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49호 하늘재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阿達羅尼師今 三年 夏四月 開鷄立嶺路(아달라이사금 3년 하4월 개계립령로)’라고 적힌 글이 나온다.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156년) 4월에 계립령로를 열었다는 의미다. 길에 대한 첫 기록이고 기록상 최고(最古)의 옛길이다. 이어 2년 뒤인 서기 158년에 죽령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의 경계에 있는 최고의 길 계립령, 곧 하늘재는 삼국시대의 정치·군사적 요충지였고, 불교문화 전승로와 민초들의 생활통로 역할을 했다. 이 길을 통해 수많은 역사가 만들어졌고, 삶의 애환이 빚어졌다.
신라는 이 길이 육상과 해상 모두에 절실히 필요했다. 계립령을 넘어 송계계곡을 지나면 지금은 충주호가 된 남한강에 이른다. 남한강은 서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수운의 요로였다.
계립령은 북으로 진출하기 위한 육상 진출로로서도 중요한 길목이었다. 신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길인 셈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신라가 가만히 그 길을 차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안고 있으며 논란거리도 제공하고 있는 길이 바로 계립령이다.
먼저 최초의 기록에 대한 의문이다. 길이 열렸다는 서기 156년이면 신라는 한반도 남부지방의 삼한, 삼한 중에서도 진한의 변방에 불과한 부족국가였다. 김부식(1075~1151년)이 쓴 삼국사기보다 900여 년 앞선 시대에 살았던 중국의 진수(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도 한반도 남부는 신라보다 삼한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렇듯, 지금의 경주와 울산에 근거지를 둔 진한의 변방에 불과했던 신라가 2세기 중반에 중부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기록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신라의 후손이라 그렇게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충주 가금면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를 처음 발견한 예성문화연구회의 이상기(52) 박사는 “신라가 그때 그 길을 열었다고 보기엔 시대적·상황적으로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다”며 “당시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분명 활발한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하늘재도 그 중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한반도 유일한 고구려비인 중원고구려비가 4~5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면 고구려가 당시까지 중부지방에서 계속 영토 확장에 나섰다는 뜻이며, 그렇다면 ‘156년 신라의 계립령 개통’기록은 설득력이 조금 떨어진다. 이 박사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나중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다보니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국내 기행문학의 대가인 소설가 박태순씨는 “시기는 좀 유동적이고 탄력이 있어 보이지만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육상과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옛길박물관의 안태현 학예사도 “시기적으로 좀 맞지 않아 보인다”며 “하지만 이미 누군가 사용하고 있었고, 정치·군사적으로 주요 교두보였던 이 고개를 놓고 삼국이 치열한 전투와 신경전을 벌였던 것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계립령 개통시기의 유동성과 맞물려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란도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계립령은 조령이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계립령과 조령을 동일한 길로 보고 있다. 또 중원군의 <미륵리 석굴실측조사보고서>에서는 중원 미륵리에서 문경 관음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하늘재와 미륵리에서 대사리로 가는 고개인 지릅재까지 합쳐 계립령으로 적고 있다.
▲ 하늘재 중간지점엔 자연탐방로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조에 ‘계립령은 속칭 겨릅산(麻骨山)이라고 하는데, 방언으로 서로 비슷하다. 문경현의 북쪽 28리에 있으며, 신라의 옛길이다’이라고 돼 있다. 또 같은 책 연풍조에는 ‘계립령은 마골재라고 하며 현 북쪽 43리에 있다. 고구려의 온달왕이 계립현·죽령 서쪽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라고 말한 땅이 바로 이곳이다’라고 적혀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계립령(谿立岺)이라 표기한 곳도 위에 언급한 지금의 하늘재와 일치한다.
미륵리에 있는 김동기 문화해설가도 “지릅재와 하늘재를 포함한 고갯길을 범칭해서 계립령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안태현 학예사는 “아직까지 통일된 개념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해설가들이 본 책 자체가 잘못됐을 가능성과 이를 독자들이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을 때 생기는 오류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성문화연구회 이상기 박사도 “계립령은 하늘재를 말하며, 계립령과 조령을 동일시하는 견해는 넓게는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드는 고갯길이 불과 4~5㎞밖에 떨어지지 않아 부주의해서 그렇게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시대마다 명칭도 달라…길 운명과 맥 같이 해
계립령은 시대에 따라 중요도도 달라졌고, 이름도 다양했다. 즉 명칭에 따라 그 길의 운명도 달라졌던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다. 계립령은 신라에서는 계립령이라고 불렸지만 고구려에서는 계립현, 마목현으로 불렸다. 또 지름재, 지릅재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저름재의 음을 딴 것이 계립령이고 뜻을 딴 것이 마목(痲木, 麻骨)현이었다.
저름은 지릅의 방언으로 삼베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삼베는 한자로 표기하면 마(麻)가 된다. 당시 이두문자가 유행하던 상황을 감안하면 다양한 이름이 나올 법도 하다. 결국 삼국시대에는 계립령, 계립현, 마목현, 마골현(산), 지릅재 등으로 불렸고, 이는 방언과 한자의 음과 뜻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선 대원령으로 불렸다. 충주 미륵리사지에서 ‘대원사주지’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다. 미륵리절 이름이 고려시대엔 대원사라고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갯길도 미륵리의 절 이름을 본떠 대원령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미륵리사지 바로 옆에는 대원사에서 관리했을 법한 주막과 미륵대원터가 발견돼 그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고려시대까지 주요한 통로 역할을 했음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선 조령이 개통되면서 대원령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게 된다. 조령이 관로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계립령은 민초들의 길인 한휜령, 하늘재로 변했다. 삼국시대 정치·군사·교통 교두보로서의 길이 관의 길로, 민중의 길로 변해간 역사의 길이 바로 계립령인 것이다. 하나의 고개가 이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졌던 예도 드물 것이다.
영남대로 이전의 길, 기록상 한반도 최고의 길인 하늘재 계립령길을 따라 걸었다. 충주 미륵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섰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 ‘미륵이 무슨 말인가?’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불교 용어로 미륵은 미래, 내세불이다. 그럼 문경 관음리의 관음은? 현세불이다. 하늘재는 미래와 현세를 넘나드는 고갯길이란 말일까.
미륵리는 미래의 동네란 의미, 즉 내세다. 지금은 볼품없고 초라한 관광지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내세의 동네에 비견될 만큼 영화를 누렸음 직하다. 그 흔적은 500m쯤 올라가면 미륵리사지터에서 찾을 수 있다. 미륵사지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우뚝 선 불상이 보인다. 보물 제96호인 미륵석불입상이다. 높이가 무려 10.6m에 달한다. 석불은 부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양 엷은 미소를 띠며 북쪽을 향하고 있다. 한국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유일한 석불입상이다. ‘유일’하면 분명 뭔가 사연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다.
망국의 한을 품은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다 미륵리에 멈춰 내세를 기약했다. 그 내세는 신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었다. 마의태자는 10년 동안 미륵석불입상을 세우고 세월을 기다렸다.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건립하고 미륵리의 석불입상과 마주보게 마애불(보물 406호)을 암벽에 새겼다. 마주보는 미륵석불입상과 마애불에 망국의 한을 담아 남매는 내세를 기약했다.
유일한 북향 미륵리석불입상도 볼거리
그러나 끝내 그 내세는 오지 않았다. 마의태자는 눈물을 머금은 채 금강산으로 떠났고, 덕주공주는 자신이 세운 덕주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마애불과 석불입상은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마주보며 신라 망국의 한을 담은 남매의 전설을 내세에 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고려 초에 세워진 석불입상은 북방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아 한반도 중앙에서 북쪽으로 향하게 했다는 전설도 있다.
김영기 문화해설가도 “한반도 최고의 옛길인 만큼 많은 전설을 간직하기 마련”이라며 “사실 여부를 떠나 망국의 한과 북방통일은 별개의 관계인 듯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일맥상통하는 면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륵사지터(사적 제317호)엔 미륵리석불입상과 보물 제95호인 미륵리5층석탑, 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인 미륵리석등이 일렬로 배치된 것도 이채롭다. 이 외에도 3층석탑, 시 향토유적 제9호인 미륵리석두, 온달장군이 힘자랑하기 위해 가지고 놀았다는 직경 1m 정도 크기의 공기돌 바위 등 그 옛날 역사를 말해주는 문화재가 하늘재 주변에 널려 있다.
온달장군에 대한 기록도 삼국사기에 나온다. 온달장군이 신라와의 전투에 출전하면서 ‘계립령과 죽령 북쪽은 원래 고구려 땅이니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각오를 밝힌 기록이다. 이곳에서 온달은 장렬히 전사했다. 그때가 서기 590년이다. 6세기 후반엔 완전히 신라의 영토가 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세, 즉 미륵리에서 출발한 계립령 하늘재길는 1시간쯤 지나면 재 너머 문경 관음리에 도착한다. 어찌된 일인가? 이렇게 차이 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재를 경계로 마치 내세와 현세, 미래와 현재를 구분하듯 충주 미륵리 방면은 과거 옛길 그대로의 모습이고, 문경 관음리 쪽은 아스팔트 포장길이다. 전형적인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다. 어찌 이렇게 절묘하게 구분했을까?
실은 하늘재 이북 미륵리 지역은 월악산국립공원 지역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문경시가 이 길을 개통하기 위해 관계부처에 민원을 넣었으나 결국 보존론이 우세해 문경까지만 도로포장을 한 것이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미륵리 방향 하늘재는 2008년 12월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제49호로 지정됐다. 아쉽지만 어디에도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아직 없다. 지자체의 무심함과 명승관리의 소홀이 빚은 합작품이다.
하늘재 길을 따라 안태현 학예연구사와 하루, 국립공원 월악산 사무소 직원들과 하루 하여 이틀을 꼬박 왕복했다. 셋째 날엔 혼자서 여기저기 살피며 돌았다. 3일 동안 6번 왔다 갔다 하며 지나간 역사를 떠올렸다.
백두대간 중간 지점…등산객들 많이 만나
하늘재를 경계로 서쪽으로는 탄항산, 동쪽으로 포암산이 백두대간를 잇고 있다. 이곳은 신체로 보자면 백두대간의 배꼽부분이다. 백두대간 종주하는 등산객들이 필히 거쳐야 하는 능선길이다. 마침 설악산에서부터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등산객 성병춘(41)씨를 만났다. 오늘(7월 8일)이 20일째라고 했다. 겉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초롱초롱 살아 있었다. 산에서 야성을 찾아서일까?
“어떻게 백두대간 종주를 하게 됐나요.”
“백두대간 종주하는 사람은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죠.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주하면서 만난 사람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으며, 그 사람과 잠시 얘기를 나눠보면 갖가지 아픈 사연을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어떤 계기가 있어 종주하고 있습니다.”
“무슨 계기죠?”
“특별히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느낌에 굉장히 아픈 사연 같았다. 괜히 더 물으면 언짢을 것 같아 그 정도로 끝냈다.
“무사히 종주 잘 하라”는 말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무언가 꼭 맞아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현세와 미래를 넘나드는 하늘재가 간직하고 있는 그 수많은 사연만큼이나 오고간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하늘재를 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픈 사연을 품고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치 한 편의 드라마가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하늘재길을 뒤로 하고 다시 내세의 길에서 꿈을 깨고 미륵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현세와 미래를 갔다 온 듯한, 꿈 같은 길이다.
하늘재 트래킹가이드
하늘재에 가려면 보통 충주 미륵리주차장에 차를 두고 가는 게 일반적이다. 문경 방면은 하늘재까지 포장도로로 잘 닦여져 있으나 주차장 시설이나 주변 편의시설이 전혀 없어 불편하다.
미륵리 주차장에 차를 두고 500m쯤 포장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미륵리사지터가 나온다. 이곳엔 문화해설가들이 3명 근무한다. 대개 2명이 상주한다. 해설을 부탁하면 언제든 흔쾌히 응한다.
미륵리사지와 미륵대원터를 살펴본 후 50m쯤 올라가면 본격 국가문화재 명승 제49호인 하늘재길이 열린다. 갈림길인데 오른쪽으로는 대원사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멀지 않으므로 잠시 들렀다 가는 것도 괜찮다. 가는 길엔 미륵리3층석탑과 미륵석두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문화재다.
하늘재 길로 들어서면 바로 옆으로 송계계곡의 발원지라고 해도 괜찮을 시냇물 이상의 물이 흐른다. 가는 길은 주로 흙길이다. 가끔 박석포장길도 나온다. 조그만 돌로 길을 만들고 돌 주변 공간은 흙으로 메운 길이다. 박석에 콘크리트로 포장한 길도 있다. 매력 없는 그 길 때문에 갑자기 삭막해진다. 다행히 삭막한 길은 짧다. 바로 호젓한 숲길이 펼쳐진다.
갈림길목에서 500m쯤 가면 숲속으로 들어가는 자연탐방로가 왼쪽으로 나 있다. 자연과 역사와 유적을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갔던 길로 내려오지 않도록 한 배려인 듯했다.
하늘재길 주변으로는 완전히 우거진 숲이다. 여름이면 숲이 우거져 시원하고, 가을이면 일본잎갈나무, 일명 낙옆송 때문에 굉장히 운치 있는 길이 된다고 동행한 공단직원들이 귀띔했다. 겨울엔 눈 쌓인 길을 헤치며 가는 맛도 일품이란다. 봄이야 어느 산이든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일 것이다.
하늘재 정상 기준 1㎞ 남겨둔 지점에 안내판이 있다. 하늘재 정상 1㎞(남쪽) 전, 왼편으로 자연탐방로(동쪽) 이정표다. 내려올 때 자연탐방로로 가면 지겹지 않을 것 같았다.
천천히 숲과 역사를 만끽하며 걸으면 약 1시간 걸린다. 거리상으로 약 2.5㎞다. 드디어 하늘재 정상이다. 정상 왼편(동쪽)으로는 포암산 방향, 오른쪽(서쪽)으로는 탄항산이다. 백두대간 종주 코스다.
정상에서 도저히 걷기 싫을 경우엔 택시를 부를 수 있다. 수안보까지 3만 원이고, 미륵리로 다시 돌아가는 비용은 5만 원이다(한진택시 043-845-6484).
걸어서 1㎞ 내려가서는 이번엔 자연탐방로로 가보자. 숲속에서 자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상세한 안내판이 곳곳에 붙어 있다. 자연탐방로를 따라 내려가면 애초 출발한 대원사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하늘재의 시작이자 끝이다. 자연탐방로를 포함하면 총 4.5㎞ 가까이 되는 길이다. 오전 한나절 둘러보고 인근 송계계곡으로 가면 된다.
송계계곡엔 마의태자의 누이 덕주공주가 창건했다는 덕주사와 미륵석불입상과 마주보고 있는 마애불을 볼 수 있다. 송계계곡에서 덕주사를 거쳐 마애불까지 1시간 남짓 가면 도착한다. 왕복 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송계계곡은 여름철 계곡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피서와 역사를 동시에 즐기는 곳이다.
월간산 479호 박정원차장
>>미륵리 찾아가려면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나들목~충주방면 19번 국도~충주호방면 36번 국도~597지방도의 순으로 간다. 송계계곡과 덕주사 이정표가 중간 중간에 보인다. 수안보 방면으로는 597번 지방도를 타서 수안보온천을 거쳐 계속 가면 된다. 월악산 탐방안내소를 조금 지나면 지릅재 안내판이 나오고 10여 분 가면 미륵리 주차장에 도착한다.
>>숙박(지역번호 043)
미륵사지 주변엔 식당과 민박을 겸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미륵가든(848-6612), 월악가든 민박(846-0310) 등이 있고, 바로 위 민박촌엔 양돼지민박(845-6484)을 포함해 몇 군데가 전문 민박을 한다. 1박에 보통 3만 원이고 10명 이상이 묵는 큰 방은 15만 원 내외. 송어 전문점으로 미륵리송어양식장(845-8890, 847-2257)과 월악송어양식장(848-4791, 842-9332)이 있다.
송계계곡엔 식당을 겸한 민박으로 송계가든(651-2003), 월송가든(651-6478), 수이네식당(651-5207), 닷돈재휴게소(651-9416), 물레방아(651-7115) 등이, 펜션·민박으로 월악산펜션(653-5434), 푸른향기펜션(651-1930), 징검다리펜션(651-0934), 월악민박(651-2785) 등이 있다. 펜션 1박 비용은 성수기 기준 10평에 15만 원, 비수기와 평일엔 8~10만 원 정도 한다.
>>별미
충주엔 꿩샤브샤브가 지역 별미로 유명하다. 미륵사지와 송계계곡 주변엔 꿩 전문 음식점이 없고 수안보 인근에 몇 군데 있다. 충주시에서 추천한 꿩 전문 음식점은 감나무집(848-0609), 대장군식당(846-1757), 삿갓촌식당(846-2529)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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