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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영주 소백산자락길 명승30호 죽령옛길

by 구석구석 2009.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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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죽령옛길~단양 장림리까지 40㎞ '소백산자락길'

 

영주문화연구회가 소백산 자락길을 조성했다. 소백산 전체 둘레의 약 4분의 1 가량 된다.

 

소수서원에서 출발해 순흥향교~죽계구곡~초암사~달밭골~비로사~삼가호~금선정~죽령옛길~단양 용부원리~죽령역까지 총 40.7㎞에 이르는 길이다. 총 9구간으로 나누었고 죽령옛길도 그 중의 한 구간이다. 각 구간마다 풍성한 볼거리가 있다.



제1구간은 소수서원~삼괴정까지 3.8㎞로 향교길이고 사색의 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된 금성대군의 애환이 깃든 금성단, 문화·숙박 체험이 가능한 선비촌, 600년 이상된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는 삼괴정 등을 볼 수 있다.

 

제2구간은 죽계구곡~초암사까지 3.3㎞다. 이른바 죽계구곡길이다. 죽계구곡은 조선 영조 때 순흥부사를 지낸 신필하가 중국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 떠 죽계천에 붙인 이름이다. 초암사에서 시작되는 제1곡부터 계곡을 따라 삼괴정 앞에 있는 제9곡까지 약 2㎞에 걸쳐 있다. 초암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초막을 얽었던 자리란 뜻에서 초암이라 지었다.



제3구간은 초암사~달밭골~비로사~삼가주차장에 이르는 5㎞ 거리다. 달은 원래 산의 고어다. 그래서 달밭은 ‘산에 있는 밭’이란 뜻이다. 이 코스에서는 울창한 숲, 돌다리 등 산속에 감추어진 경치를 맘껏 즐길 수 있다.



제4구간은 삼가주차장~욱금~삼가호~금선정에 이르는 3.7㎞로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는 ‘휴식의 길’이다. 소백산 비로봉을 중심으로 세 갈래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마다 마을이 산재해 삼가리라 불렀다. 마을 뒷산에서 이차돈이 수도했다고 전한다.



제5구간은 금선정~금계동~임실~히여골까지 4㎞다. 이른바 십승지길이다. 금계동은 풍수지리상 전국의 십승지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곳이다. 한때 전국에서 <정감록>을 믿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골짜기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제6구간은 히여골~풍기온천~소백산(희방사)역까지 5.4㎞에 이르는 길이다. 소백산 풍기온천은 지하 800m에서 분출하는 천연원수로 산성화된 몸의 피로를 회복하는 데 아주 좋다고 한다. 실제로 미끌미끌한 물은 아주 상쾌한 기분을 들게 했다.



제7구간은 소백산역~느티쟁이주막터~죽령주막까지 2.8㎞다. 죽령옛길의 운치를 맛보는 길이다.



제8구간은 죽령주막~용부원리~보국사지~샛길~용부사까지 3.9㎞를 말한다. 이 코스도 죽령옛길에 해당하는 길이다.



마지막 제9구간은 죽령터널 입구~아래 용부원리 음지마~장림리~대강초등학교까지 4.7㎞다. 아직 완전히 단장되지 않은 길이지만 단양시의 협조를 요청한 상태다.

 

 대한민국 명승30호 죽령옛길

 

한나절 코스로 왕복도 가능…영주 방향서 이용이 편리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가 가장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장소는 어디일까? 지리적으로 볼 때 소백산과 월악산을 국경으로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소백산과 월악산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능선 너머로 서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군사를 이끌고 넘나들었던 길은 어느 길이었을까? 당시 역사상 있었던 길은 월악산 자락의 계립령 하늘재와 소백산의 죽령 두 길이다. 계립령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156년)에 길을 개척했다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온다. 기록상 최고의 옛길이다. 죽령은 이보다 2년 뒤인 아달라이사금 5년(158년)에 죽죽(竹竹) 장군을 시켜 길을 열었다. 계립령 하늘재와 죽령, 두 길 중 계립령 하늘재는 충주 방향이고, 죽령은 단양 쪽으로서 북을 향한다. 두 길의 직선거리는 40㎞도 채 안 되지만 신라는 북으로, 고구려는 남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된 길이다.  

 

▲ 1 소백산 자락을 배경으로 죽령옛길 단양 방향에 있는 용부원리를 지나고 있다. 바로 오른쪽에 보국사지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2 죽령 정상에서 영주 방향으로 다양한 표정으로 객을 반기는 장승공원이 있다. 바로 그 옆이 죽령주막이다. 3 전국 생산량의 13% 이상을 차지한다는 영주사과가 먹음직스럽게 달려 있다. 월간산 2009.12

 

이 두 길 중 지형적으로 볼 때 죽령에서 신라와 고구려가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계립령 하늘재 길은 험준한 절벽이 양쪽에 늘어선 송계계곡을 지나기에 이곳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다간 매복한 상대 군사에 의해 몰살당할 위험이 높다. 신라와 고구려 양쪽 다 그런 위험부담을 안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곳을 통해 군사가 넘나들었을 가능성은 낮다. 뿐만 아니라 죽령 이남의 영주 지역엔 순흥의 고구려 벽화 등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죽령 이북 단양 지역에서 보국사지 등 신라 유적이 발굴되는 점을 볼 때 계립령 하늘재보다는 죽령을 더 많이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삼국시대부터 가장 통행이 활발했던 길은 죽령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죽령은 삼국시대엔 군사 요충지 역할을 했고, 고려시대엔 불교문화, 조선시대엔 유교문화가 전파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이는 주변 문화유적을 살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는 470년쯤 장수왕 말년까지 죽령 지역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진흥왕 12년(551년)에 진흥왕이 거칠부 장군을 시켜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죽령 이북으로 패퇴시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고구려는 590년쯤 온달장군이 출정하면서 “계립령과 죽령 이북은 원래 고구려 땅이니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온달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마지막 전투다. 따라서 6세기 이후엔 완전히 신라 영토로 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까지 양국의 최전방 요충지 역할을 했던 단양에 신라 유적이, 죽령 남쪽 영주에 고구려 유적이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6세기 중반부터 신라 영토로 귀속된 소백산은 유달리 불교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봉우리 이름도 불교 용어를 많이 쓰고 있다. 우선 최정상봉인 비로봉이 그렇고 연화봉, 도솔봉, 국망봉 등 웬만한 봉우리는 전부 불교식이다. 또 많은 절이 눈에 띈다. 부석사, 비로사, 희방사, 초암사 등 전부 신라시대 창건한 절들이다. 고구려로부터 불교문화가 들어온 주요 전승로가 죽령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 1 죽령옛길을 따라 용부원리로 가고 있다. 2 죽령옛길을 내려오면 소백산을 관통한 중앙고속도로가 바로 눈앞을 지난다. 3 영주 방향 죽령옛길엔 죽죽 뻗은 낙엽송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낙엽송의 노란 이파리가 등산로를 메워 길이 노란색을 띤다. 월간산 2009.12

 

조선시대 들어서는 유교의 본산이라 할 정도로 유교 서원이 번성했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그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 유교를 전파시킨 안흥 선사의 영정을 모셔두고 있기도 하다. 죽령은 또한 유교문화를 확산시킨 통로였던 셈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간직한 죽령의 소백산은 조선시대 중기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몸을 숨길 만한 명당으로 꼽히는 전국의 십승지 중에서 최고로 알려졌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소백산은 신(神)이 알려 준 복된 땅”이라고 예찬했을 정도다.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서도 소백산과 태백산 일대가 십승지 중에서 일곱 군데나 꼽혔다. 특히 영주시 풍기 금계마을은 십승지 중에서도 으뜸으로 평가됐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최고의 명당 소백산을 끼고 있는 죽령은 문경의 문경새재, 영동의 추풍령과 함께 영남 사람들이 한양 나들이 때 특히 중요했던 3대 관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연을 안고 넘나들었을 길이다. 선비들은 과거를 보러 갔고, 보부상들은 봇짐과 행상을 지고, 관리들은 공무로 그 길에 사연을 남겼으리라.



길도 험해 예로부터 아흔아홉 굽이에 내리막 30리, 오르막 30리라고 했다. 험한 길일수록 사람들은 쉴 공간이 필요하다. 죽령역과 희방사역(지금은 소백산역) 주변엔 이용객들이 묵을 원(院·고려와 조선시대 일종의 여관)과 주막이 번성했다. 옛 사람들은 원과 주막에서 각종 사연과 삶의 애환을 나누며 내일 떠날 길에 대한 정보도 나누었을 것이다.

 

새로운 명소로 재탄생한 소백산국립공원 내의 죽령옛길 / 소백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1934년 5번 국도, 1941년 중앙선 철도, 2001년 중앙고속도로가 차례로 건설됨에 따라 죽령옛길은 잘리고 사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그 길이 간직한 사연과 역사도 함께 묻혀버렸다. 특히 단양 방향의 죽령옛길이 더욱 심했다. 영주문화연구회 황재혁 국장은 단양 방향의 죽령옛길을 찾기 위해 영주시를 통해 단양시와 국립공원관리공단 소백산사무소에 협조공문을 보낸 상태라고 말했다. 영주 방향 죽령옛길은 길과 그 길이 가진 사연 및 역사가 거의 정리됐다고 했다. 영주문화연구회는 1990년 창립 이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1999년 옛길을 복원하기 위해 죽령옛길을 처음 답사한 이래 죽령과 관련한 자료를 꾸준히 모으고 있다.



황 국장에게 죽령옛길의 안내를 부탁했다. 기꺼이 동행에 응했다. 단양 방향 5번 국도 중앙고속도로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했다. 그 이상 북쪽으로는 죽령옛길이 단절돼 사실상 찾기 힘들고 의미도 없다고 했다.



중앙고속도로 관리사무소를 지나 주차장을 겸한 조그만 공간이 나왔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소백산사무소에서 붙여놓은 커다란 등산로 안내판이 보였다. 소백산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동시에 영주로 넘어가는 길이다. 지도상으로는 단양 방향 2㎞ 정도 지점에 죽령역이 표시돼 있다. 죽령역을 뒤로 하고 영주방향 죽령옛길로 출발했다.

 

오른쪽으로는 죽령계곡이다. 숲이 우거지고 험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물소리만 들렸다. 아래쪽으로 철도휴양소가 있다고 했다. 철도휴양소로의 접근을 금지시키느라 커다란 보호철망이 쳐졌다. 철망을 우회했다. 울창한 숲길이 계속 됐다. 발밑으로는 중앙고속도로 터널이다. 그러고 보니 중앙고속도로 터널 위로 걸어가고 있었다. 중앙선 철도와 중앙고속도로는 나란히 소백산을 관통해서 달린다.



죽령이란 길 이름을 떠올리면 대나무가 많을 법하지만 어디에서도 대나무는 볼 수 없다. 자생 대나무의 북방한계선도 원래 죽령 부근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구온난화로 휴전선을 넘어갔다고 한다.



죽령이란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한다.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에 신라 아달라이사금 5년에 죽죽 장군을 시켜 길을 개척했다고 해서 죽령이라고 불리게 됐다는 설과 지리적 생물학적으로 자생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이라고 해서 죽령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다. 퇴계 선생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 죽계천에 왕대가 무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조선시대 월천 조목 선생은 죽령을 넘으며 ‘長林 無長林 竹嶺 無竹嶺 大抵 不在 人間幾林嶺(장림 무장림 죽령 무죽령 대저 부재 인간기림령·장림에 숲이 자라지 않고 죽령에 대나무가 없는데, 실제로 없는 것들을 어찌 인간들이 장림과 죽령이라 했나)’이라고 시를 지었다. 그 장림은 죽령옛길이 거의 끝나는 단양 방향에 있는 마을이다. 장소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어느 글이 사실인지 확인할 바는 없다.



영주로 넘어가는 단양의 마지막 마을인 용부원리에 이르렀다. 숲길도 끝나고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이다. 원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종의 여관이다. 장림역에 딸린 원이 용부원이었다. 장림역에서 내려 죽령고개를 넘기 전에 용부원에서 하룻밤 묵고 갔다. 과거엔 번창했을 법하지만 지금은 겨우 그 형체만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며 마을주민조차 보기 힘들다. 영주문화연구회에서 길목마다 하나씩 세운 장승 두 개가 눈에 띄었다.



단양시에서 철거하라고 하면 다시 가져가야 한다.



보국사터가 나왔다. ‘보국사지가 위치한 죽령은 신라의 북진정책에 있어 영남에서 원주와 한강 이남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이러한 중요 거점에 세워진 보국사지는 당시 교통과 관계되는 사찰로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사지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보국사지에 있는 석조여래입상은 목과 팔이 부러진 채 방치되어 있다. 문화재로 지정할 법도 하지만 다니는 사람이 없어 황량하기까지 하다.



콘크리트길 따라 계속 오르막이다. 몇 가구 되지 않은 마을은 드문드문했다. 용부원1리, 2리, 3리까지 있다고 했다. 콘크리트길 가는 중간에 죽령산신당이 나왔다. 최근에 지은 듯했고,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맞은편에는 공단에서 생태공원을 한창 조성 중이었다. 

 

 

 ▲ 1 신라시대 두운조사가 선덕여왕의 명을 받아 창건했다는 희방사. 죽령옛길 옆을 지나는 5번 국도 위에 있다. 2 퇴계가 몰래 산책을 했다는 소백산자락길 제3구간은 숲이 울창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길이다. 3 단양 방향 죽령옛길 옆에 웅장한 소나무와 단풍이 길 좌우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월간산 2009.12

 

이젠 단양과 영주 경계지점의 죽령옛길이다. 나무계단 위로 올라서니 5번 국도와 연결됐다. 죽령휴게소와 각종 약초를 늘어놓은 죽령특산물판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5번 국도를 따라 조금 걸어가니 ‘여기서부터는 영주입니다’라는 커다란 이정표가 도로 옆에 붙어 있다. 바로 옆엔 죽령 표지석도 있다. 한때는 매우 번성했을 것 같은 분위기다. 늦가을이라 그런지 조금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해발 696m 죽령 정상에 섰다. 일부에서는 689m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영주시에서 세워놓은 비석에는 696m로 돼 있다. 영주로 넘어서자마자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장승공원이 있고, 바로 그 옆 죽령주막에선 죽령과 관련된 노래가 쉼 없이 떠들썩하게 흘러나왔다. 장승은 다양한 표정으로 객들을 반기는 듯했다. 주막에서 걸쭉한 막걸리를 한잔 했다. 정말 진한 맛이다. 안주인 안정자씨는 “우리 집은 소백산에서 채취한 약초로 손님이 원하는 메뉴는 다 해준다”며 “그 중에서도 산채비빔밥이 일미”라고 자랑했다. 주막이라는 이름답게 분위기도 운치 있게 초가집으로 꾸며놓았다. 과거 이 주변에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 죽은 죽죽을 기리는 사당인 죽죽사(竹竹祠)가 있었다고 전하나 정확한 위치를 못 찾아 아직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부터 영주문화연구회와 영주시에서 조성한 죽령옛길이 시작된다. 국가문화재 명승 제30호로 지정된 길이다. 도솔봉으로 가는 길이 오른쪽(남쪽)으로 나 있다.



낙엽송 우거진 죽령옛길로 내려갔다. 가만히 보니 죽령옛길은 온통 낙엽송(일본잎갈나무) 천지다. 낙엽송의 솔잎 같은 이파리가 노란 낙엽으로 물들어 거리를 죽 덮고 있다. 길이 노란색으로 물든 것 같다.



죽죽 뻗은 나무들이 바람에 서로 몸을 비비는 듯했다. “끼익”하고 소리까지 냈다. 노란 낙엽송 잎이 깔린 무난한 오솔길의 연속이다. 가끔 넝쿨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여름이면 꽤나 시원할 것 같다. 물오리나무, 으름덩굴나무, 다래나무, 산뽕나무, 물푸레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산 어디에나 있는 참나무도 예외 없이 모습을 보였다. 다양한 수종에 건강한 생태였다.



옛 주막거리터 이정표가 나왔다. 과거 객들이 지나가는 길에 들린 주막이다. 돌을 쌓은 집터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옛날 죽령옛길에 3개의 주막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가장 작은 곳이 ‘주점’이라는 곳이고, 다음이 느터정 주막거리, 제일 큰 곳이 지금의 소백산역 근처에 있던 무쇠다리 주막거리였다. 지금은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정표로 그 사연만 전하고 있다.

 

▲ 1 소백산 비로봉 올라가는 길에 마지막 단풍이 붉은 빛을 발하고 있다. 2 늦가을 빛바랜 듯한 나무들과 억새와 소백산 능선이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3 소수서원의 우거진 노송 사이로 노란 은행나무 잎들이 길을 덮고 있다. 월간산 2009.12

 

죽령옛길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게 퇴계 선생의 흔적이다. 풍기는 퇴계가 군수로 있었던 지역이다. 퇴계는 충청감사로 있는 그의 형 온계가 고향인 안동 예안을 다녀가는 길에 죽령계곡까지 와서 배웅했다고 전한다. 퇴계는 형제의 우애를 즐길 자리로 동, 서 두 대(臺)를 쌓았다. 동쪽을 잔운대, 서쪽을 촉령대라고 이름 붙였다. 형제가 마주앉아 물과 바위와 나무를 벗 삼아 회포를 풀었음직한 바위가 조그만 계곡 옆에 덩그러니 있다. 앉아 보기엔 날씨가 너무 춥다.



길 바로 옆에 먹음직스런 사과가 뻘겋게 달려 있다. 전국 생산량의 13%를 차지하는 영주 사과다. 일교차가 큰 지역일수록 맛이 좋고 품질도 높다고 한다. 그래서 영주 사과가 잘 팔린다는 황국장의 말이다. 사과나무밭 바닥엔 은박지를 깔아놓았다. 은박지에서 반사된 햇빛이 사과 밑 부분을 비춰 전체가 고루 고운 색깔을 띠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죽령옛길 산길은 이제 끝이다. 조그만 주차장 같은 공간이 있다. 두 개의 장승이 험악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맞고 있다. ‘희방사역 →1.4㎞, 소백산 풍기온천 →2.9㎞’라고 이정표에 적혀 있다.



때마침 혼자 걷는 중년의 여자(류희정·52)와 마주쳤다. 죽령옛길 가는 길을 묻는다. 경기도 일산에서 왔고, 기차 타고 희방사역에서 내려 소수서원에 갔다가 죽령옛길을 둘러보고 가려는 중이라고 한다. “어떻게 혼자 오셨어요?” 하고 묻자 “애들 다 키우고 나이 들어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고 싶어서요”라고 한다.



흙길과 콘크리트길을 따라 희방사역까지 터덜터덜 내려왔다. 갑자기 중년의 여자가 말한 ‘혼자만의 여행’과 ‘길’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비야씨는 ‘여행은 길 위의 학교’라고 했다. “길에서 돈이 없어도 당당하게 사는 삶을 배우고, 한번 배우면 평생 쓸 수 있는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그 소중한 걸 죽령옛길에서 그 중년의 여인을 통해 배웠다. 지금 돈이 없어도 당당하게 사는 삶을 배우는 그 ‘길’을 걷고 있다. 

 

 

죽령옛길 탐방 가이드

 

죽령옛길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한나절에 왕복도 가능하다. 영주 방향에서 가는 편이 찾기도 쉽고 편리하다. 우선 중앙선 철도 소백산(희방사)역에 내리면 역사(驛舍)를 나서자마자 바로 죽령옛길 안내판이 탐방객을 맞는다. 이 마을이 옛날 무쇠다리 주막터가 있었다는 수철리다. 그러나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무궁화 철도가 하루 열 차례밖에 정차하지 않기 때문에 이용에 다소 불편이 따를 수 있다.

 

죽령옛길 / 소백산북부사무소

승용차를 가지고 가면 소백산역에 주차하고 죽령옛길을 답사할 수 있다. 소백산역에서 죽령 정상까지 4㎞가 채 안 되기 때문에 주차하고 다녀올 시간적 여유가 있다. 주변엔 한국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선비촌 마을 등까지 둘러볼 수 있다.



만약 승용차를 소백산역에 주차하고 죽령 정상에서 풍기택시를 부르면 보통 1만5,000~2만 원 정도 한다(희방사 호출택시 011-822-9756로 문의). 단양 죽령역이나 중앙고속도로 단양 관리사무소에서 주차하고 출발한다 하더라도 희방사역에서 단양 택시를 부르면 비슷한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단양택시 010-4418-2662, 단양개인택시 011-484-4054 또는 043-422-0611로 문의.



단양에서는 용부원리에 주민들이 살기 때문에 5번 국도로 하루 4회 시내버스가 운행한다. 출근 시간에 두 차례, 점심·저녁 각 한차례씩이다. 죽령휴게소가 단양시내버스 종점이다. 단양 용부원리엔 민박집이 많다.



접근로 서울에서는 영동고속도로에 이어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풍기IC로 나와 대강교차로에서 5번 국도로 접어들어 풍기 방면으로 줄곧 가면 된다. 수철리 방면에서 좌회전해 2분 정도 가면 소백산역이다.


 

>>숙박

단양 용부원리 마을엔 소백산 민박(017-853-6161 또는 018-767-6161), 농원민박(043-423-0046) 등이 있다. 풍기읍에서 권할 만한 업소로는 동인모텔(054-633-9605), 순흥장(054-633-2124) 등이 있고, 선비촌(054-638-6444)에서 선비문화를 체험하며 하루 묵을 수도 있다. 소백산자락길을 걷다가도 몇 개의 민박집을 만날 수 있다. 제3구간 끝지점인 비로봉 올라가는 길  옆에 산골민박(019-240-6709)이 있다.

 

/ 글 박정원 차장 jungwon@chosun.com
  사진 정복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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