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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북도

충주 단월동-임충민공충렬사 임경업장군 충렬사

by 구석구석 2015.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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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시 충열1길 6 043 사적제189호 임충민공충렬사 043 850 5163

 

 막내딸 충주의 건국대캠퍼스에 미술로 수시지원을 하여 오전에 태워다주고 실기보는 5시간동안 대기를 해야 하기에 충주를 둘러 봤는데 제일 가까운 임경업장군을 기리는 충렬사를 방문해 본다.

 

충렬사 안내도

 

충렬사는 조선 제16대 인조때의 명장 임경업장군의 얼을 기린 곳으로 1697년 사당을 세웠고, 1726년(영조2)에 장군의 유상을 모시고 1년 뒤 충렬사에 사액이 내려졌으며, 1747년(정조15)에는 이제달천충렬사비가 각각 건립되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하마비

 

1978년 성역화하였으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군의 호국충절의 숭고한 기상과 애국정신을 심어 주는 산 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충렬사정문

 

임경업장군은 1594년 11월 2일 충주 달천에서 출생하교 광해군 10년인 1618년 무과에 급제한 이후 이괄의 날을 평정하고 전라도 낙안군수가 되었다.

 

이후 검산산성방어사, 청북방어사겸 영변부사, 의주부윤, 평안도 병마절도사겸 안주목사, 정헌대부를 지냈으며 청나라의 강요로 1641년 관직사탈을 당했고 1646년 6월 20일 심기원의 모반에 연루되어 53세에 장살되었으며 숙종23년인 1697년에 특명으로 관직을 회복했다.

 

 

 

충렬사 삼문

 

 

 

 

충렬사 담장의 이끼

 

 

호수가에서 보는 충렬사

 

 

충렬사전경

 

 

박정희대통령이 기념식수한 주목

 

 

비각. 충렬사비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272호

 

충민공 임경업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791년에 왕명으로 세워진 비로 비신의 크기는 높이 183센티, 너비71센티, 두께 42센티로 화강암이며 앞뒷면에 각자하였다.

 

임장군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던 중 죽게 되었고 그 후 신원이 복구되자 그이 충절과 업적을 기리고자 사당을 세웠다. 정조가 친히 글을 지어 새긴 비로 나라에 큰 일이 있을때 비석의 글씨에서 땀이 흘러나와 명주로 닦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강당

 

 

 

 

임경업장군의 사당

 

 

충렬사현판

 

 

 

▲ 사당입구에 비치된 방명록과 향. 성냥이 비치되어 있어 예를 올리고 향도 하나 올린다.

 

임경업장군의 영정.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69호

 

1640년 장군이 청나라 지원병으로 주사상장이 되어 명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반청친명의 확고한 신념으로 활촉과 철환을 빼고 공격하여 명나라를 은밀히 도와주었으므로, 명의 장수가 화사를 보내 2폭을 그렸는데 1폭은 명황제에게 전달하고, 1폭은 장군에게 준 것이 전해지고 있다.

 

유물전시관

 

 추련도. 충북 유형문화재 제300호

 

임경업 장군이 패용하던 칼로 역사적 기술사적 가치가 큰 유물이다. 이 칼의 칼날은 철, 손잡이와 칼집은 목재이고 목재를 고정시키는 장식은 황동과 동으로 되어 있다. 코등이는 얇은 철판으로 제작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주석 납으로 합금하여 도금한 것이 특징이다.

 

칼 배의 양면에 한시가 음각 점선조로 28자가 새겨져 있다.

 

시호시래부재래 - 때여, 때는 다시 오지 않나니

일생일사도재연 -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은 바로 여기 있도다.

평생장부보국심 - 장부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삼척추련마심년 - 삭자 추련도를 십년이나 갈고 갈았도다.

 

전시된 유품

 

충렬사의 현판으로 숭정기원후 정미년(1727년. 영조3)에 사액 받은 현판인데 하단의 패인 부분은 영조의 낙관이 있었던 자리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낙관을 삭제 손상시킨 흔적이다.

 

 

 

 

 

 

 

사당한켠의 호수

 

 

바닥에 수북히 쌓인 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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