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효행로(안녕동)에 있는 융릉과 건릉은 용주사와 함께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유적이다.
융건릉은 화성팔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두 개의 왕릉과, 왕릉을 감싼 기품 있는 솔숲은 역사의 향기가 진동한다. 2009년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특히, 두 개의 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사색과 산책의 즐거움이 넘치는 오솔길이다. 싱그러운 솔숲 사이로 난, 빗질이 잘 된 오솔길을 걸으면 목을 탁 쏘는 맑은 공기가 느껴진다.
입구에 들어서 소나무와 참나무 숲길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면 두 개의 갈림길이 있는데, 오른쪽은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홍씨)를 합장한 융릉, 왼쪽은 제22대 임금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건릉으로 통한다. 넉넉한 걸음으로 1시간이면 두 능을 돌아볼 수 있어 발길도 가볍다.
■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홍씨)의 융릉
융릉은 장조(莊祖)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의 능이다. 근처에 위치한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조는 1735년(영조 11) 창경궁에서 탄생해 그 이듬해에 세자에 책봉되고, 1762년 28세 때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영조가 뒤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고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의황제(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간택되었다가 세자가 죽은 뒤 1762년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정조 즉위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다. 1815년(순조 15) 80세로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1899년 의황후(懿皇后)로 추존되었다.
1762년(영조 38)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묘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며,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였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는 특징이 있다.
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나 이듬해 세자로 책봉됐다. 부왕 영조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세자에 대한 기대가 컸다. 1749년 영조의 명으로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노론 벽파가 그를 모함했다. 이것이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 탓이었는지 그는 정신질환까지 앓게 된다. 1762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정아버지 김한구, 영의정 김상로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허물 10여 조목을 고하면서 그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은 처형하고, 세자에게는 자결할 것을 명한다.
세자가 이를 따르지 않자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든 후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죽게 한다. 그가 죽은 후 영조는 세자로서 그의 위호를 회복해주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그는 사도세자로 불리게 된다.
장조와 함께 합장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홍씨(1735~1815)는 영풍부원군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744년(영조 20) 세자빈에 책봉됐다. 1762년 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혜빈에 봉해졌다가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혜경궁으로 올려졌다. 역시 고종에 의해 헌경의황후로 추숭됐다.
융릉은 능침(봉분)에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으며, 병풍석 위에 얹는 인석을 연꽃 모양으로 조각한 것이 독특하다.
화성 84번지방도-송산리 한식마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융건릉 용주사산사체험 (tistory.com)
■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건릉
건릉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1753~1821)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조의 아버지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장조(葬祖, 사도세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의 합장묘인 융릉(隆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건릉은 원래 현륭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 사망 후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정조선황제는 추존 장조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1752년(영조 28)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762년(영조 38)에 아버지 장조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을 겪었다. 1762년에 영조는 정조에게 왕위 계승의 명분을 주기 위해 일찍 세상을 뜬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부터는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먼저 아버지 장조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노력하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를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 설치,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등) 실시,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임진자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고, ‘증보동국문헌비고’ 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론이 중시되는 학문에 치우치지 않고, 실학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가져왔다.
가난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을 공포하고, 제도 개편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1800년(정조 24)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올렸으며,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정조선황제로 추존되었다.
효의선황후 김씨는 본관이 청풍인 청원부원군 김시묵과 당성부부인 홍씨의 딸로 1753년(영조 29)에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에 왕세손빈으로 책봉되었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정순왕후 김씨와 헌경의황후 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내어 수차례에 걸쳐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신 것이 마음속에 지통으로 남아있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하며 모두 거절하였고, 1820년(순조 20)에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 후 1821년(순조 21)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매표소를 들어서면 곧장 갈림길이 나온다. 건릉은 왼쪽, 융릉은 오른쪽이다. 어느 쪽으로 돌아도 상관없다. 두 능 사이에는 솔숲과 참나무숲 사이로 난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원하는 길을 선택하면 된다. 왼쪽 건릉으로 방향을 틀면 기품 있는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다. 그 사이로 난 길은 여럿이 함께 걸어도 좋은 황톳길이다. 가을에도 빗질이 곱게 되어 있어 걷는 맛이 좋다.
길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는 곳부터 솔숲은 뒤로 물러나고 참나무숲이 다가선다. 여름에는 싱그러운 그늘을, 가을에는 수북한 낙엽이 쌓이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몇 걸음 떼지 않으면 건릉이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능은 첫눈에도 아늑하다. 산인지 언덕인지 모를 야트막한 둔덕에 능이 들어섰다. 능이 들어선 자리만으로도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융릉으로 가는 둘레길은 건릉에서 돌아 나오다 오른쪽으로 빠진다. 능 초입의 홍살문에서 50m쯤 내려오면 오른쪽에 ‘융릉 산책로’라 적힌 이정표가 있다. 그 길로 들어서면 건릉과 융릉을 감싸고 돈 산의 능선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둘레길은 길의 폭이 좁아진다. 둘이 나란히 걷기에 딱 좋다. 그래서 더욱 걷는 맛이 산다.
갈림길에서 150m쯤 가면 능선에 올라선다. 숲의 주인은 상수리나무에서 소나무로 수시로 바뀐다. 능선에서 만나는 소나무는 융건릉으로 드는 초입에 늘어선 기품이 있는 소나무와는 거리가 멀다. 제멋대로 뒤틀리면서 자란 것이 대부분이다. 그 솔숲에 조그만 돌탑이 서 있다. 벤치도 있다. 벤치는 오솔길 중간중간에 있어 다리쉼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능선을 따라가는 길도 편안하기만 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거의 없다. 가벼운 산책, 그 이상 힘을 써야 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오솔길은 융릉에 닿기 전에 두 번 길이 나뉜다. 두 길 모두 건릉과 융릉 사이로 이어진다. 산책을 짧게 끝내고 싶다면 갈림길에서 내려서면 된다.
건릉을 출발해 30분이면 융릉 입구까지 갈 수 있다. 여전히 호젓함이 있는 길은 걷는 즐거움을 준다. 융릉을 코앞에 두면 다시 활엽수 거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숲을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융릉이 있다.
융릉 역시 건릉처럼 누가 봐도 최고의 명당임에 틀림이 없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좋을 수밖에. 왕릉을 지키고 선 문인석과 무인석은 멀리서 봐도 위엄이 느껴진다. 융릉에서 융건릉 입구까지는 400m 거리. 다시 기품 있는 소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걷는 길이다.
/ 자료 - 경기뉴스광장 2022.3 이준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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