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상관면 신리 392 / 정여립공원
완주에는 뜻밖에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인물의 자취가 곳곳에 있다. 그중 가장 극적인 인물이 바로 정여립이다. 정여립이 태어난 생가터가 완주 상관면 월암리에 있다. 근래 그 자리에 ‘정여립 공원’이 조성됐다. 생가 자리를 놓고 이론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야말로 정여립을 기리는 거의 유일한 자취다. 아, 그런데 정여립이 누구냐고?
최악의 피바람을 불러온 ‘기축옥사’의 도화선이 된 ‘정여립의 난’ 주모자 정여립은 최초의 공화주의자이자 혁명가였다. 그는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며 군주주의를 부정했으며 ‘백성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좋고, 인의가 부족한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며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느냐)을 펼쳤다.
왕조시대의 시선으로 보면, 그의 사상은 급진적이고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정여립에게는 역모의 혐의가 씌워졌고, 아들과 함께 몇 날 며칠을 관군에게 쫓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은 정여립의 시신을 다시 찢어 죽인 조정은 역모 가담자를 찾겠다며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그게 바로 조선 시대 이른바 ‘3대 사화’의 희생자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낸 기축옥사였다.
정여립 사건은 서인들이 정치적 반대파 동인을 탄압하는 올가미가 됐다. 눈엣가시 같은 정적을 골라내 정여립과 만났다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목을 벴다. 함께 웃는 걸 봤다고 죽이고, 9촌 사이라고 죽였다. 이렇게 죽은 선비가 자그마치 1000명이 넘었고,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금기시됐다. 죽음조차 수습되지 못해 정여립은 묘가 없다. 족보에서조차 파이고 생전의 흔적까지 모두 지워졌다. 그가 태어난 집 자리를 숯불로 지지고 물길을 끌어들여 깊은 소(沼)를 만들었다. 역적의 태 자리에서 자란 풀을 소나 말이 먹고 반역을 일으키는 병마로 길러질 수 있으니 아예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자취를 더듬고 뒤져서 생가터를 기념하는 공원이 만들어진 건,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기축옥사 최악의 가해자였던 송강 정철의 흔적은 전국 곳곳에 관광자원이 됐는데도, 정작 조작됐다는 피해자였던 정여립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를 기억하는 손바닥만 한 공간조차 없으니 말이다. 철판을 오려 불끈 쥔 주먹을 치켜든 정여립의 모습을 새겨놓은 정여립 공원은, 시대를 앞서갔던 혁명적 공화주의자를 기리는 유일한 장소다. 그게 그곳에 가봐야 하는 이유다. 정여립 조형물과 정자 하나, 우물 하나. 그리고 여덟 개의 안내판이 공원의 전부지만 말이다.
/ 문화일보 2021 박경일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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