이것은 잠재적 희생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내지 현재화된 위험과 공포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적, 개인적 생존욕구는 재현작업이 잠재적 희생자 생산이라는 전략을 발전시킬 이유를 제공한다.
대중매체들은 실제의 희생자들 하나하나를 열거하여 잠재적 희생자의 생산에 착수한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의 신문의 기사는 주목할 만하다.

기자가 들은 인명피해 상황을 나열하면 반란군에게 피살당한 자는 경찰관 약 350명(감찰관 4명 포함), 철도조역 1, 차석검사 1, 경찰후원회장, 한민당 위원장, 대한노총 건설대 교관 2, 대청 부단장, 기타 관공리, 우익 청년단체 관계자, 경찰가족 급 일반민중 약 500명 포함 9백여 명에 달하리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수량적 재현물에 속하는 위의 ‘부고기사’(訃告記事)는 독자에게 피살된 자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앞의 부고기사가 개별 희생자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직업과 사회적․정치적 위치에 의거해 집단화하여 희생자를 호명(呼名)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희생자 열거의 정치적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희생자에 대한 인간적 추모의 염(念)을 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희생자를 생산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직업에 의한 희생자 호명은 가까이는 희생자와 동일한 직업과 사회적․정치적 위치의, 나아가 동일한 경제적 지위의 사람들을 위협하고 또 선동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은 “이번에는 너의 동료가 죽었고, 죽어가고 있지만, 다음은 너의 차례일 것이다. 살고자 한다면, 와서 총을 들어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간단하고 분명한, 그러나 살벌한 외침이 바로 망자(亡者) 호명이 갖는 정치적 복선이다. 이러한 망자 호명은 실제적 정치적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매거(枚擧)되어진 집단들은 대한민국이 자신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자원이었다. 예컨대, 우익청년단의 단원들은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매국적이며 멸족적인 적구(赤狗) 악마들에게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자(玆)에 선포”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앞의 집단적인 망자호명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효과를 내포하고 있다. 위에 부고기사는 주로 관리나 준(准)관리, 우익적인 청년단과 정당, 단체의 활동가들을 열거하고 있었다. 반면에, 재현작업의 최종적 대상인 “일반 민중”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일반 대중, 예컨대 노동자, 농민 등이 본격적으로 거명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호명은 재현작업물의 수용층 확대라는 점에서 볼 때, 망자호명의 효과는 다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앞의 호명방식은 호명된 집단의 정치적 충성도를 강화시킬 수 있지만, 반대로 당시에 대한민국의 가장 핵심적인 아젠다인 대한민국의 민족국가화(化)에는 부(負)의 효과를 낳을 수 있었다. 당시 적지 않은 한국사람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이 “남한단정,” “이승만정권,” “친미괴뢰정권,” “지주․자본가정권”이라고 호칭되고 있는 것에서 단적으로 들어나듯이, 대한민국의 민족국가성은 끊임없이 의심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민족국가성을 현시(顯示)해야 했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한민국은 스스로를 민족의 삶과 문화의 수호자로서, 민족이익의 옹호자로서 재현하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의 다수 구성원인 “일반 민중”보다 일부 직업계층에, 그것도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계층에 초점에 둔 호명방식은 대한민국의 민족국가성 현시에 해(害)가 될 수 있다. 즉, 그러한 방식의 호명은 오히려 대한민국의 계층성․정치성․‘도당성’(徒黨性)을 더욱 더 노출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앞의 제한점은 단순히 수용층의 확대에의 저해라는 수준을 넘어, 민족국가성의 획득이라는 대한민국의 핵심적 과제에 부정적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치적 호명의 부(負)의 효과 앞에서, 재현작업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부의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재현작업자들은 잠재적 희생자의 범위를 확장하려고 시도한다. 앞에서 우리는 김영랑의 「절망」이 특정 주검의 시․공간성을 삭제함을 통해 ‘잔학성’을 일반화시키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시가 희생자가 누구인가를 언명(言明)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잠재적 희생자=남한 사람 전체’라는 등식을 분명하게 생산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일반화의 제한점과 관련해서, 사진 등의 표제나 기타 보도기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양민”(良民)과 “일반민중”(一般 民衆)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어구들은 “관직을 갖지 않은 보통사람,” 즉 양민이나 일반민중을 잠재적 희생자에 포함시키면서, 잠재적 희생자의 규모를 확장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리하여, 재현작업에서 잠재적 희생자는 모든 남한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게 된다. 잠재적 희생자의 일반화를 통해, ‘반란은 그와 그녀만이 아니라 언제라도 바로 너를 죽일 수 있다’라고 대한민국은 일반사람들을 을러댈 언술(言述)상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하게는 잠재적 희생자의 확대는 대한민국의 민족국가성을 현시할 기초를 제공한다. 이와 관련해서, 폭력의 피해자가 일반 사람으로부터 한민족으로 전화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러한 전환은 여순반란 관련 기사 중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예컨대, 대통령 이승만은 “민족의 살상전멸(殺傷全滅)을 고취하려” 한 것으로, 국무총리 이범석은 “무고한 우리의 다수 동포를 학살”한 것으로 여순반란을 재현한다. 이로써, 폭력의 현실적, 잠재적 희생자를 개인이나 특정집단, 또 “양민”과 같은 무정형(無定形)의 일반인을 넘어 한민족으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희생자의 민족화 또는 민족의 희생자화는 재현의 초점에 비추어 볼 때 이전의 작업과는 전혀 다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전까지의 재현작업의 초점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악행” (강조, 필자) 즉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어떤 민족이건 상관없는 인간 일반에 대한 악행에 있었다. 이 점에 볼 때, 이전의 재현전략들은 ‘인류애’ 내지는 인간 일반에 대한 사랑에 호소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민족의 피해자화는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또는 그 이름 하에서 수행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류애적” 관심과 용어로 정의되어진 여순반란은 곧바로 민족 문제화되고, 따라서 반란의 진압은 민족적 급무(急務)로 전환되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접근법 모두 반란을 반(反)근대적 폭력으로, 재앙으로 재현한다. (근대의 핵심적 지표가 인간과 민족에, 그리고 인류애와 민족애에 있음을 상기하면, 앞의 진술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여순반란의 주도자와 참여자는 인류의 적으로, 민족의 반역자로, 대한민국은 인류와 민족의 옹호자로 형상화된다. 특히, 민족의 옹호자로 재현하는 것은 출범 초기의 대한민국의 시급한 국가적 과제, 즉 민족국가성의 과시에 공헌한다. 하지만, 민족의 희생자화로써 폭력과 관련한 재현작업이 끝난 것은 아니다.
폭력과 관련한 재현작업은 여순반란을 ‘친족살해’로 형상화하는 것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이것을 논의하기 전에, 잠시 민족의 희생자화에 내재한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민족의 시대인 근대에 있어, 민족이라는 것은 그 구성원의 자발적, ‘자기희생적’ 애정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본디 그 구성원이 “하나하나 모두를 알 수 없는 무수한 사람들과, 구석구석 전체를 탐방할 수 없는 땅”을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추상화한 추상체이다. 민족이 가진 이러한 추상성 때문에, 민족은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사랑”과 같이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쉽게 가지는 구체적인 감정” 내지는 애정을 그 구성원 모두에게서 불러낼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근대시기의 민족주의는 끊임없이 가족이라는 알레고리(allegory)를 통해 민족을 표현하여 민족을 구체화하는 한편 민족구성원들에게 민족애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민족의 희생자화 전략과 희생자의 일반화전략이 가지는 내재적 제한점을 암시해 준다. 즉, 민족과 일반사람이 추상적인 한, 앞의 전략들은 남한사람들에게 가족에 대해서 보이는 자기희생적 애정을 유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희생적 헌신을 유도하기 위해,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여순반란의 재현작업도 가족이라는 알레고리(allegory)를 동원한다. 가족의 동원은 많은 “현지르포”들이 구성해낸 반란현장의 “비극”에서 쉽게 확인된다. 예컨대, 『경향신문』의 한 현지 특파원은 ‘현장’을 모습을 보도하면서, “젊은 남편과 자식을 잃은 수십명의 유가족들의 통곡하는 울음소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창자를 끊게 한다”고 나레이팅(narrating)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법이 재현작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순사건에 관한 두 편의 “반공영화” 중 한편, “성벽을 뚫고”가 ‘가족의 비극’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사진가들 역시 현장사진의 초점을 ‘가족의 비극’에 맞추고 있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반란과 민족의 각오』는 “부모도 집도 다아 잃고 실신한 듯 외로이 앉아 있는 소년” (21쪽), “가족 잃고 울고 섰는 부녀자” (24쪽), “남편을 찾어 [늘어선 관들 앞에서] 울고 섯는 양민의 부인” (25쪽)라는 사진을 게재해 사진전문가들의 초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독자의 “창자를 끊”는 이러한 이야기는 그 동기가 독자의 ‘비극적 자기 정화’(catharsis)라는 미학적인 요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민군에 가담한 극렬분자 하나는 자기의 친아버지를 반동분자로서 자기 손으로 쏘아 죽였다는 쏘아 죽일 자식이 있다”고 여순반란 참여자를 친족살해죄로 소추(訴追)하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 가족의 동원은 여순반란을 친족살해의 흉악범죄로, 가족적 가치의 파괴자로, 천륜의 파괴자로, 궁극적으로는 가족 그 자체의 파괴자로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재현과 소추는 여순반란과 반란참여자들의 정당성(legitimacy)을 훼손, 말살시키는 과정이었다. 동시에 그것들은 “무표정한” 남한사람들에게 ‘너의 가족을 지키고 싶으면 반란을 규탄하고, 대한민국을 지지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가족을 폭력의 현장에 인입(引入)시켜, 대한민국에의 충성을 일반사람들에게 요구하면서, 여순반란의 재현작업은 그 정점에 도달한다.

여순반란(反亂)의 전용(轉用)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바와 같이, 남한사람들의 머리 속에 여순사건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심어주기 위해, 동시에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사실임을 실증하고 확신시키기 위해, 재현작업자들은 언어적, 시각적 재료를 의존하면서 수량적 재현과 형상적 재현 등 다양한 재현전략과 정치적 통계학과 사진술 등의 재현전술을 발전시켰다. 동시에, 잠재적 희생자를 가족화, 일반화, 민족화하면서, 여순반란을 개인과 가족, 한민족, 인간 자체에 가해진 폭력으로 전환하여 궁극적으로 그것을 반가족적, 반민족적, 반인류적, 반근대적 폭거로 등식화했다. 이러한 등식화는 실재했던 여순반란의 역사와 그것의 역사성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즉, 여순반란을 낳았던 동시에 거기에서 주장되었던 탈(脫)식민지사회(post-colonial society)의 민족적, 정치적, 사회경제적 의제(議題)들, 예컨대, 토지개혁, 친일파숙청,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 대중민주주의의 수립 등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무효화되었던 여순반란과는 달리, 여순반란과 폭력을 등식화하는 속에서 대한민국은 많은 관념상, 실질적 이득을 누리게 되었다. 즉, 앞의 등식화는 대한민국에게 여순반란 진압과 대한민국의 국가능력(state capabilities) 강화에의 인류애적인, 민족주의적인 근거와 대의를 제공했다. 보다 중요하게는, 그것은 대한민국의 인류애적, 민족주의적 존재 이유를 실증하고, 대한민국의 근대적 정당성(legitimacy)의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에게 대한민국이 근대민족국가라고 주장할 언설상의(discursive) 자료를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순반란과 폭력의 등식화는 ‘대한민국에 대한 반란은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민족전체의 죽음을 초래한다’라는, 또 ‘개인과 가족, 민족, 인류를 위해서는 대한민국에 적극적으로 충성하라’라는 단순 명료한 규율적 지식(disciplinary knowledge)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규율적 지식은 다시 남한사람들을 규율하는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대중의 규율화는 대한민국의 지배를 규율적 지배(disciplinary rule)로 변모케 하면서, 대한민국이 근대국가성을 구비하는데 최종적으로 이바지 했다. 이렇듯이 여순반란과 폭력의 등식화는 대한민국의 근대적 민족국가에 다방면으로 공헌하였다.

바로 이러한 ‘국가적’ 중요성 때문에, 여순반란은 끊임없이 대한민국의 공식역사서들과 학교 교과서 기타의 방식으로 ‘파괴와 폭력의 생지옥(生地獄)’으로 재현되고, 기억되어지게 되었다. 생지옥으로 재현된 여순반란의 상(像)과, 그것의 국가적 기능들은 이따끔씩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고 작동하면서 대한민국의 근대민족국가성을 시위하는 데, 또 남한사람들을 규율된 정치적 주체(disciplined political subject)인 대한민국국민으로 변용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한국판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대”(Sturm und Drang Periode)”인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에 의해 만들어진 ‘여순반란(反亂)’의 상(像)은 남한 지식인과 여수와 순천 지역민의 의심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속에서 “여순반란(叛亂)”의 도그마(dogma)는 해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또 그것의 규율적 기능 또한 상실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순반란(叛亂)”의 운명은 학교 국사교과서에서, 예컨대 『한국근현대사』(한철호 외)에서 그 호칭이 “여순반란(叛亂)”에서 “여수 순천 10∙19 사건”으로 재명명되었던 것에서 이미 예고되었고, 또한 확인되어졌다.

/ 임 종명(고대 민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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