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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인천·섬

강화도 온수리 정족산 전등사

by 구석구석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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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한강을 따라 서울로 들어올 수 있는 곳으로 국방상 중요한 위치였다. 이곳에는 구한말 특히 초지진은 개화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일본군함 운양호 침공 등 외침 때마다 싸워 물리친 격전지이다.

덕진진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전적지보수정화비가 서있는 곳이 바로 용두돈이다. 용두돈은 좁은 강화 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 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교두보다. 작은 보트 한대도 그냥 통과할 수 없는 절묘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전등사

초지진에서 서쪽으로 장흥저수지지나 10여 분 정도 들어가면 강화도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사찰인 전등사가 나온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강화도를 거쳐 신라에 불교를 전한 인물)에 의해 ‘진종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던 곳으로 고려 충렬왕의 아내인 정화궁주가 경전과 옥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삼랑성동문으로 전등사입구

전등사는 정족산 삼랑성 안에 있다. 강화도의 주봉인 마리산의 한 줄기가  북동쪽으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세 봉우리를 이룬 것이 정족산이다. 고려말 최씨 무인정권 이래 단군 유적으로 성역화된 이곳은 풍수가들에 의해 길지로 손꼽히고 있다.

임진왜란때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서고로, 조선 말기에는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역할을 했으며 대웅전(보물 제178호), 약사전(보물 제179호), 범종(보물 제393호), 대조루(인천문화재 자료 제7호)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대웅전 처마 아래에 조각된 4기의 나부상(벌거벗은 여자 모양)이 눈길을 끈다. 전등사의 명물로 꼽히는 나부상은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아내가 도망가자 무거운 추녀를 받들고 죄 값을 치르라는 의미로 처마를 들고 앉아 벌을 받는 모습의 여인상을 조각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4기의 나부상 모두 표정이 달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과 경내로 들어가기 전 왼쪽에 자리한 윤장대도 빼놓기 아까운 볼거리. 전등사 일주문(기둥을 한 줄로 배치한 문)을 대신하는 삼랑성은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섬멸한 전적지로 알려져 있다. 윤장대는 불교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돌리면 안에 있는 책을 다 읽은 것과 마찬가지의 지혜와 깨침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해내려 온다.

전등사 대웅전

대웅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지붕 끝의 수막새를 고정시키는 백자 연봉(蓮峯)이다. 백자 연봉은 다른 건축에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까만 기와들 사이에서 문득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이 악센트 하나가 지붕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대웅전 지붕의 추녀 끝이 마치 날아갈 듯 들려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사찰 건축의 백미라는 말이 전혀 허랑하지 않게 느껴진다.   

전등사는 고려 말 충렬왕비인 정화공주의 원찰이었다. 그러나 충렬왕은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에게 강제로 장가들게 된다. 그 바람에 정화공주는 왕비의 자리를 박탈당한 채 별궁에 내동댕이쳐져 왕과는 얼굴조차 대면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왕의 사랑을 잃고 외롭게 갇혀지내던 공주에겐 마음을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공주는 전등사를 자신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아마도 공주는 틈틈이 한양에서 가까운 전등사에 와서 원나라의 멸망과 고려 국운의 회복을 빌었으리라. 또한 공주는 인기(印奇) 선사를 원나라로 보내 송나라 대장경을 가져다 이곳에 보장하기도 했다. 

약사전

대웅전 왼쪽으로는 향로전(香爐殿), 약사전, 명부전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약사전은 건물의 안팎의 형식이 대웅전과 거의 흡사한 것으로 봐서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약사전 안을 들여다보니, 약사여래좌상이 가만히 앉아 계신다. 결가부좌를 틀고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여래좌상은 유난히 귀가 크다. 세상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거의 반쯤은 병이 고쳐진 거라는 걸 아시는 분인가 보다. 선정인을 한 수인 속에는 보주가 들어 있다. 병의 근원을 찾아 반드시 낫게 해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수인이다

 
살랑성 남문께 있는 부도밭

전등사 관람시간은 새벽 5시~오후 8시이며 입장료는 어른 2천원, 어린이 1천원이고 주차료는 2천원. 전체를 둘러보는 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문의 전등사 종무소 032-937-0125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격파했던 정족산 삼랑성 사적30호 

이곳은 고종 3년(1866년)의 병인양요 때 성을 공격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와중에서 가장 먼저 구미 열강의 침략을 겪어야 했지만, 짜릿한 승리의 기억을 간직한 곳이기도 한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성을 답사하기에 앞서 서북쪽 언덕에 있는 정족산 사고지를 둘러보기로 한다. 마니산 사고에 있던 실록을 이곳으로 옮긴 것은 장사각과 선원각이 지어진 1660년(현종 1년)이었다. 선원각엔 왕실 족보나 의궤를 비롯한 정부 문서를 보관하게 했다. 병인양요(1866년)가 일어나기 불과 6년 전 일이었으니,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패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정족산 사고지

외삼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최근에 다시 지은 장사각과 선원각이 탐방객을 맞는다. 원건물은 1930년 경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건물만 동그마니 서 있을 뿐 실록은 이곳에 없다. 이곳에 건물을 다시 지은 의미를 살리려면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돼 있는 실록의 영인본이라도 비치하는 성의라도 보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실록이 없는 사고는 영혼이 없는 사람 같다. 

 
삼랑성 서문

성곽은 거친 할석(割石)으로 되어 있으며 안쪽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협축한 형태다. 할석 사이엔 돌부스러기로 쐐기돌을 박았다. 아마도 석축을 쌓기 전에는 토성이 존재했던 것 같다.  서문 위에 서니, 정족산 정상(231m)이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성을 너무 높은 산에 쌓으면, 방어하기엔 좋지만 식량의 보급과 연락이 문제가 될 터이니 이 정도가 딱 적당한 높이가 아닌가 싶다

서문에서 바라보는 정족산

성벽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남봉(南峰) 정상에 오르자, 전등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마리산이, 동쪽으로는 강화해협이 바라다 보인다. 긴 초지대교가 해협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초지진이 있다.

초지진은 해상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1656년(효종 7년)에 구축한 요새이다.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을 이곳으로 유인하여 격파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곳에 침입하였을 때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또한 1875년(고종 12년)에는 일본 군함 운양호와 교전하기도 했던 곳이다. 운양호 사건은 결국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가히 우리나라 근세사의 생생한 현장이라 할 만하다.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초지진은 삼랑성의 보루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복원된 남벽과 남문(종해루)

남벽을 타고 내려오면 1976년에 복원한 남문과 종해루가 나타난다. 이곳에 올라가면 초지진이 한눈에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루로 오르는 문은 닫혀 있다.

 

정족산 가궐지

 고려 고종 46년(1259)풍수 도참가 백승현의 진언에 의하여 고종이 건립했던 기궐터이다. 당시 백승현이 낭장으로 재임시 고종이 적당한 가궐지를 문의하자 삼랑성 및 신니동에 가궐을 짖도록 하고 마니산 참성단에 제사하면 친조문제가 해결되고 주변국의 대국들이 조공할 것이라고 건의하자 왕은 대장군 조문주, 국자제주 김구, 장군 송송례에게 가궐을 짓도록 명하여 완성하였다 한다. 당시 가궐의 건물은 몽고병이 침입해 왔을 때 소실되었다 하며 당시에는 이 가궐에서 왕이 거쳐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의 생활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삼랑성꽁보리밥 032 937 0397

8가지 나물과 6가지 밑반찬이 나오는데 꽁보리밥에 갖은 나물과 비지를 넣고 비벼 먹으면 일품이다. 메밀전병에 겉절이, 부추 등으로 속을 한 메밀총떡도 맛난다. 

초지대교밑 대선정 032-937-1907

이곳의 별미는 토속음식인 시래기밥. 가을에 말려 두었던 무청으로 고슬고슬하게 지은 시래기밥에 양념 간장을 살짝 뿌려 먹으면 밥이 목으로 술술 넘어간다. 메밀 반죽을 칼로 싹둑싹둑 썰어 만든 메밀칼싹두기도 별미. 다시마, 무, 멸치, 홍합 등으로 맛을 낸 국물이 시원하다.

오전 9시~오후 9시. 시래기밥, 메밀칼싹두기. 주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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