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전라남도

강진 월하리 백운동원림 강진다원 옥판차 월남사지

by 구석구석 2022. 6. 23.
728x90

 

월출산 아래 강진 땅에는 근사한 정원이 있다. 조선 중기, 벼슬자리에 나가지 못한 처사 이담로가 은거를 결심하고 칩거하면서 꾸민 정원이 백운동 원림이다. 최근까지도 덤불에 뒤덮여 잊혔던 백운동 원림은, 다산이 거쳐 간 발길과 남긴 기록, 그리고 그 기록을 꺼낸 고전학자 정민 한양대 교수의 노고로 200여 년 만에 조명을 받으면서 복원돼 일약 강진의 명소가 된 곳이다.

 

강진군 성전면 월하안운길 100-63 / 명승115호 백운동 원림

산동네라 도로주소보다는 주변의 건물 주소를 입력하고 찾는게 편하고 입구에 주차장이 있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출처: https://forculture.tistory.com/860 [풀소리의 자유로운 세상:티스토리]
백운동12경 / 강진군청

유배 중이던 다산은 여기 백운동을 두 번 다녀갔다.

그중 제자들과 월출산 등반을 마치고 백운동에서 하루를 묵었던 1812년 가을, 두 번째 방문에서 원림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다산은 원림에서 딱 하룻밤 묵고 나서 주변의 빼어난 풍경 12곳을 정해 ‘백운동 12경(景)’을 정하고, 초의 선사에게는 백운동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친필 시를 한데 묶어 ‘백운첩’으로 남겼다. 다녀간 뒤에도 자주 이곳을 그리워하면서 그림을 꺼내 봤을 만큼 다산은 백운동 원림의 경관을 잊지 못했다.

계곡을 끼고 있는 백운동 원림의 긴 흙담. 원림은 앞으로는 짙은 동백숲을, 뒤로는 대숲을 두르고 있다. 월출산과 백운동 원림 사이에는 또 구릉을 넘어가는 거대한 차밭이 펼쳐져 있다. 문화일보

백운동 원림의 복원은 화첩 속 다산의 시와 초의의 그림을 토대로 이뤄졌다. 다산의 감동이 없었다면, 그래서 글과 그림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여기 이렇게 빼어난 정원이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복원과정에서 제멋대로 육중한 기와 솟을대문을 올리는 등의 부실한 복원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계곡의 물길을 끌어들여 복원해낸 백운동 원림의 정취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제4경 홍폭포. 뒤의 다리를 건너면 원림이다.

원림은 들어서는 입구부터 압도적이다. 백운동 원림은 위쪽의 차밭과 아래쪽의 마을, 두 군데의 진입로가 있는데 백운동을 제대로 보겠다면 필히 아래쪽 마을에서 들어서야 한다. 마을 쪽 들머리의 동백숲은 밝은 대낮에도 캄캄한 한밤중 같다. 마치 어두운 방에 들어간 듯하다. 이쪽에서 백운동으로 들어서면 어둠의 터널을 지나 드라마틱하게 원림의 경관을 만날 수 있다.

원림에는 계곡의 물길을 끌어들여 술잔을 띄울 수 있도록 해놓았고, 뒷담장 너머로는 울울창창한 대숲을 두르고 있다. 화첩에는 ‘백운동 12경’에다 붙인 12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중 9편이 다산의 것이다. 백운동 12경 중 제1경은 원림에서 올려다보이는 월출산의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봉우리 ‘옥판봉’. 그 경관에다 붙인 다산의 시는 깊은 함의를 다져 넣은 유배자의 성찰과 다름없다.

“내 예전 영산(월출산)에 놀러 와서는/옷깃 떨쳐 절정까지 오르려 했지/힘 빠져 능히 내려오지 못하고/해 지자 입은 옷이 너무 추웠네/ …/이제야 알겠네 예전에 오를 때/거칠게 기운만 부려댄 줄을/산인은 산 위로 오르지 않고/가만 앉아 마음이 고요하네.”

들어가자마자 취미선방(翠微禪房)이라는 정갈한 초가집이 나온다. 취미(禪房)란 산 중턱이나 푸른 산을 뜻하므로 '산속 조용한 집'이란 뜻인 듯하다. 출처: https://forculture.tistory.com/860 [풀소리의 자유로운 세상:티스토리]

유배 중인 다산이 정상에 오르지 못해 좌절했던 시절의 부질없던 욕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음을, 그래서 마음이 고요해지는 그런 순간에 당도했음을 이 시는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다산이 진솔한 마음을 꺼내 투영했을 정도로 백운동의 풍경에 감화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당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곳으로 계곡의 물을 끌어와 유상곡수를 만들어놓았다. 물론 옛 모습은 달랐겠지만 말이다. 옆에 있는 작은 정자의 이름이 '수소실(守素室)'이다. 출처: https://forculture.tistory.com/860 [풀소리의 자유로운 세상:티스토리]

강진에서 백운동 원림과 용혈은 함께 여행하면 훌륭한 짝이다. 다산의 발길이 거쳐 간 이 두 곳은, 다산이 강진에서 찾아낸 그윽하고 맑은 곳이다. 백운동은 이미 갖춰진 명소이고, 용혈은 이제 막 드러난 곳이다. 두 곳 모두 다산이 소풍을 가거나 등산을 하면서 묵었으며 다녀오고 나서 찬탄을 금치 못했던 강진의 명소다. 

원림 맨 안쪽으로는 자이당(自怡堂)이라는 당호를 가진 기와집이 있다. '자이(自怡)'이는 '스스로 즐거워하다'는 뜻이다. 자이당은 이곳의 6대 주인인 이시헌(李時憲)의 호이기도 하다. 출처: https://forculture.tistory.com/860 [풀소리의 자유로운 세상:티스토리]
원림에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도 빽빽한 동백숲길이다./ 풀소리의 자유로운 세상:티스토리

/ 글 문화일보 박경일 전임기자 

/ 사진 강진 백운동 원림 (tistory.com)

 

 

 

강진 설록다원 / 강진다원 / 강진 월출산다원

강진군 성전면 백운로 93-25 (월남리)

수확무렵에는 검은 차양포를 씌우기 때문에 이시기는 피해서 가야한다.

산 경사를 따라 일렬로 늘어선 초록빛 녹차밭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면 마치 그림 풍경에 들어간 듯한 그럴싸한 사진을 건질 수 있다. 국내에서 '인증샷' 찍기 좋은 '차밭 여행지'를 꼽자면 보성이나 하동, 또는 제주도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여기에 추가할 '히든플레이스'가 바로 전라남도 강진이다.

강진은 설악산, 주왕산과 더불어 3대 바위산으로 불리는 월출산 아래 드넓은 다원이 펼쳐지는 독특한 풍광을 지닌 데다가 우리나라 녹차 역사와도 관계가 깊다.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차 역사의 맥을 이어온 다인(茶人)인 이한영 선생이 1890년대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명을 갖춘 녹차인 '백운옥판차'를 세상에 내놓는데, 이 차가 강진에서 만들어 졌다. 그 전에 강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용 선생은 서울로 돌아가서도 강진의 녹차를 마셨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백운 옥판차에 쓰이는 찻잎은 '남한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월출산 아래 드넓은 '강진다원'에서 재배한다. 차를 재배하기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춘 월출산 남쪽기슭의 볼모지를 개간해 약 32만 6400㎡(10만평)으로 조성된 다원으로 이곳에선 이른 봄부터 어린싹을 채엽하기 시작해, 일 년에 3~4회 채엽을 한다.

백운옥판차를 맛보려면 강진다원에서 차로 5분 정도 이동하면 된다. 이한영 선생의 고손녀인 이현정씨가 운영하는 카페인 '백운옥판차 이야기'에선 봄이되면 월출산에서 채엽한 찻잎을 이용해 전통제다법 그대로 만든 차를 맛볼 수 있다.

/ 사진출처 아름터기 | "강진 다원" - Daum 카페

/ 글 왜 몰랐지?…강진에 그림 같은 차(茶)밭이 있단 걸 (news1.kr)

 

강진군 성전면 백운로 107 / 백운옥판차이야기 061-434-4995

설록다원 아래쪽에 백운옥판차 이야기라는 조그만 찻집이 하나 있다. 이 찻집은 여행지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카페가 아니다. 매우 뛰어난 한 선각자 이한영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한영 님은 우리나라 최초로 녹차 브랜드를 만들어서 판매하고, 외국에 수출까지 한 분이지요. 당시 만들었던 브랜드가 白雲玉版茶(백 운옥판차)입니다.”

백운옥판차 이야기 이현정 원장의 이야기다. 다산과 초의선사 이래 강진에는 차밭을 가꾼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은 강진과 해남 일대에서 수확한 차를 가져다가 일본 상표를 붙여서 일본과 미주로 수출하고 있었다. 이한영은 우리 땅에서 수확한 차에는 우리 상표를 붙여야겠다고 생각했고, 적절한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했다.

그리고 백운옥판차란 이름을 지어냈다. 백운은 알겠으나 옥판은 무슨 뜻일까? 동석한 강영석 강진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월출산 남쪽 능선에 옥판봉이라는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으며, 다산이 이 봉우리에 다녀온 후, “옥판봉에 다녀왔는데 아름다운 경치는 기억에 없고, 아슬아슬한 절벽이라 죽다 살았다.”고 기행문에 썼다고 한다. 이한영이 상표를 개발했을 때가 40대 초반이었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했다. 이한영이 생산한 녹차는 ‘白雲玉版茶’라는 자체 상표를 달고 판매되었다.

이한영은 상표만 개발한 것이 아니라 녹차 전문가였다. 그가 시도한 차의 4가지 분류는 요즘 홍차의 분류기준과 거의 일치한다. 잎이 하나 나왔을 때 수확한 차는 맥차, 잎이 둘인 경우는 작설, 잎이 3개일 경우는 모차, 잎이 좀 크고 넓은 경우는 기차라고 분류했다. 차를 분류할 때 수확하는 시기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잎의 개수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이시헌은 다산에게서 녹차 만드는 법을 배웠고, 이시헌은 다시 이흠 (이산흠)에게 전수했다. 이흠은 다시 이한영에게 녹차 제조 기술을 전수했고, 오늘 그의 고손녀 되는 이현정 원장이 백운옥판차의 명맥을 잇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해남에서 이주한 원주 이씨 친족들이다. 이현정 원장은 학교 교사였는데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강진 녹차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진에 다산 선생으로부터 전해지는 녹차가 있으며, 그 줄기가 조부님들이란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교사생활도 좋지만 녹차와 조상님들의 흡인력이 더 강렬했다. 녹차를 더 체계적으로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고,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이현정 원장은 녹차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선대 어른들의 대를 잇고 있다. 사진/ 박상대 기자

지금 카페가 자리한 곳은 이한영의 생가가 있던 자리다. 생가 자리에는 기념관이 있고, 카페는 그 옆에 있는 셈이다. 그 중간에 지금 한옥두 채를 짓고 있다. 녹차 만들기 체험장과 귀한 손님들을 위한 숙박시 설을 만드는 중이다. 이현정 원장은 강진에 자체 다원을 가지고 있으며, 이곳에서 질 좋은 녹차를 재배하고 생산해서 판매하고 있다.

현재 백운옥판차는 4종류가 있다. 월산 홍차, 월산 떡차, 월산 백차, 월산 청차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발효차다. 녹차를 마셔본 사람들은 안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월산차, 백운옥판차가 어떤 향을 내는지. 알 듯 말 듯 향긋하고 은은하다. 일반 녹차에서 나는 쌉쓰레한 맛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고소한 맛이 난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봄향기같다. 백운옥판차 이야기는 유배지에서 다산 정약용이 뿌려놓은 녹차 재배 기술과 제조법, 그리고 녹차 마시는 법이 여전히 전해지고 있는 현장이다.

/ 여행스케치 2022 박상대기자

 

강진 월남사지에는 보물 제298호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과 보물 제313호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가 있다.

보물로 지정된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높이 8.4m로 백제계 양식의 조적식 석탑이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비교할 수 있고,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백제계 석탑이다.

바닥에 접해있는 기단 저석은 화강암 재질로 무게가 무려 8.5t으로, 이는 국내 석탑 중 단일부재로는 최대 규모다.

창건당시 상당히 큰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는 발굴 당시 상태가 매우 양호한 청자유물이 출토되어 고려청자로 유명한 강진을 재조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의 특징을 보면 유독 고려시대의 청자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의례용으로 사용되던 도철문 사각향로와 팔각향로를 비롯하여 흔히 발견되지 않는 청자도판도 출토되었다.

조선 시대에 폐사(廢寺)된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남쪽 자락의 월남사지(月南寺址)에 있는 보물 제298호인 삼층석탑이 해체된 지 3년 만에 온전히 복원됐다. 해체보수 과정에서 국내에서 유사한 형태가 발견된 적이 없는 높이 22cm, 가장 넓은 동체부 너비 11cm 크기의 청동병이 3층 탑신석 하부에서 발견됐다.

월남사지에 창건된 월남사는 고려시대 무인정권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문장가인 이규보가 진각대사비가 비문을 지었는데 진각구사 제자 118명의 이름은 별도로 최자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음기에 따르면 진각대사비 비는 고종 37년(1250)에 최씨 무신정권의 제2대 집정인 최우(崔瑀, 崔怡와 같은 사람) 와 그의 아들 최항(崔伉)의 각별한 관심에 따라 이곳 월남사에 세워진 것이었다.

진각국사가 세우고 무인정권의 각별한 관심속에 사세를 확장해나가던 월남사가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월남사지 중앙에 있었던 월남사지 3층 석탑만이 사찰이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호남에서 규모가 상당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월남사지의 규모는 외곽 담장의 흔적으로 추정해볼때 동서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서 총면적은 1만여평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월남사지 가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는 전체 높이 3.58m, 직사각형 대석 높이 2.6m, 너비 2.3m의 크기로 세워졌으며 사찰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처음에 발견했을 때는 누구의 비석인지 몰라 월남사지비라고 부르다가  1963년 보물로 지정된 후 1973년 비의 내용을 파악 한 뒤에 진각국사비라고 정정했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린 형태이며 머릿돌은 없다. 거북은 긴 목을 빼고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다. 이 비석의 글은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진각혜심은 13세기 초 지눌 보조국사의 법통을 이어받아 수선사(현 송광사)의 제2세 사주(社主)가 돼 오늘날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불교의 정신사적 명품인 간화선(看話禪) 수행체계를 확립했다.

불교사적 업적에 가려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혜심은 문학사적으로도 '무의자시집'이란 두권의 선시집을 남겼다. 한국 선시의 최초 발화자란 평가를 받고 있다.

진각국사가 혜심(慧諶, 1178~1234)이 창건한 사찰 월남사는 월출산을 배경으로 월남마을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데 호남 5대 명산이라는 월출산의 정기를 받으며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월출산은 일출과 서해를 물들이는 일몰광경은 호남 제일의 경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월남사지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구림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은 백제문화의 전수를 통해 일본 사람의 문화를 깨우치게 한 백제의 왕인 박사가 출생한 곳으로 유명하다.

/ 사진 출처 아름터기 | "강진 다원" - Daum 카페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