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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장흥 탐진강 정자 경호정 동백정 사인정

by 구석구석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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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탐진강 변을 따라 들어선 누각과 정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정리해보자. 첫 번째, 장흥에는 이름난 정자가 없다. 정자의 명성은 지은 이의 이름을 따라가는 법인데, 정자를 지은 이가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는 얘기다. 장흥에서야 내로라하는 가문 출신이고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한 이도 있지만, ‘전국구’의 명성은 드물다. 두 번째 특징은 장흥의 누정이 대부분 늦게 지어졌다는 것이다. 오랜 내력의 정자도 간혹 있지만, 대개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탐진강을 끼고 있는 부산면 기동리, 봉긋한 언덕 위 솔숲에 경호정이 있다.

‘거울 경(鏡)’에 ‘호수 호(湖)’ 자를 이름으로 삼았는데, 과연 정자 앞의 탐진강 수면이 거울 같다. 강물이 내다보이는 마당 끝에는 기이한 형태의 괴석을 울타리처럼 박아놨다.

 

경호정은 장흥에서 명문가로 꼽히는 장흥위씨 집안의 누정이다. 정자를 들인 자리는 오래전부터 장흥위씨가 대대로 노닐던 곳이었다는데, 정자는 1912년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정자 건물은 1964년에 인근 마을에 있던 정자 ‘송암정’을 뜯어다가 그 자재로 다시 지은 것이라는데, 정자가 크고 단정한 데다 늘 쓸고 닦는지 마루가 반들반들 윤이 난다. 강변의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정자 주변의 거목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마루에 앉아 더위를 피하며 풍류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정자 안에는 상량문과 중건기 시문을 적은 현판이 빼곡한데 뒷짐 지고 서서 그걸 읽는 재미가 제법이다. 경호정 현판에 후손이 적어놓은 시 한 구절을 읽는다. “…한여름 바둑 두는 소리, 선인이 사시는가 / 봄철 내내 꽃이 피니 벗들이 돌아갈 줄 모르네 / 늙은 말년 남은 생애 자연에 취하고 보니 / 인간사 늙어가는 세월을 도리어 잊겠구나.” 과연 그럴까. 정자에 깃들어서 자연에 취해 바둑을 두면 늙어가는 세월을 잊을 수 있을까.

 

경호정과 우열을 가리기 쉽잖은 곳이 장동면 만년리의 동백정이다.

앉은자리의 풍류나 운치로 치자면 물가의 봉긋한 언덕 위 숲 한가운데 숨은 듯 들어선 동백정이 단연 으뜸이다. 동백정은 지금으로 치면 부총리급쯤 되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김린이 세조의 왕위찬탈 직후 낙향해 처음 지었으니 그 내력이 자그마치 550년에 달한다. 그가 내려온 뒤 지역의 선비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자 정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후에 몇 번을 고쳐 지었고 1986년에 마지막으로 중수해 지금껏 내려오고 있다.

 

전남 장흥의 탐진강 변에는 여덟 개의 누정(樓亭누각과 정자)이 있다. 이름하여 탐진강 변 8 정자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이 탐진강 지류 부산천 물길을 끼고 있는 사진 속의 정자 동백정이다. 정자는 물가의 봉긋한 언덕 위 동백나무숲과 솔숲 사이에 숨은 듯 있다.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나누는 곳이기도 했고, 마을 사람들이 정자에서 대동계 집회를 하기도 했다. 동백정처럼 장흥의 정자는 주민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던 공유의 공간이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시인 묵객들이 모여들어 시문을 나누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동백정이 선비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정자는 때로 주민들의 대동계 집회장소나 별신제의 장소로 쓰였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쓰는 ‘마을 정자’ 역할을 한 셈이었다. 부총리급 퇴직 관료가 지은 정자에 마을 주민 누구나 무시로 드나들었다. 이쯤 되면 장흥의 정자에는 개방적 전통이 있었고, 그게 지금까지 전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동백정은 이런 내력과 역사보다는 앉은자리의 빼어남이 가장 돋보이는 정자다. 정자로 가려면 건너야 하는 맑은 냇물을 가둔 보(洑)나, 계단을 딛고 오르는 길의 동백나무며 아름드리 소나무가 이룬 울창한 숲의 어둑한 기운도 훌륭하다. 정자 마루에 앉아 바람 소리를 듣노라면 어디 먼 외딴 별천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바깥에서 동백정을 바라보는 때는 동백숲에 붉은 꽃이 낭자하게 떨어지는 겨울이 제격이지만, 정자 마루에 앉아 바깥을 보는 경치는 지금 같은 여름이 최고다.

 

내력이 오랜 만큼 정자에는 기문과 시가 빼곡하다.

그중 시 한 구절을 읽는다. “야윈 대(竹)와 성긴 솔(松)도 감히 앞설 수 없으니 / 정자에 오르면 매번 세한(歲寒)의 절개를 생각하네 / 주인만이 꽃 사이에서 술 취해 있는데 / 객은 다투어 안개 서린 잎에 시를 쓰네/….”

 

세조의 왕위찬탈 이후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며 장흥으로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둔했던 이가 또 한 명 있었다. 정사품 벼슬이니 지금으로 치면 부이사관급 공무원쯤 될까. 사인(舍人)이란 벼슬자리에 올랐던 김필이다. 장흥으로 내려온 그는 장흥읍 송암리의 흰 바위 벼랑으로 우뚝 솟은 설암산 아래에 정자 사인정을 짓고 은거했다.

장흥읍에서 탐진강 하류 쪽 탐진 2교와 평장교 사이에 그리 높지 않은 산이 하나 있는데 정상이 상어지느러미 형상의 흰 바위 벼랑으로 이뤄져 있어 설암산이라고 불렸다. 설암(雪巖)은 ‘흰 눈이 쌓인 듯하다’는 뜻이다. 이 산이 인상적이었던지 김필은 설암을 자신의 호로 삼고, 산 아래에 정자를 지어 자신이 지낸 벼슬 이름을 따 ‘사인정’이란 현판을 걸었다. 그 뒤로 산정의 바위 벼랑 이름이 ‘사인암’이 됐다.

 

산 이름은 낙향한 선비의 호가 됐고, 선비가 지낸 벼슬이 산의 이름이 됐다. 산과 바위, 그리고 거기 깃들인 이가 서로 이름을 주고받았던 셈이다. 사인정에는 정자뿐만 아니라 신도비와 함께 영정각, 설암각 등의 건물이 있어 다른 정자보다 규모가 제법 크다.

사인정에는 여러 인물이 다녀갔는데, 그중 두 사람의 자취가 뚜렷하다. 한 사람은 생육신의 한 명인 김시습.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단종이 묻힌 북쪽을 향해 절했다는 김필을 찾아온 김시습은 여기 사인정에서 10년을 머물다 갔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 백범 김구가 중국 상하이(上海) 망명길에 오르면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사인정에서 하룻밤을 묵어갔다. 정자 뒤편 벼랑에는 김필이 새겼다는 단종의 얼굴 암각화가 흐리게 남아 있고, 정자 주변 바위무더기에는 백범이 쓰고 갔다는 ‘제일강산(第一江山·사진)’이란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사인정의 방문 양쪽 기둥에는 김필이 세종대왕과 번갈아 문장을 쓴 연구(聯句)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연구란 여러 사람이 한 구(句)씩 지어 이를 모아 만든 한 편의 시를 말한다. 세종대왕의 글은 금색으로 칠해져 있다. 먼저 세종대왕이 쓴 글. “時雨半晴人半醉(시우반청인반취·비가 내렸으나 반만 개었으니 민심도 그러한가).” 짐짓 떠보는 이야기. 이를 받아 김필이 썼다. “暮雲初捲月初生(모운초권월초생·날이 저물어 구름이 일었지만 달이 새로 뜨니 근심할 게 없습니다).”

주련 말고 편액으로 걸린 시도 여럿이다. 그중 한 구절을 읽는다. “…사인(舍人)이 떠난 뒤 빈 정자만 우뚝한데, 뜰 앞 나무에 이는 바람 소리 나그네만 듣고 있네.” 지금 사인정에서 느끼는 감상이 딱 이렇다.

 

200년 전쯤 창건한 청풍김씨 가문의 정자인 장흥 부산면 부춘리 부춘정도 빼놓을 수 없다.

부춘정이야말로 가문의 후손들이 보석처럼 아끼고 보전하고 있는 정자다. 비석과 중수기에 후손들이 남겨놓은 감탄과 찬사를 읽다 보면 후손들이 정자를 얼마나 아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래 부춘정 자리에는 남평문씨 가문의 정자가 있었다. 임진왜란의 공신인 문희개가 벼슬에서 물러나 말년을 보내면서 여기 청영정이란 정자를 지은 것이었다. 청영정을 사들인 청풍김씨 가문은 그 자리에다 1838년 부춘정을 지었다.

치렁치렁 꽃을 피운 배롱나무 뒤에 숨어 있는 부춘정은 고요한 강물과 연꽃 피어나는 습지가 어우러진 탐진강 구간을 끼고 있다. 정자는 한눈에 확 휘어잡는 비경은 없지만 보면 볼수록, 머물면 머물수록 은근하게 사람을 끌어들인다. 가운데 방을 들이고 사방을 툇마루로 두른 정자 마루에는 선풍기와 목침이 있다. 춘정마을과 딱 붙어 있어 외지인들을 꺼릴 만도 한데 마을 주민은 물론이고, 외지인들도 누구나 올라앉아 더위를 피해갈 수 있도록 개방해놓았다.

 

부춘정 아래 강변 바위 곳곳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앞다퉈 글을 새겼을 정도로 부춘정 일대를 명승으로 여겼다는 얘기다. 가장 눈에 잘 띄는 글씨가 강물에 반쯤 잠긴 바위에 횡서로 흘려 쓴 ‘龍湖(용호)’다. ‘용이 사는 물’이라는 뜻이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桐江(동강)이라 적혀 있다. 동강은 부춘정을 지은 김기성의 호다. 가장 풍류 넘치는 글씨는 ‘三公不換此江山(삼공불환차강산·삼공과도 바꾸지 않을 곳이 이 땅뿐이다)’이다. 한말의 우국지사 송병선이 장흥 천관산을 유람한 뒤에 부춘정에 들렀다가 새긴 글이라는데, 삼공이란 중국 송나라 때 황제를 보좌하던 높은 벼슬로, 이 문장은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예찬하는 ‘조대(釣臺)’라는 송나라 때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탐진강 10대 정자의 하나인 부춘정이 가는 수목들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장흥 탐진강을 따라 가다보면 용호정, 창랑정, 사인정 등 스스로 도드라짐 없이 들어선 10개의 정자가 호젓이 자리해 찾는 이들에게 여유와 낭만을 선사한다.

■ 장천팔경과 바위에 새긴 글씨

전남 장흥의 천관산 아래에 온통 짙은 숲으로 둘러싸인 장흥위씨 문중의 제각인 장천재가 있다. 장천재 앞에는 계곡이 있다. 장천교 다리 아래서 차고 맑은 못 영은천까지 짧은 협곡에는 존재 위백규가 명명한 ‘장천팔경’이 있다. 서늘한 계곡을 거닐며 팔경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바위에 새겨놓은 풍류의 글씨를 찾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계곡의 크고 작은 바위에 장천동문(長川洞門), 활수연(活受淵), 월영담(月影潭), 정류조(淨流조), 세이천(洗耳泉), 탁영대(濯纓臺) 등의 글씨가 빼곡하다.

 

/ 문화일보 2021 박경일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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