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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도

화성 84번지방도-송산리 한식마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융건릉 용주사산사체험

by 구석구석 2008.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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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화성은 바닷길이 열리는 제부도로 유명하지만, 용주사와 융건릉도 가벼운 하루 나들이로 적당하다.
특히 융건릉은 눈이 쌓였을 때 경치가 아름답다고 해서 융건백설(隆健白雪)을 화성팔경 중 제1경으로 꼽는다. 또 이번 여행 코스인 융건릉과 용주사는 조선 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한과 그 아들이었던 정조의 효심이 어려 있어, 역사 공부를 겸한 나들이로도 좋다.

봉담읍 수기리 주말농장 한식마을  

조선 제22대 정조대왕과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사적 제206호 융릉과 건릉이 위치하고 있는 주말농장은 해물탕, 쌈밥, 갈비 등 향토음식을 맛볼 수 있다. 

용주사를 품고 있는 화산은 높이가 108미터에 지나지 않는 구릉 같은 산이다. 하지만 이 산의 수림은 웬만한 산에 비길 바가 아니다. 화산은 숲으로 이루어진 섬나라다. 화산의 숲은 용주사로 하여 빛을 더한다. 낙락장송 곁의 바위 같은 절이 바로 용주사다.

 

길은 용주사라는 현판을 단 내삼문(內三門)으로 이어진다.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세 칸의 문으로 이루어져서 붙은 이름이다. 매력적인 것은 대웅보전 뒤 담장 너머로 마치 광배(光背)처럼 늘어선 소나무들로 진입부의 소나무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곧지도 심하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 이 소나무를 보면서 조선의 22대 임금이었던 정조와 관련된 일화를 떠올려 본다.

 

화산 숲을 제대로 느끼려면 융건릉(사적 제206호)을 찾아야 한다. 본디 융건릉은 장조(莊祖·사도세자)와 그의 비인 혜경궁 홍씨의 능인 융릉이었다. 이후 정조와 그의 비인 효의왕후가 묻힌 건릉과 아울러 융건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화산릉이라는 별칭이 있기도 하다.

융릉과 건릉으로 가는 화산 숲길은 잘 가꾼 숲과 원시림의 분위기를 함께 느낄 수 있다. 활엽수와 침엽수의 조화도 아름답다. 정조의 효심 덕분이다. 화산과 용주사와 융건릉은 한 몸이다.

용주사에서 융건릉을 가려면 사천왕문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1.5Km 가면 안내판이 보인다. 가는 길의 느티나무 가로수도 운치 있다. 걸어서 가도 입구까지 20분 정도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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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사도세자와 함께 묻힌 정조 >

문화재청 융릉관리소 031-222-0142  http://hwaseong.cha.go.kr

경기도 화성군, 화산 기슭에 자리한 융건릉(隆健陵)은 융릉과 건릉을 합해 부르는 이름이다. 융릉은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로,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합장능이고, 건릉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능이다.


정조는 왕으로 즉위한 후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무덤을 이곳 화산으로 이장했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원래 경기도 양주 배봉산 기슭(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것을 이 자리로 옮기면서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가, 그 뒤 사도세자를 장조(莊組)로 추존하고 다시 융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융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용주사를 중수해 융릉의 원찰로 삼고, 정조 스스로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한다. 이런 이유로 정조는 효성이 지극한 임금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죽은 후에도 아버지 곁인 건릉에 묻혔다. 융건릉은 보통의 다른 릉에 비해 규모가 크고,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울창해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길이 갈라진다. 

오른쪽이 융릉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이 건릉으로 가는 길이다. 양쪽 모두 500m 정도씩 걸어 들어가야 릉을 만나게 되는데, 융릉 쪽으로는 소나무 숲이 일품이고 건릉 쪽으로는 곧게 뻗은 상수리나무 숲이 멋지다. 

 


융릉을 먼저 돌아보고 다시 건릉까지 돌아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30분 정도. 눈이라도 한 번 내려서 융건백설(화성8경)의 절경을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가족들과 함께 호젓하고 쓸쓸한 숲길을 걷는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정조대왕은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죽음을(뒤주속에 갇혀 죽음) 애석해하며 양주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겼는데 어느날 아버지의 능주변 소나무에 송충이가 대단히 번식하여 소나무를 갉아 먹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행차를 서둘러 산에 와보니 송충이의 기승이 목불인견이라, 정조가 진노하여 송충이를 잡아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 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고 꾸짖고 돌아서자 천둥번개와 함께 장대비 가 쏟아져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장조는 이복형인 효장세자(추존 진종)가 요절하고 영조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태어나 2세 때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에 뛰어나 부왕을 대신해 정무에 임했다. 하지만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뒤주 속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영조는 28세 나이에 비참하게 죽은 아들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면서 시호를 사도(思悼)라 했다. 

 용주사는 다른 유명한 절들과는 형태가 조금 다른, 조선 후기 왕실 원찰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우선 사찰 자체가 도로변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주문 주위로 담장이 있고, 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삼문각이란 문이 있다. 

또 대웅전 앞이 아니라 천보루(天保樓)라는 누각 앞에 석탑이 있으며, 천보루 역시 다른 사찰에서는 찾기 힘든 회랑이 양쪽에 연결되어 있다. 또 은중경탑과 효성전이 있는 점도 다른 사찰과는 다르다.
그러나 고즈넉한 사찰의 분위기는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이다. 정문을 지나 삼문각 앞까지 이어지는 길과 대웅전 앞의 2층 누각인 천보루 앞의 겨울 풍경은 호젓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경내의 문화재로는 용주사 동종(국보 제120호), 회양나무(천연기념물 제264호), 금동향로(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청동향로(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용주사 상량문(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호), 대웅전후불탱화(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 불설부모은중경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호) 등이 있다.

 

사찰내의 범종은 재료는 동이며 무게 2.5t 높이 1.4m 구경 87cm로써 고려시대 범종으로서는 한국종의 양식을 가장 충실히 갖추고 있는 종으로서, 정조의 애절한 효심이 깃든 용주사의 "불성부모은중경"과 함께 자랑거리이다.

 

용주사는 정조임금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융건릉으로 옮긴 후, 이 자리에 있던 갈양사라는 절을 크게 고치고 이름을 용주사로 바꾸었다.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로 바꾸게 된 것은, 절의 낙성식 날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용주사는 융릉의 원찰인 셈인데, 원찰이란 왕릉 가까이에 있는 절로 죽은 임금의 내세를 비는 역할을 하는 절을 말한다. 정조임금은 아버지의 무덤을 융릉으로 옮기고 가까이에 있는 용주사를 원찰로 삼아 비명에 간 아버지의 넋을 위로했던 것이다.

 

 용주사 회양목은 나이가 약 200년이며, 높이는 4.6m이다. 조선 시대 정조(1776 ∼ 1800, 재위)가 부왕인 장조[사도세자]의 능 근처에 용주사를 지을 때 손수 심은 기념수라고 전해오고 있다. 흔히 회양목으로 불리는 회양나무는 늘푸른 작은키 나무[常綠 闊葉 灌木]로 나무의 키가 5 ∼ 7m 정도로 자라고 전국의 석회암지대에 자생한다.

 

회양목이라는 이름은 이 나무가 북한 땅인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회양목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추측한다. 정원의 가장자리나 통로의 양옆에 동그랗게 깎아 놓는 나무가 대부분 회양목이다. 4 ∼ 5월에 꽃이 피고 6 ∼ 7월에 열매 맺는다. 목재는 재질이 굳고 가공성이 좋아 조각재 등으로 널리 사용되며, 도장 재료로 유명하여 도장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5호 '용주사병풍'풀과 나무의 모습을 채색하여 그린 4폭 병풍으로, 각 그림의 크기는 가로 65.5㎝, 세로 222.5㎝ 이다. 원래는 8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폭에는 오동나무, 단풍나무, 매화, 모란 등 각기 다른 초목을 한 종류씩 그려 놓았는데, 오동나무를 제외하면, 각 폭마다 짙은 묵으로 그린 기이한 모습의 돌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1호 금동향로는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용주사에 내려준 향로이다

. 4면으로 된 몸체의 각 면에는 순금으로 덩굴무늬를 만들어 부쳤고, 사각으로 된 뚜껑에도 금 장식을 하였다. 뚜껑 꼭지 부분의 순금 장식물은 없어지고, 붙였던 흔적만 남아있다. 향로는 4개의 높다란 다리가 받치고 있으며 용모양이 조각되 있다. 

 

용주사와 융건릉을 돌아보는 코스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벼운 한 나절 코스로 적당하다. 휴일날 아침에 푹 자고 일어나도 얼마든지 돌아볼 수 있다.

융건릉(031-222-0142)의 입장시간은 동절기인 요즘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일이다. 입장료는 어른 400원, 청소년, 어른이 200원이며, 주차료가 2000원이다.
용주사(031-234-0040)는 입장료가 어른 1000원, 중고생 800원, 초등학생 500원이며, 주차료는 없다.

 

용주사와 융건릉 근처에는 이렇다할 음식점도 없다. 가까운 길이니 내려가거나 올라올 때 수원에 들러 유명한 수원 왕갈비를 먹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화성 용주사 효행박물관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 중 인간성과 인류도덕의 중심이 되는 효사상이 살아 숨쉬는 곳, 용주사.

  

정조대왕의 효심에서 비롯된 만큼 비명에 가신 아버님 사도세자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여 중창된 사찰로서, 전강대선사께서 개창하신 중앙선원에서는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이 용맹정진하는 터전으로서 수행과 효심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임과 동시에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교육장이기도 합니다. 부모은중경, 봉불기복게 등을 중심으로 박물관의 기본 주제를 효행으로 잡아 넓지 않은 전시장 규모임에도 목판실습실을 두어 은중경과 국보 120호인 고려동종에 새겨져 있는 비천상과 삼존불상을 직접 인출해보고, 탁본도 실습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용주사 산사체험 031-234-0040 http://www.yongjoosa.or.kr/

 

정조대왕의 효심으로 새워진 용주사는 그에 알맞게‘ 효’를 알아가는 것을 템플스테이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용주사만의 독특한 프로그램은 해질 무렵 더욱 무르익는다. 은은하고 장엄한 불교음악이 흐르는 동안 촛불을 붙여 기도를 드리고 사찰의 탑과 경내를 돌며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일깨우는 시간을 갖는다. 부모님의 얼굴을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 시를 낭독하는 시간 경내는 엄숙함과 감동으로 가득하다. 또한 1배에 염주 한 알을 끼우며 108배를 드리고 명상음악 속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산사에서의 짧고도 긴 하루가 저물어간다. 오랜만에 전통 사찰에서 보내는 하룻밤 또한 참가자들에게 신선한 시간이 된다.

해가 뜨기 전인 새벽2시반에 벌써 템플스테이의 둘째 날이 시작된다. 도량석을 돌며 청량한 공기를 입과 코로 호흡하고 타종을 함으로써 아침을 깨운다. 아침을 맞이해 다시 부모은중경을 독송하는데 이미 하루간의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통해 부모님의 은혜를 돌이켜 본 참가자들 중 다수가 눈물을 보이고는 한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어제 배운 발우공양을 좀 더 능숙하게 하고 난후 스님과 함께 차담을 나누며 이틀간의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마무리 짓게 된다. 사찰에서의 이틀은 느릿하고 조용히 그렇게 지나간다. 오해간만에 자연속의 사찰에서 수행자의 일상을 경험하는 일만으로도 특별한 주말이 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동안 갖지 못했던 명상과 수행의 시간을 통해 몸과 마음의 휴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융건릉, 용주사, 수원화성은 정조가 펼친 마음

이어 정조대왕은 화성(華城)을 축조했다. 1794년 1월에 착공해 1796년 9월 10일에 완공했으니 수원화성의 근간에는 효심이 깔려 있다. 아버지 묘소 현릉원을 자주 찾게 되면 행궁이 있어야 했고, 더 나아가 한양에 있는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가진 집권 세력을 견제하고 제거하며 자신의 정치적 꿈을 펼칠 새로운 수도 건설도 필요했다. 성곽 전체길이는 5.52km이며, 4대문을 내고 암문, 수문, 포루, 각루 등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 있게 배치하였다.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활용하는 등 당대 최고의 건축기술과 과학기술이 총동원 되었으니 수원화성은 조선시대 성곽 중 가장 과학적이고 치밀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하다. 정조는 낙남헌(落南軒) 뜰에서 문무 과거시험을 실시하고, 새로운 화약무기를 실험했으며, 서장대에 올라 장용영 군사들의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지휘했다.

정조대왕 능행차 재연행사

정조 22년(1798)에 기록된 ‘화성능행도’를 보면 정조임금이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창덕궁을 출발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현릉원에 성묘하고, 수원화성 봉수당(奉壽堂)에서 혜경궁께 진찬례를 연 후 다시 궁으로 돌아오기까지 8일 동안의 일들이 깨알같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혜경궁과 사도세자가 동갑이니 어머니의 회갑은 곧 돌아가신 아버지의 회갑이기도 했다. 지금은 화성(華城)이 수원시로, 융건릉 용주사는 화성시로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당시는 융릉과 용주사, 수원화성은 같은 영역이었으며 정조의 발길 닿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곧, 정조가 꿈꾸는 도시였다.

 

찾아 가는 길

용주사와 융건릉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찾기 쉽다. 경부고속도로 기흥 나들목을 나와 바로 만나는 도로에서 우회전한 뒤 다시 우회전하자마자 만나는 사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고속도로 밑을 지나, 고가차도를 지나 계속 직진한다. 이 일대가 삼성전자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계속 직진하면 반월삼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도 직진에 가까운 우측 길을 택한다. 이 길을 곧장 달리면 반월교차로라고 이름 붙은 삼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병점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좌회전하여 5분쯤 달리면 좁은 도로를 지나 병점사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이 병점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바로 만나는 병점지하차도사거리에서 84번 지방도로 쪽으로 좌회전한다. 좌회전하여 고가차도를 지나 계속 달리면 안녕삼거리가 나온다. 이 안녕삼거리에서 우측 좁은 길로 들어가서 조금만 가면 용주사가 나온다. 용주사에서 나와 갔던 방향으로 계속 가면 융건릉이 있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궁내동 톨게이트에서 약 1시간 정도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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