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 마을~피나무재~국사봉~산불초소~봉산~봉산 남릉~죽전 마을로 이어지는 10.2㎞ 구간. 5시간이 빠듯하게 걸리는 산행길이다.
국사봉 정상엔 하늘 받친 바위기둥
저 너머 산이 있다. 아스라이 멀리. 한번도 가 보지 않은 산. 언젠가 한번은 가고 싶은 산. 구름에 덮힌 그 산에 오른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지만 상상 속의 즐거움은 현실의 괴로움이 된다. 그래서 개척산행은 힘들다.
의령에는 이름난 산이 많지만 국사봉(國師峰·688m)은 독특한 산이다. 국사봉 정상에 올라서면 자굴산 한우산(찰비산) 만지산이 한 눈에 보인다. 북쪽으로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천황산과 미타산이 훤하다. 다들 쟁쟁한 산이니 국사봉 쯤은 기가 죽을 만도 하지만, 막상 올라보니 기묘한 바위들과 탁 트인 조망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국사봉 산행은 전통 한지로 유명한 의령군 봉수면 서암 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의령과 합천의 경계이기도 한 봉수면 서암 마을은 그대로 풀이하자면 서녘바위다. 서암 마을회관과 한지전시관 사이에 서 있는 개 모양의 개바구(개바위)가 있다. 옛날 국사봉 장수와 만지산 장수가 힘자랑을 하면서 이 돌을 던지고 또 되받아 던지다가 그만 떨어져 꽂혔다는 것이다. 그럼 무승부인 셈인가.
'개바구' 옆에서 신발끈을 고쳐 신고 산행을 시작한다. '한지 시배지'라고 크게 적힌 마을 어귀를 지나서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계곡에는 겨울인데도 물이 제법 흐른다. 골이 깊다는 증거이다. 300년 넘게 마을을 지키고 선 팽나무 세 그루를 지나니 삶은 닥풀을 씻던 커다란 웅덩이가 있다. 넓직한 골짜기 초입에는 닥종이를 처음 만든 유래 표지판이 있다.
고려시대 국사봉 중턱에 대동사란 큰절이 있었다. 이 절의 설씨 성을 가진 주지 스님이 야생 닥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썼다. 껍질이 질긴 것을 발견하고 개울물 속에 한나절 담갔다가 돌로 찧고 너럭바위 위에 얇게 펴서 말려 닥종이를 만들었다. 주변 사람들까지 이를 배워 인근 마을들이 지금도 한지 생산지로 유명하다.
마을을 벗어나자 논둑길에 이정표가 잘 서 있다. 오름길로 접어든다. 피나무재에 올라서는데 40분이 걸렸다. 막판에 고도를 급격히 높였다. 피나무재부터는 능선이다. 눈길이 점점 많아진다. 설날 전에 내린 눈이 여태 녹지 않았다. 20분을 더 걸으니 병풍바위라고 하는 큰 절벽이 있다. 절벽 위는 평평해 쉬어가기 좋다. 한 5분을 더 걸으니 오른쪽에 봉암사가 있다.
3년 전까지는 국천사(國天寺)였다. 주지 지오 스님은 국천사가 "나라 다음에 하늘이 있으니 격이 맞지 않다"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이름을 바꿨다고 했다. 국사봉에 오르면 인근 7개군이 다 보이니 어서 올라가 보란다. 그리고 국사봉은 원래 미륵부처님이라며 사실 봉우리 자체가 미륵불이라고 했다.
눈길이 미끄러워 조심조심 오른다. 국사봉에는 주변을 압도하는 큰 바위덩이들이 속세에서 온 인간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한 열길이나 될까. 하늘을 떠받친 두 개의 바위기둥이 늠름하다. 정신없이 카메라에 담았는데 산행 후 확인해보니 왼쪽 바위에서 사람의 얼굴 같은 형상이 보였다.
보기에 따라선 부처님의 상호랄 수도 있었다. 상스로운 기운이 그득하다. 옛날부터 국사봉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국사봉은 조선시대 임금이 대신이나 지방관속을 시켜 명산대천, 서낭신에게 제를 지냈던 국사당(國師堂)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향토사학자들은 본다.
정상은 북쪽으로 길게 이어졌는데 흔들바위도 있고, 한참을 쉬어가도 좋을 정자도 마련해 놓았다. 흔들바위는 추운 날씨 탓인지 얼어붙어 꿈쩍도 않는다. '개바구'를 닮은 바위들이 지천이다. 봉산으로 향한다. 임도처럼 넓은 하얀 길을 쉼없이 걷는다. 아이젠을 할까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꺼냈다. 걷기가 한결 쉽다. 진작에 할 걸.
능선길을 30분 걸어 산불 초소에 도착했다. 천황산을 거쳐 미타산으로 향하는 주 능선도 눈에 덮혀 희미하다. 봉산으로 가는 능선은 찾기가 만만찮다. 나침반을 꺼내 남동쪽을 확인하고 봉산으로 향한다. 사람의 발자취는 없다. 고라니와 멧돼지의 발자국만 선명하다. 원래는 등산로가 있었다지만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지 않아 길이 희미해졌다.
초소에서 임도와 만나는 안부까지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 희미한 길을 찾고 잡목을 헤치고 인디언처럼 눈길을 검색하기를 반복했다. 눈이 발목까지 쑥쑥 빠졌다.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 느낌이 이럴까. 고생스럽다가도 누구나 볼 수 없는 길을 간다고 생각하니 탐험가처럼 기운이 솟았다. 임도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임도에서 봉산까지도 길은 뚜렷하지 않았다. 다행히 오름길이라 그리 크게 헤매지는 않았다. 철쭉나무 꽃눈이 자꾸 눈앞을 가로막는다. 봄이 오면 꽃향기가 가깝겠다. 봉산(鳳山·564m)도 철쭉 군락에 점령 당했다. 사람의 발길이 오래도록 닿지 않으니 뭇 생명이 살아난다.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아래 작은 돌 하나가 정상석이다. 북쪽으로 미타산이 잘 보인다.
원래는 남릉을 거쳐 죽전 마을로 내려가려고 길을 찾았으나 정상에서 남릉 초입을 찾지 못했다. 천학저수지쪽 동남릉을 내려가다가 중간에 포기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 안부에서 헤어진 임도와 다시 만났다. 임도에서 남릉 쪽으로 한참을 되돌아오니 뻥 뚫린 죽전마을 하산로가 있다. 이 길을 어떻게 소개하나 걱정이 앞서 찔레가시에 찔린 정강이에 피가 나는 줄도 몰랐다. 죽전마을까지 한달음에 내려왔다. 45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산행 취재 다음날 임도 갈림길에 다시 갔다. 봉산 정상으로 거꾸로 치고 올라가 군데군데 산&산 띠를 매달았다. 봉산에서 임도 갈림길까지 20분 만에 내려왔다. 어제는 1시간 20분을 헤맨 길이다. 몸은 고되지만 길을 제대로 찾아 마음이 놓였다.
산행 문의: 부산일보 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홍성혁 산행대장 010-2242-6608.
서암마을 재건식육식당(055-572-3131)은 20년 이상 운영해 주변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맛집이다. 특유의 돼지고기 양념 불고기를 내놓는데 메뉴는 한 가지 밖에 없지만,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돼지불고기 1만6천원(소), 2만4천원(대). 밥값은 별도(1천원)로 받는다. 1인분(8천원)도 된다.
인근 해물나라(055-572-3105)의 정식도 먹을만 하다. 수육이 곁들여지는 정식(5천원)과 아구탕(6천원)이 식사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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