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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강진 덕룡산 용굴

by 구석구석 2022.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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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혈은 전남 강진의 덕룡산에 있다. 덕룡산은 온통 바위로 이뤄져 ‘남도의 공룡능선’이라고 불리는 험준한 산. 그 산의 4분쯤의 능선 바위벼랑에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용혈이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신우대 울창한 원시림의 저 깊은 숲속에 용혈이 있다.

전남 강진 덕룡산에는 고대 유적처럼 숨겨진 공간인 용혈(龍穴·용굴)이 있다. 고려 때 은퇴한 당대 최고의 고승들의 수도처였던 곳이다.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은 고려 때 승려 천책이 남긴 시문에 반해 그의 자취를 좇고자 해마다 한 번씩 제자를 데리고 이곳을 다녀갔다. 해골처럼 두 개의 구멍이 뚫린 용혈은 안쪽 공간이 제법 넓고 높다. 동굴 한쪽에는 하늘로 뚫린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으로 용이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강진의 용혈 이야기를 하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이동하듯 시계의 태엽을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해야 한다. 이야기의 출발은, 강진의 내로라하는 명소들이 그렇듯 ‘다산 정약용’이다. 강진에는 다산에 의해 호흡이 불어 넣어진 명소가 곳곳에 있다. 다산이 스스로 새긴 자취나 흔적도 있지만, 다산이 발견하고 꼼꼼하게 기록함으로써 생명력을 얻은 공간도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것이 많지만, 발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부러운 점은 강진 땅이 다산의 전 생애에 걸친 ‘지리적 현장성’을 독점하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진에 다산은 축복과 다름없다.

먼저 시곗바늘을 200여 년 전, 그러니까 다산의 강진 유배 당시로 되돌린다. 다산이 유배 중 가장 깊이 교유해온 이가 백련사의 혜장 선사다. 유배 내내 다산은 혜장과 사제의 정을 나누며 유교와 불교를 뛰어넘어 교류했다.

어느 날 혜장이 다산에게 책 한 권을 건네줬다. 고려 때 최고 고승에게만 내리는 국사(國師·나라의 스승) 칭호를 받았던 백련사의 승려 천책이 지은 ‘호산록’이었다. 다산은 천책의 문장에 매료되고 만다. 천책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 승려. 승려를 대상으로 하는 승과(僧科) 대신 일반 과거에 급제한 뒤 고급 관리 대신 승려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다.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할 정도의 글솜씨를 갖고 출가해 절에 들어가 참선과 수행을 거듭한 셈이니 천책의 문장이 남다를 수밖에….

 

호산록에는 강진의 용혈, 그러니까 용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천책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한 뒤 백련사에서 나와 덕룡산 자락의 용혈 아래 용혈암에 머물며 여생을 보냈다. 천책이 용굴에 은거하자, 고려의 고위 관리들이 개경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앞다퉈 강진까지 내려왔다. 이들이 타고 온 말과 마차가 용굴 앞에 줄을 설 정도였다. 한 번 만나보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을 정도로 천책은 추앙을 받았다. 이건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고려 때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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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0년의 시간을 건너온 기록의 힘

천책의 글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하던 다산은 제자와 마침 강진에 내려와 있던 둘째 아들까지 이끌고 천책이 말년을 보낸 용혈로 소풍을 갔다. 천책의 향기라도 맡을 수 있을까 해서 떠난 소풍이었다.

때는 1808년 음력 5월 11일. 만춘의 봄날이었다. 유배 이후 거처를 전전하던 다산이 만덕산의 다산초당으로 막 거처를 옮겼을 때니 괴로웠던 시절을 건너 유배생활이 몸에 익었을 무렵이었다. 마침 유배 후 8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둘째 아들까지 초당에 내려와 있었다. 봄날 용혈로의 소풍은 다산에게는 괴로웠던 유배 중 그나마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때 내로라하는 고승들이 입적한 고려 불교의 성지였다가 쇠락하면서 잊혀 500년 넘게 덤불에 묻힌 용혈은 이렇게 다산의 소풍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 속의 800여 년 전 고승의 자취가 남은 유적이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가 500여 년이 더 지난 뒤 천책이 남긴 시문에 매료된 다산에 의해 꺼내진 셈이다.

다산은 소풍을 떠났던 당일의 행적을 ‘용혈행’이란 제목의 글로 남겼다. 다산이 문장으로 그려놓은 소풍의 기록이 어찌나 상세한지 한 장면 한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다. 지역의 토호이자 후원자가 다산과 제자의 소풍에 협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다산은 이들이 용혈 앞에 차려놓은 성대한 밥상과 술상의 상차림까지 세세하게 적었다.

먼저 갈증을 풀기 위해 잘 익은 앵두를 내왔고 이어 농어 국과 전복회, 파강회와 미나리 무침이 차려졌다. 한바탕 술자리가 벌어졌을 것이고, 시문을 짓거나 읊기도 했을 것이다. 그날의 소풍이 즐거웠는지 다산은 이후 해마다 봄이 되면 제자들을 앞세워 용혈로 소풍을 다녀왔다.

다산이 유배를 끝내고 강진을 떠나면서 용혈은 다시 발길이 끊겼다. 숲길은 나무뿌리가 휘감았고, 입구는 덤불로 뒤덮였다. 그렇게 다시 시간의 어둠 속으로 잠긴 용혈은, 다산과 연암, 이덕무 등 조선 시대 인물에 천착해온 고전학자 정민 한양대 교수에 의해 200여 년 만에 다시 꺼내졌다. 정 교수는 최근 다산과 제자가 쓴 용혈과 관련된 문헌을 뒤지고, 용혈을 답사해 책 ‘다산과 강진 용혈’을 펴냈다.

정 교수는 5년 전에도 다산의 화첩과 기록을 뒤져 강진의 월출산 아래 백운동 정원(원림)을 조명했다. 그의 연구로 덤불에 뒤덮여 잊혀가던 백운동 원림이 그윽한 문향의 관광지로 단장돼 사람들의 발걸음을 받아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용혈도 그 기이한 형상과 깃든 이야기로 이내 매력적인 명소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백운동 원림 얘기는 뒤에서 다시.

800여 년 전 고려 때의 고승 천책에게서, 200여 년 전 유배객 다산으로, 그리고 다시 정 교수로…. 고려 불교의 수도처가 허물어졌으되 잊히지 않고 다시 빛을 보게 된 바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록의 힘’, 그리고 또 하나는 ‘인물의 힘’이다.

천책의 글을 다산이 봤고, 다산이 적은 글을 정 교수가 봤다. 수백 년의 시간쯤은 가뿐하게 뛰어넘는 기록의 무서움이다. 기록의 힘에 앞서는 건 ‘사람’이다. 다산이 천책을 흠모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정 교수가 다산을 흠모하지 않았다면, 기록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기록과 사람의 힘으로, 용굴은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 용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렇다면 용굴은 대체 어떤 모습의 공간일까. 다산은 용혈암 터를 이렇게 묘사했다. “바위산 조각한 듯 기괴하기 짝이 없고/무멍한 종유 동굴 허공에 걸렸구나/그 옛날의 선원(禪院)이 지금은 파묻혀서/층층 누대 가파른 섬돌 모두 다 무너졌다.” 지금 가 봐도 용굴은 다산의 글 속 풍경과 하나 다를 게 없다.

용굴을 찾아가는 건 일반적인 여행과는 좀 다르다. 보통의 여행과는 다른 색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얘기다. ‘대체 어떤 곳이길래’라는 궁금함도 있고, 보물찾기를 하는 듯한 두근거림도 있다. 조금 과장한다면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과 유사하다. 고생스럽다는 뜻은 아니고, 은밀하면서도 모험심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초행에 용굴을 찾아가기란 쉽잖다. 정 교수의 답사를 안내하며 용굴을 드나들었던 신영호 강진향토사연구회장이 앞장섰다. 용굴, 그러니까 용혈의 들머리는 덕룡산 아래 규사광산인 만덕광업 정문 바로 옆에 있다. 덕룡산을 오르는 등산로인데 신우대 빽빽한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은 좁긴 하지만 뚜렷하다. 길을 짚어서 20분쯤 오르면 길 오른쪽으로 쓰러진 안내판이 나온다. 2015년에 끝난 용혈암 발굴조사 안내판이다. 안내판 쪽으로 발을 디디면 덤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덤불 안은 용혈암이란 암자 건물이 서 있던 자리다. 발굴의 흔적까지 남아 있어 마치 사라진 대륙의 고대 유적지로 들어선 듯한 분위기다. 이곳에서는 고려 때의 청자 불상 파편이 여러 점 나왔다.

덤불 숲을 헤치고 더 들어가면 굴이 있다. 이 굴이 두 개의 용굴 중 아래 굴이다. 터널처럼 깊고 길게 뚫린 동굴은 아니고, 입구는 좁되 안쪽이 넓은, 마치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떠낸 듯한 동굴이다.

진짜 용굴, 그러니까 용혈은 위쪽에 있는 동굴이다. 등산로를 따라 10분쯤 더 올랐을까. 바위벽 옆으로 희미하게 계단의 흔적이 있다. 이게 용혈로 이어지는 길이다. 여기서 열댓 걸음만 오르면 동굴이 입을 딱 벌리고 있다. 동굴 구멍은 두 개인데 안쪽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져 있다.

동굴 한쪽 끝에서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이는 구멍이 있다. 하늘과 통한다는 이른바 통천문(通天門)이다.

기이한 동굴의 경관이 제법 볼 만하지만, 용혈에서는 눈보다 마음이다. 800여 년 전 고려 때 세 명의 국사가 이곳에 은거하며 수행을 하거나 생을 다하고 입적했다. 그리고 200여 년 전 다산이 천책의 향기를 맡고자 해마다 제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이들의 발걸음을 따라나선 길이 지금 여기까지 왔다.

거기 무슨 훌륭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관광지로 다듬어진 곳도 아니며, 쉽게 찾아갈 수도 없지만 용혈을 권하는 건 그곳에서 다른 여행지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로 꽉 차있는 공간이 잊히고 버려져 헐거워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기분. 비유하자면 비워져 있음으로써 더 충만한 느낌을 주는 오래된 폐사지에서의 경험과 비슷하다.

/ 문화일보 박경일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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