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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순천 매곡동 탐매마을

by 구석구석 2022.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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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중의 산사도 아니고, 햇볕 따사로운 강변도 아니다. 전남 순천 고즈넉한 원도심 골목 오래된 주택 마당의 매화나무 두 그루에 홍매화가 가득 피었다. 홍매화가 만개했음은 먼발치에서 느껴지는 그윽한 꽃향기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집에 ‘홍매가헌(紅梅佳軒)’이란 현판을 달았다. ‘붉은 매화가 아름다운 집’이란 뜻이다. 등처럼 붉은 꽃을 단 매화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곳은 순천 매곡동의 김준선 순천대 교수, 아니 지난해 여름 정년퇴직했으니 ‘전(前) 교수’의 집 정원이다. ‘모든 일’은 김 전 교수 집 정원의 매화나무 두 그루에서 시작됐다.

https://youtu.be/QtngX0JbqPo

매곡동 탐매마을 영상

홍매가헌은 김 전 교수가 3대를 이어 살고 있는 집. 개인 주택이지만 마당만큼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개방정원’이다. 홍매화를 보러 오는 이가 많은 봄날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낮 시간에 한해 마당을 열어놓는다.

 

김 전 교수는 “아들이 여기서 자랐고 함께 살지는 않지만, 손주까지 드나드니 따져 보면 5대에 걸친 집”이라고 했다. 이 집의 매화나무는 김 전 교수가 학창시절 서울로 유학을 떠난 사이에 학교 교장이던 부친이 심은 것이다. 30년이 넘는 수령의 매화나무를 50년 전쯤 심은 것이라니 최소 80세가 넘는다.

 

“할아버지의 매화나무가 죽자 아버지가 다시 심은 매화나무예요. 그 전에 기막힌 수형(樹形)의 노거수 홍매와 백매가 한 그루씩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선암사에서 구해와 심으셨다고 했는데 나무도 근사하고, 꽃도 좋고, 향도 참 짙었지요. 지금까지 살았으면 명목(名木)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태풍으로 가지가 부러져 죽었어요. 나무가 죽자 허전해 하던 아버지가 어디선가 홍매화 나무 두 그루를 구해 대신 심은 게 지금 저만큼 자랐어요.”

 

해마다 일찍 피어 그윽한 향기를 뿜는 김 전 교수 집 정원의 두 그루 홍매나무가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마을의 값진 자원이 됐다. 두 그루의 홍매나무를 중심으로 순천의 원도심 매곡동에 ‘탐매(探梅) 마을’이 조성된 것. 이름처럼 ‘매화 핀 경치를 구경하는’ 마을이다. 남도 땅에 매화 한두 그루 없는 동네가 있을까. 하지만 매곡동 매화는 존재감이 남다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일찍 피어서’다. 똑같은 꽃이라도 봄에 저 홀로 이르게 피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 여린 꽃이 알리는 봄의 도래는 또 얼마나 감동적인가. 순천의 매화 중 첫손으로 꼽히는 선암사 매화를 보려면 한 달도 더 남았고, 낙안읍성의 매화도 아직 멀었다. 내륙에서 꽃소식이 가장 빠르다는 금둔사 매화조차, 올해는 지허스님이 장기 출타 중이어서 그런지 이제야 겨우 한두 송이 힘겹게 꽃망울을 열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매곡동 주택가의 홍매화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진작 붉게 피어나서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두 번째는 나무의 키가 크다는 것이다. 매실 수확을 목적으로 심은 과수원의 매실나무는, 가지를 쳐내서 키가 작게 키운다. 열매 수확을 쉽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매곡동의 매화는 오로지 꽃을 보기 위해 심은 것. 가지를 옥죄거나 쳐내지 않고 풀어서 키우니 성큼성큼 자라서 훤칠하게 크다. 과수원의 매실나무처럼 꽃눈이 촘촘하지 않지만, 본디 매화는 이렇듯 가지가 낭창거리고 꽃이 좀 성글어야 하는 법이다.

 



탐매 마을을 조성하면서 마을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받아 동네 주변에 홍매화 1000그루를 심었다. 두 그루 홍매화에서 시작한 꽃불이, 동네에 심은 매화나무로 옮겨붙게 된 것이었다. 마을 곳곳에 홍매화가 피고, 골목마다 미술 마을 프로젝트로 그리거나 설치한 벽화와 조형물이 들어섰다. 여기까지가 순천 원도심의 조용한 주택가인 매곡동 탐매 마을이 고즈넉한 봄꽃 여행지가 된 사연이다.

 

탐매 마을이 매화나무 두 그루에서 시작됐다고 했지만, 매곡동과 매화의 인연은 자그마치 5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매곡동의 ‘매곡(梅谷)’은 매화 계곡이라는 뜻. 이 동네의 중고등학교도 교명으로 ‘매산(梅山)’을 쓴다. 필시 무슨 연유가 있지 않을까. 다음은 이런 단서로 찾은 이야기.



경북 성주 출신의 배숙이란 사람이 있었다. 1516년생이니 500여 년 전 사람이다. 과거 예비시험 격인 사마시(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으로 7년 동안 있었지만,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해 벼슬자리에 나서지 못하다가 순천에 교수 직함을 받아 부임했다. 중앙에서 파견된 향교 등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지금으로 치면 공립학교 교사쯤이다. 그의 호가 ‘매곡’이었다. 배숙은 매화를 좋아해 순천의 거처에다 ‘매곡초당(梅谷草堂)’이란 현판을 내걸고 뜰에다 홍매화 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순천 매곡동이란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러고 보면 그때의 매곡동이나, 지금의 탐매 마을에 공통점이 있다. 500년의 시차를 두고 매곡동에는 배숙과 김준선이 집 뜰에다 매화나무를 심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교수다. 배숙은 그가 남긴 저서 ‘매곡집’에서 매곡초당에 기거하면서 ‘이른 봄 매화나무에 내리는 비(早春梅雨)’를 즐겼다고 썼는데, 김 전 교수도 비 내리는 봄날의 매화를 정취의 으뜸으로 쳤다.

순천 원도심에서 진행된 미술 마을 프로젝트는 3가지 테마로 진행됐다. 매화를 테마로 한 매곡동 말고도 이웃한 동네 금곡동에 두 가지 테마가 더 있다. 하나가 금곡동의 공마당 청수골로 대표되는 원도심 변두리 골목이고, 다른 하나는 금곡동 일대에 남아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자취다.

탐매 마을에 들렀다면 이웃 동네의 흥미진진한 원도심 골목 투어를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매곡동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에는 당시 선교사들의 자취를 모아 전시하고 있다. 전시품 중에는 선교사들이 들고 왔던 트렁크며 궤짝도 있다. 트렁크 한쪽에 있던 커다란 드럼통은 젖먹이 자녀를 위해 분유를 담아왔던 통이라고 했다. 이런 물건에서는 삶의 터전을 척박했던 이국으로 옮겨와 살았던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삶이 느껴졌다.

박물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1912년 선교사인 남편 존 크레인을 따라 순천에 온 플로렌스 여사가 남긴 책 ‘한국의 들꽃과 전설’이었다. 매산학교에서 산업미술을 가르쳤던 플로렌스는 한국의 들꽃을 좋아해 틈틈이 야외에서 꽃을 그렸는데, 그렇게 그린 그림에다 주민들에게 들은 전설을 채집해 우리 식물 얘기를 곁들여 영어로 쓴 최초의 식물도감을 펴냈다. 수채화로 그린 꽃 그림도 좋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채록해 기록한 꽃 전설도 흥미롭다. 초판본은 구할 수 없어서 박물관에는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지시로 복간됐다는 영문판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다 궁금했던 건 과연 육 여사는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다. 육 여사는 왜 이 책의 복간을 추진했을까. 우리 꽃을 소중하게 봐준 100년 전 푸른 눈의 이방인이 고마워서였을까. ‘한국의 들꽃과 전설’의 꽃 그림과 글은 금곡동에서 매곡동 기독교역사박물관으로 가는 길옆 축대에 모자이크 타일 벽화로 재현돼 있다.

 

/ 문화일보 2022.2 박경일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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