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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고양 원당동 서삼릉 희릉 예릉 효릉

by 구석구석 2022.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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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무덤은 크게 세 형태로 나뉜다. 왕(황제)과 왕후(황후)의 무덤인 능(陵),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의 무덤인 원(園), 여타 왕족(대군, 군, 공주, 옹주, 후궁)과 폐왕 또는 폐비의 무덤인 묘(墓) 등이다.

서오릉에서 서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왕릉군인 서삼릉(西三陵)이 있다. 이곳에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이자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孝陵),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의 예릉(睿陵)이 자리하고 있다.

의령원과 효창원/ 국가문화유산포털


서삼릉에는 세 기의 원이 있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소경원(昭慶園),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 장조(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의령원(懿寧園)이 그것이다. 또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의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를 비롯해, 왕의 후궁들과 왕자·왕녀들의 묘도 여기에 있다.

서삼릉의 능·원·묘 중 효릉과 예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전해온 것이다. 아울러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부 왕과 왕실 가족의 태실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서삼릉은 조선왕실 최대의 집장묘, 요즘 말로 하자면 공원묘지인 셈이다.

희릉 / 국가문화유산포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200호로 지정된 고양 서삼릉(西三陵)은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의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 처음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왕실의 무덤은 묻힌 사람의 신분에 따라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왕의 생모·왕세자·빈의 무덤은 ‘원(園)’, 대군·공주 등의 무덤은 ‘묘(墓)’로 구분되어 불렸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지칭한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 이외에도 3기의 원과 1묘(회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6기, 태실 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고양 서삼릉 효릉 능침 ⓒ문화재청

서삼릉 입구로 들어서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희릉(禧陵)으로 향한다. 희릉은 제11대 임금 중종(中宗)의 두 번째 왕비이자 첫 번째 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단릉이다.


중종에게는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등 세 명의 정비(正妃)가 있었다. 원비 신씨(1487~1557)는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남편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됐다. 연산군의 매부기도 했던 그녀의 친정아버지 신수근은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정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들의 압력으로 본인도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남편 중종이 즉위한 지 7일 만의 일이었다. 소생 없이 일흔을 넘겨 죽은 그녀는 친정 선영(현 경기도 양주 장흥)에 묻혔는데, 훗날 영조 때 단경왕후(端敬王后)로 추봉되면서 그 묘도 온릉(溫陵)으로 승격된다.

단경왕후의 뒤를 이어 첫 번째 계비가 된 장경왕후(1491 ~1515)는 중종반정의 공신인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의 딸이자 반정 주도세력이었던 윤임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반정을 주도한 외삼촌 박원종 등의 강압에 의해 단경왕후가 폐출된 후 후궁인 숙의에 봉해졌다가 다음 해에 왕비로 책봉됐다.

그녀는 중종과의 사이에서 딸 효혜공주와 아들 인종을 차례로 낳았는데, 1515년(중종 10) 인종(仁宗)을 낳고 7일 만에 산욕으로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가 된 지 8년 만이었다. 사후 그녀의 시호는 장경(章敬)으로, 능호는 희릉(禧陵)으로 정해졌다.

‘후의 경사를 넓힌다’는 뜻의 희릉은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읍(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조성됐다. 1537년(중종 32) 이문건과 김안로(金安老) 등이 ‘광(壙) 안에 악석(惡石)이 많이 있어 흉하다’고 주장함에 따라 지금의 위치(경기도 고양 원당)로 천장되면서 서삼릉 최초의 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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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 ‘효릉’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1545년(인종 1)에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고양 정릉(靖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했다. 인종의 능을 조성할 때 인성왕후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어 놓았다. 이후 인성왕후 박씨가 1577년(선조 10)에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78년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했다.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9개월의 기간을 재위한 인종은 기묘사화로 유명무실해진 현량과를 복구하고, 조광조를 복권시켜주었으나, 중종의 상을 치르면서 몸이 악화되어 1545년(인종 1)에 경복궁 청연루 소침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성왕후 박씨(재세 : 1514년 음력 10월 1일 ~ 1577년 음력 11월 29일)는 본관이 반남인 금성부원군 박용과 문소부부인 김씨의 딸로 1514년(중종 9)에 태어났다. 1524년(중종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종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명종 즉위 후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되었다. 1577년(선조 10)에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삼릉 희릉 능침 ⓒ문화재청

■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 ‘희릉’

희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며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노출시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주고 있다.

장경왕후 윤씨(재세 : 1491년 음력 7월 6일 ~ 1515년 음력 3월 2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순천부부인 박씨의 딸로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중종 1년(1506)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로 책봉되었다가, 중종의 첫 번째 왕비가 폐위되면서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됐다. 중종 사이에서 효혜공주와 인종을 낳았으며, 1515년(중종 10)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경복궁 동궁별전에서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삼릉 예릉 능침 ⓒ문화재청

■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 ‘예릉’

예릉은 조선 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철종장황제, 오른쪽이 철인장황후의 능이다. 예릉은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마지막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했다.

능제도는 양릉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제도를 취하고 있으며 능석물 양식상 융건릉(隆健陵)의 영향이 보인다. 즉, 융릉(隆陵)에서 8각 장명등과 4각 장명등의 운족양식(雲足樣式)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이루고 있다.

능전 3계(陵前三階)는 이미 2계로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으로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릉의 문석인・무석인(왼쪽), 장명등(오른쪽)(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회묘(懷墓), 연산군 생모 윤씨의 묘

서삼릉 내에는 후궁 묘역이 있는데 이곳엔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의 비였던 폐비 윤씨의 묘, 회묘도 있다. 함안부원군 윤기견의 딸이었던 윤씨(1455~1482)는 성종보다 두 살 연상으로, 1473년(성종 4) 후궁에 간택돼 숙의(淑儀)가 됐다. 이듬해 한명회의 딸로, 성종의 원비였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뜨고 2년 후 계비로 책봉됐다.

당시 실록에는 그녀가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검소한 데다 몸가짐이 겸손해 세 대비(정희·소혜·안순왕후)의 총애를 받았다’고 돼 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로는 다른 후궁들을 투기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성종 8)에는 그녀의 방에서 주술서와 비상을 바른 곶감이 발각되면서 폐출당할 위기에 처했다. 중신들의 간곡한 주청으로, 주술서와 비상을 반입한 궁녀와 사가에서 데려온 종에게만 죄를 물어 윤씨는 폐위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이미 성종과 인수대비의 미움을 산 그녀는 2년 후 임금을 경멸하고 투기한 죄 등으로 폐출됐다.

윤씨가 임금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내서 쫓겨났다는 건 실록에는 없는 얘기다. 그녀는 폐출 3년 후인 1482년(성종 13)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성종은 아들(연산군)을 딱하게 여겨 1489년(성종 20) 그녀의 묘에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고 묘지기를 두게 했다.

1494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부왕 성종의 묘지문을 읽다가 생모 윤씨가 죽기 전에 폐출됐음을 알게 된다. 그는 1497년(연산 3) 경기도 장단에 있던 폐비의 묘를 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경희의료원 자리)으로 개장해 회묘(懷墓)라 하고, 효사묘(孝思廟)라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 후에는 폐비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고 효사묘를 혜안전(惠安殿)으로 개칭했다. 또 회묘를 회릉(懷陵)으로 격상해 석물을 배치하는 등 왕릉 형식을 따라 능을 조성했다. 이렇게 추존됐던 윤씨는 2년 후인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모든 칭호가 삭탈되고 회릉도 다시 회묘로 격하됐다.

다만 석물은 그대로 남겨뒀는데 1969년 회묘를 회기동에서 서삼릉 경내 후궁 묘역 뒤로 이장하면서 함께 옮겨왔다. 한때 능에 세웠던 이 석물들 덕분에 회묘는 지금도 능 못지않은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회묘는 서삼릉 태실 권역에 포함돼 있어 태실 관람을 예약하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 한국아파트신문 2022 유병갑


한 맺힌 삶 간직한 채 세상 떠난 왕족들 묻혀

서삼릉에는 희릉(장경왕후), 효릉(인종), 예릉(철종) 등 세 기의 능 외에 소경원, 의령원, 효창원 등 세 기의 원이 있다. 

왕자와 왕녀의 묘역

의령원(懿寧園)은 영조의 손자이자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원이다. 그는 1750년(영조 26) 세자빈 홍씨(훗날 혜경궁)에게서 태어났다. 이듬해 왕세손으로 책봉됐으나 다음 해 세 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손이 죽자 시호를 의소로 정하고, 양주 안현(鞍峴) 남쪽 기슭(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장사지내고 의소묘라 했다. 1870년(고종 7) 의령원으로 격상됐고, 1949년 서삼릉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효창원(孝昌園)은 정조의 첫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원이다. 그는 1782년(정조 6) 후궁 의빈 성씨가 낳았다. 1784년 왕세자로 책봉됐으나 2년 뒤 홍역으로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가 죽자 시호를 처음에는 온효(溫孝)로 정했다가 문효로 고쳤다. 문효세자는 고양 율목동(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장사지내고 효창묘라 했다. 1870년(고종 7) 효창원으로 격상되고, 1944년 서삼릉 현재의 자리로 이장했다.

빈귀인묘역

서삼릉에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있는데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 다만 공개 제한지역인 두 묘소는 따로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하나는 태조의 손녀 경혜옹주(敬惠翁主)와 그녀의 남편으로, 한산 이씨 이종학의 아들이자 목은 이색의 손자인 이숙무의 쌍분 묘다. 다른 하나는 소현세자의 두 아들 경선군(慶善君)과 경완군(慶完君) 형제의 묘다. 가슴 아픈 가족사를 간직한 채 역시 공개 제한지역인 아버지 소현세자의 소경원 근처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1645년(인조 23) 청나라 심양에서 8년여의 볼모 생활 끝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두 달여 만에 급서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맏아들로 원자였던 석철을 제치고, 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을 새 세자로 세웠다. 이듬해 인조는 죽은 소현세자의 빈 강씨를 폐출한 후 사사했다. 대전 가까이서 고함을 지르고 문안도 폐지하는 한편, 궁궐에서 저주를 행하고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죄였다. 사사된 강빈에게는 친정 형제들과 함께 왕위를 바꾸고자 역모를 꾀했다는 죄까지 더해졌다. 

다음 해 인조는 자신의 어린 세 손주 석철(12세)·석린(8세)‧석견(4세)도 폐서해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위로 두 아들은 1년여 만에 유배지에서 잇달아 병으로 죽어 이곳 아버지 근처에 묻혔다. 살아남은 막내는 효종 즉위 후 강화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유배에서 풀려나 1659년(효종 10) 경안군(慶安君)에 봉해졌다. 이때 장남도 경선군으로 추증됐다. 어머니 강빈은 1718년(숙종 44)에 추복돼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받았다. 차남은 고종 때에 이르러 경완군으로 추증됐다. (1665년(현종 6)에 요절한 막내 경안군의 묘는 고양시 대자동에, 어머니 민회빈의 영회원(永懷園)은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다.)

이 밖에 서삼릉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각지에서 옮겨온 왕자·왕녀, 후궁들의 묘역이 있다. 왕자·왕녀 묘역에는 조선 및 대한제국 왕·황제의 왕자묘 8기와 왕녀묘 14기 등 총 22기의 묘가 모여 있다. 또 빈·귀인 묘역에 16기, 숙의 묘역에는 5기의 후궁묘가 있다. 각 묘역은 각각 하나의 곡장(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서삼릉 태실

서삼릉에는 조선 왕실의 태실이 있다. 태실은 왕실에서 태어난 아기의 태반과 탯줄을 담은 태항아리가 묻힌 석실(石室)이다. 왕실에서는 태가 주인공의 삶과 국운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 이를 소중히 갈무리해 전국 길지 명당에 묻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였던 1929년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발굴, 수습해 태항아리를 서삼릉으로 이전했다. 당시 ‘일(日)’자형으로 조성됐던 담장과 일본식 철문을 철거하고(1995), 1996년 발굴 조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됐다. 이곳에는 왕·황제·황태자의 태실 22기, 왕실·황실 가족들의 태실 32기 등 총 54기의 태실이 한곳에 모여 있다. 전국 최다 규모의 태실군이다.

성주 선석산태실

서삼릉 태실군 다음으로 많은 태실이 있는 곳은 성주 선석산(서진산 또는 누진산)에 있는 세종대왕자 태실이다. 선석산 태실은 세종대왕이 직접 장소를 선정했다고 한다. 1438년(세종 20)부터 이곳에 조성된 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열여덟 왕자와 원손 단종의 태실까지 모두 19기의 태실이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자 태실에는 특기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왕자 한 명의 태실이 더 있는 것이다.

장남 문종의 태실은 여기에 있지 않고 예천 명봉사에 있다. 단종의 태실은 세자로 책봉된 후 성주 가천 법림산으로 옮겨 새로 만들었으므로 이곳의 태실은 비어 있는 태실이다. 따라서 19기의 태실에서 단종의 빈 태실을 제외하면 나머지 18기는 왕자의 태실이다. 이는 태실이 이곳에 없는 문종을 더하면 세종대왕의 왕자는 18명이 아니라 19명이라는 얘기인 셈이다.

세종대왕은 소생이 없었던 후궁들을 제외하고, 왕비 1명과 후궁 5명 등 6명의 비빈(妃嬪)에게서 모두 18명의 왕자를 뒀다는 게 기록상 정설이다. 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는 문종(장남)·세조(차남) 두 왕과, 안평(3남)·임영(4남)·광평(5남)·금성(7남)·평원(9남)·영응(15남) 여섯 대군을 낳았다. 후궁인 영빈(令嬪) 강씨는 화의군(6남)을, 신빈(愼嬪) 김씨는 계양(8남)·의창(10남)·밀성(12남)·익현(14남)·영해(17남)·담양군(18남) 등 6남을, 혜빈(惠嬪) 양씨는 한남(11남)·수춘(13남)·영풍군(16남) 등 3남을 낳았다.

그러면 이상 18명 왕자의 이름에 없는 한 명은 누구일까? 태실 안내도에는 신빈 김씨의 아들로, 왕자의 군호는 없이 당(瑭, 1442~?)이라고만 돼 있는 태실 주인의 이름이 하나 더 있다. 실록에 17남 영해군이 장(璋)에서 당(瑭)으로 이름을 바꾼 기록이 있으니 동일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瑭)과 영해군이 출생한 해도 각각 1442년과 1435년으로 다른 데다 태실도 따로 있으니 두 사람이 동일인은 아닌 듯하다. 설혹 동일인이라 해도 한 사람에게 두 개의 태실이 있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왕자 당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니 단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조선 왕실의 족보라 할 ‘선원록(璿源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왜란 후 전주사고(史庫)에 남아 있던 사본을 토대로 몇 차례의 수정·보완 작업을 거쳐 1680년에 완성됐다. 아마도 소실되기 전 초기본에는 있었을 세종대왕의 19번째 왕자 당(瑭)의 이름이 후대본에서 누락됐을 수도 있다. 아니면 왕자가 너무 어려서 죽어 처음부터 족보에 올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 한국아파트신문 2023 유병갑

원당역 인근 행주기씨 제실 앞을 지나면 서삼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숲길이 나오고 넓고 평평한 서삼릉 진입로가 나온다. 솔개약수터에서 시원한 약수 한잔 마시고 한북정맥 산길에 오르면 푸근한 숲길이 시작된다.

 

서삼릉누리길에서는 한적한 산길을 걷는 평화로움과 세계문화유산 서삼릉을 답사하는 체험학습을 겸할 수 있다. 원당종마목장 전경.

▴코스 : 삼송역 - 솔개약수터 - 서삼릉,원당종마목장,농협대학 - 한국스카우트연맹 중앙훈련원 - 수역이마을먹거리촌 - 원당역
▴거리 : 총 8.28km
▴소요시간 : 약 2시간 15분

/ 경기뉴스포털 이준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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