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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이것저것

인동초 김대중선생의 일대기-언론취합

by 구석구석 2009.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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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차례 가택연금… 사형선고…

 

55차례의 가택연금, 6년여의 옥고, 두 차례의 망명, 사형 선고 등 수차례의 죽을 고비….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인동초()’라는 별명처럼 쉼 없는 고난과 좌절,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노벨 평화상 수상,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을 화해로 이끈 남북 정상회담 등도 오랜 세월 역경을 딛고 이뤄낸 결과였다.

 

DJ는 1924년 1월 6일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세 시간 떨어진 작은 섬 하의도에서 가난한 소작농 김운식(1974년 사망), 장수금(1972년 사망) 부부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다.

 

생활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남달랐던 그의 어머니는 하의초등학교 4학년 때 그를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이후 그는 당시로선 전국 10대 명문 중 하나였던 목포상업학교(5년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일제의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해운회사(목포상선)에 취업해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목포상선에 다닐 때 친구의 여동생(차용애·1954년 사망)에게 줄기차게 구애해 결혼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한때 여운형이 이끌었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다가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탈퇴했다. 그의 건준 경력은 오랜 세월 색깔론에 시달리는 빌미가 됐다. 6·25전쟁 때는 자본가, 반동분자로 찍혀 우익인사들과 함께 목포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총살 직전 탈주에 성공해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긴다.

 

 

 

 

4전5기

1954년 그는 금배지에 도전한다. 동기는 소박했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국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올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정치권 진입은 쉽지 않았다. 1954년 전남 목포에서 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첫 고배를 마셨다. 강원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4, 5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두 아들을 낳은 첫 번째 부인 차 씨와 사별한 것도 계속된 낙선으로 인한 시련 때문이었다.

 

1961년 5대 인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이마저도 당선 3일 만에 일어난 5·16군사정변으로 의원 등록도 못한 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정치규제에도 묶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아래서 그는 ‘평생 동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났고 두 사람은 1962년 결혼했다.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가 정치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63년 6대 총선 때 전남 목포에서 당선되면서부터였다.

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로 옮겨 노동조합의 지지와 목포상고 동창들의 도움으로 당선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생이 펼쳐졌다. 개원 초기 6개월 동안 본회의 13차례 발언, 19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 동의안 처리 때는 5시간 19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필리버스터(의사진행 지연작전)를 해 화제를 남겼다. 

 

야당의 ‘재정통’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대변인, 정책위의장 등을 지냈다. 양복 상의에 붉은색 손수건을 꽂고, 백구두를 신고 다니던 그는 정가의 멋쟁이였다. 67년 7대 총선에서 박정희 정권은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정권 차원의 ‘낙선운동’을 벌였지만, 또다시 당선돼 이름을 날렸다.

 

 

그는 야당 안에선 장면, 박순천 등이 이끄는 민주당 신파에 속했다. 그는 70년 당내 세대교체 구호인 ‘40대 기수론’에 힘입어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1차 투표에선 1위 김영삼 후보에 밀려 2위에 그쳤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이철승 후보와 연합한 그는 구파인 김영삼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안팎의 예상을 깨고 승리하며 대선 후보를 차지했다. 

 


이듬해 7대 대선에서 맞대결을 펼친 상대는 종신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유신체제(1972년)를 구상하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영구집권 음모’를 폭로하고,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안전보장안을 제시하는 등 박 대통령을 위협했다.

 

결과는 95만 표 차의 석패였다. 당시 그는 ‘전투에는 이기고 전쟁에서 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같은 대선 결과는 역설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그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눈엣가시…수차례 죽을 고비

 

박정희 대통령과 맞선 1971년 이후 10여년 동안은 그야말로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다.

박 대통령은 자신에게 위협적 존재로 확인된 정치인 김대중을 그냥 두지 않았다. 대선이 끝난 뒤 총선 지원유세를 다니던 김 전 대통령은 타고 있던 승용차가 대형트럭에 받히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의문의 사고였다. 그는 고관절 변형증으로 지팡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8월8일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14일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와 관련한 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1973.8.14

 

그는 72년 일본에서 10월유신을 맞았다. 귀국을 포기한 그는 미국과 일본에서 한국민주통일연합(한민통)을 조직해 반유신운동에 나섰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엄청난 공작을 기도했다. 73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도쿄 시내 호텔에서 그를 납치해 대한해협에 수장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박정희 정권은 그를 동교동 집에 가둬놓고 철저히 감시했다. 

 

DJ는 “당시 ‘국민을 위해 아직 못다한 일이 많다’며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후에도 74년 12월 가택연금 도중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76년에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7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뒤 다시 가택연금을 당했다. 가택연금과 투옥의 연속이었다.

 

79년 10월 정적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죽자 그는 잠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12·12 군사 쿠데타와 5·18로 권력을 쥔 전두환 신군부는 그에게 이른바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씌웠다. 신군부는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 대법원은 81년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한 신군부는 무기징역으로, 다시 20년형으로 감형한 뒤 82년 미국으로 강제 출국시켰다. 미국에서도 그는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하고, 김영삼 총재 단식투쟁 전미비상대책위를 구성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기, 그의 신분은 ‘재야인사’였다. 그는 이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를 재야인사로, ‘민주화의 상징’으로 만든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박정희, 전두환 두 군 출신 대통령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DJ는 연금 해제 및 사면복권 조치를 받았다. 대학가에는 민주화 열망이 넘쳤지만 ‘서울의 봄’은 짧았다.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세력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DJ에게는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사형을 선고했다. DJ는 유언과 다름없는 최후진술에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 정치 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미국 정부의 압력 등으로 무기징역, 징역 20년 등으로 감형됐지만 DJ의 심경은 복잡했다.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81년 2월 부인에게 보낸 옥중 서신은 당시 심정을 보여준다. “나는 어느새 이불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마구 울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다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1982년 12월 석방된 직후 그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미국에 있으면서도 국내에 있던 YS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는 등 반()독재투쟁을 계속했다.


3전4기의 대권도전과 좌절

 

 

 

그는 1985년 2·12 총선 직전 미국에서 귀국해 71년 대선 패배 이후 타의에 의해 중단했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는 87년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욕심은 분열을 낳았다. 그는 대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뒤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87년 12월 대선에 도전했지만 ‘3등’에 그치는 치욕을 당했다. 하지만 4개월 뒤 소선거구제로 바꿔 치른 13대 4·26 총선에서 제1야당을 차지해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호남표의 결집에 따른 의외의 결과였다. 믿을 수 없는 강도로 결집하기 시작한 호남표는 다른 지역의 반발을 불러와 그의 앞날에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제1야당 총재였던 그는 90년 1월 3당 합당 때까지 정국을 주도했다. 노태우 정권의 합당 제의를 거절한 그는 92년 3·24 총선을 앞두고 ‘꼬마 민주당’과의 통합에 성공했다. 민주당은 92년 총선에서 97석을 차지했다. 야권 단일후보라는 명분을 쥔 그는 92년 12월 대선에서 ‘영원한 동지이자 맞수’였던 김영삼 후보와 정면승부를 벌였다. 하지만 지역감정의 벽은 완고했다. 200여만표 차로 패배한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영국에서 스티븐 호킹 박사의 옆집에 살면서 독일 통일과정 등을 연구하는 등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는 어려웠다.

 

영국에 6개월 동안 머문 뒤 1994년 귀국한 그는 아태평화재단설립해 통일 연구에 몰두했다. 집도 아예 동교동에서 일산으로 옮겼다. 하지만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1995년 6월 지방선거 지원유세는 그에게 정계 복귀의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민주당은 조순씨를 서울시장에 당선시켰고 그는 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로 인해 그는 ‘약속 위반’ ‘야당 분열’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고 96년 4·11 총선에서 국민회의는 겨우 79석을 차지해 그의 정치적 생명을 위협했으나, 97년 5월 당내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으로써 ‘마지막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과거와 전혀 다른 전략을 세웠다. ‘지역연합론’을 바탕으로 자민련의 김종필·박태준씨와 손을 잡은 것이다. 여기에 여당 후보의 분열, 외환위기 충격이란 상황에 힘입어 마침내 대통령 선거 3전4기의 신화를 완성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국민의정부 출범으로 햇볕과 개혁정치

 

2000년 6월16일 평양 백화원영빈관 1호각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대표단 환송오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및 양측 대표단이 활짝 웃으며 건배하고 있다. 세계일보

98년 2월25일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내세우고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당면 과제에 매달렸다. 그는 과감한 경제개혁 조처를 추진했고, 그 결과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조기 졸업이라는 성과로 나타났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했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과 국민기초생활법을 제정했다. 정보통신 산업 부흥과 벤처붐도 일으켰다.


‘햇볕정책’이라고 불린 그의 대북 포용정책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 목표로 설정한 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꾸준히 보냈다. 결정적인 것은 남북 당국간 경제협력을 제의한 2000년 3월9일의 베를린선언이었다. 그는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해 김정일 위원장과 포옹했다. 그리고 평양을 떠나기 전 역사적인 6·15 남북 공동선언문에 합의했다.

 

남북정상회담은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2000년 10월13일(한국시각) 오후 6시쯤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그리고 12월10일 노르웨이의 오슬로시청 중앙홀에서 그는 평생 꿈에 그리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임기 말은 불행했다. 각종 게이트 의혹과 두 아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는 치명적 결함으로 작용했다. 일생일대의 업적인 남북 정상회담도 현대상선의 ‘5억 달러 대북송금 파문’으로 이어지면서 흠집이 났다.

 

지역감정 해소를 집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그였지만, 대통령 재임 기간 지역갈등은 오히려 격화했다.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퍼주기’라는 말이 끝없이 나돌았다. 2001년의 언론사 일제 세무조사는 가뜩이나 좁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압박했다. 경제위기 극복 차원에서 장려한 신용카드 발급은 임기 말이 되자 신용불량자급증이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2000년의 4·13 총선에서 그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원내 1당은 한나라당이 차지했다. 임기 말이 되자 자식들의 비리가 쏟아져 나왔고, 둘째와 셋째 아들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마지막까지 필생의 사업인 남북화해와 통일염원

 

2003년 2월25일 그는 동교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북송금 특검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근영 전 금융감독원장,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줄줄이 구속됐다. 특검은 “현대가 4억달러, 정부가 1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했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현대의 대북송금은 크게 보아 사법적인 심사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퇴임한 전직 대통령은 힘이 없었다. 한광옥·권노갑·김옥두 등 핵심 측근들도 다른 비리사건 등에 연루돼 차례차례 구속됐다. 2005년 8월 자신의 재임 시절 정치사찰을 위한 국정원 불법도청 사실이 밝혀지자 그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 직후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선 자신이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이 9석으로 쪼그라드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정치 개입은 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으나, 어수선한 정치적 상황은 그를 놔두지 않았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모두 분열이 가속화되자 그는 틈틈이 민주개혁진영의 통합을 강조했다.

 

그런 와중에도 필생의 사업인 남북관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여전했다. 2003년 8월 퇴임 뒤 첫 공식연설에서도, 2004년 퇴임 이후 첫 국외 순방에서도 그는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의 안전과 국제사회 진출을 보장해 줘야 한다”고 일관된 메시지를 발표했다. 2006년 6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계획했던 방북이 무산됐지만 그는 “미국과 남한이 대화하면 북이 핵을 포기할 수 있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명박정부 들어 남북관계 위기,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을 크게 걱정했다. 그는 지난 6월 11일 6·15 남북공동선언 9돌기념 특별연설에서 “과거 50년 동안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가 위태로워 걱정”이라며 “피맺힌 심정으로 말하는데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며 시민들의 깨어 있는 자각을 강조했다. 특히 민주주의 위기 극복을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할 방안을 구상했다던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통탄하며 영결식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정치인 김대중’은 한편의 대하소설 같은 삶을 살며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 길은 별로 편안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2009년 5월 23일 후임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다 투신자살하자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의 ‘민주주의 퇴보’를 주장하며 야권 통합과 대여() 투쟁을 독려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전직 대통령의 부적절한 처신’이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한평생을 한국 정치와 함께해 온 ‘정치 9단’으로선 부득이한 행보였을 것이란 평가도 있다.

 

“나는 내 인생을 목숨 걸고 살아왔습니다”

 

"3선 개헌이 통과되면 박정희 씨는 제2의 이승만 씨가 되고, 공화당은 제2의 자유당이 됩니다. 이것은 해가 내일 아침 동쪽에서 뜨는 것보다도 더 명백합니다.”(1969년 7월 19일 효창구장에서의 3선 개헌 반대 시국대강연회 연설에서)

 

“나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절망을 모르는 시시포스의 신같이 최후의 승리를 위해 싸워나갈 것입니다. 싸우다 쓰러지는 무명의 투사가 될망정 이익을 위해 사술()만 농하는 마키아벨리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1970년 1월 24일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전 참여 의사를 밝힌 기자회견에서)

 

“민주조국의 운명을 회생시키려면 50대의 박정희씨보다 더욱 힘차고 더욱 젊은 40대 후보가 대결선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국민적 공통의 열의라고 나는 확신한다.” (1970년 국제신보 ‘40대 기수론’ 중)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1975년 민주회복 국민회의 집회 연설에서)

 

“나는 조속한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신념과 목표에는 확고부동하다. 그러나 이를 추진하는 방법은 평화적 태도와 인내, 질서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1979년 ‘긴급조치 9호 해제에 즈음해’ 중)

“나는 순교자가 되거나 정부와 맞서기 위해 귀국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운동가들이 나의 도움을 원하고 있고 과격파들에게 온건함이 필요하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입니다.”(1985년 2월 8일 미국에서의 한 강연회에서 귀국 의사를 밝히면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안정 속에서 국정을 이끌어 국가를 번영시킬 수 있습니다.”(1997년 9월 대선을 100일 앞두고 동아일보에 전해온 메시지)

 

“북한에 대한 3원칙을 밝힙니다. 첫째, 어떤 무력도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셋째,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갈 것입니다.” (1998년 대통령 취임사 중)

“아시아와 서구 사이의 차이는 사상과 전통의 차이가 아니라 누가 먼저 민주주의 제도를 발견하고 실천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서구의 강물에 수력발전기를 장치하면 전력이 나오듯이 아시아의 강물에서도 전력을 발생시킬 수가 있습니다.”(1998년 6월 미국 조지타운대 명예 박사학위 수여식 연설에서)

 

“민주주의는 인간 존엄성을 구현하는 절대가치인 동시에 경제 발전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문 중)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김 위원장은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윗사람 존경한다는데, 나이 많은 내가 왔는데 젊은 당신은 못 오겠다는 거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김 위원장이 전라도 사람이라서 고집이 셉니까, 라고 합디다. 김 위원장이 전주 김씨니까 전라도 사람 아니오. 나는 김해 김씨니까 경상도 사람이고… 라고 했어요. 그러자 김 위원장이 할 수 없습니다. 가지요. 이렇게 됐습니다.”(2006년 10월 목포역 연설에서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회고하며)

“나는 내 인생을 힘껏, 때로는 목숨까지 걸고 살아왔습니다. 무엇이 되기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고민하면 가난해도 성공한 것이고, 병에 걸려 설사 일찍 세상을 뜬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모두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08년11월 중고교생들과의 간담회에서)

 

“우리가 균등하게 평화롭게 정의롭게 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돼야 합니다. (행동) 안 하고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고, 이런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2009년 6월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식)

 

때론 동지로… 때론 적으로… 애증의 '3金시대' 종언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반세기 가까이 한국 정치사를 장식한 ‘3김(金) 시대’가 막을 내렸다.

DJ와 김영삼(YS) 전 대통령,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1960년대 이후 3김으로 불리며 한국 정치의 기둥으로 자리매김했다. 호남의 DJ, 영남의 YS와 충청의 JP는 이름만으로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한국 정치의 아이콘이었다.

 야당 대표 시절 국회 귀빈식당에 3당 총재 회담을 위해 모인 3김. 왼쪽부터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 / 세계일보 자료사진

 

‘정치 9단’이라고 불린 3김은 권력을 위해 때론 동지로, 또 때로는 적으로 정치역정을 함께했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에 자리한 이들의 관계에 따라 한국 정치도 요동쳤다.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치며 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유신의 주역으로 정치 전면에 나섰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은 새로운 정치적인 도약을 준비했지만 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으로 그 뜻을 펼치지 못했다.

3김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자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DJ와 YS는 나란히 13대 대선에 출마하고, JP도 충청권을 지역 기반으로 삼고 대선에 나서며 본격적인 ‘3김시대’를 연 것이다.

‘1차전’에선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 야권의 분열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3김 중 먼저 웃은 사람은 YS였다. 1990년 YS와 JP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여세를 몰아 YS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당선됐다. DJ는 대선패배를 인정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YS의 대통령 당선은 3김 정치의 종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JP는 1995년 YS 민주계의 퇴진압력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한 뒤 같은 해 3월 충청 기반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DJ도 1995년 지방선거 직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15대 총선은 3김이 맞붙은 또 한 번의 승부처였다.

이후 DJ와 JP는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P 연합’을 구성하고, 그 결과 DJ가 대권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JP도 국민의 정부 초대 총리로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다.

1998년 2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취임/세계일보자료


2002년 16대 대선으로 DJ가 은퇴하고 JP도 2004년 총선에서 자민련이 참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해 3김 정치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3김은 2007년 17대 대선국면에서 현실정치 개입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질긴 정치의 끈을 놓지 않았다. DJ는 범여권의 결집을 촉구했고, YS는 “잃어버린 10년을 끝내야 한다”며 정권교체를 강조했다. JP는 한발짝 더 나아가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를 천명했다.

특히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DJ와 YS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북핵 사태 등을 거치면서 말년까지도 갈등과 반목을 거듭했다. 하지만 DJ의 병세가 악화하자 YS는 병상을 찾아 화해를 선언했다.

3김이 한국정치에 남긴 명암은 뚜렷하다. YS와 DJ는 일생의 목표였던 대통령을, JP는 총리를 역임하며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공헌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시작된 지역주의와 보스정치라는 폐단은 여전히 한국정치의 발전를 가로막고 있다.

 

서거후 외신들 긴급뉴스로 업적 등 일제히 보도

 

AP통신은 세브란스병원 대변인 발표를 인용, “암살 시도와 사형 선고를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돼 남북관계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김 전 대통령이 향년 86세로 운명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인들의 민주화 투쟁과 남북 화해, 통일에 대한 염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김 전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으로 다당제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으며, 한국이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를 헤쳐나가도록 이끌었다고 전했다.

 

영국 BBC 인터넷판은 김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남북한 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햇볕정책을 재임 중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면서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용기있는 것이었고 후임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일본 NHK는 고시엔(甲子園) 고교야구중계방송을 잠시 중단하고 긴급 뉴스로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약력과 함께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도 인터넷판을 통해 “한국의 군사정권 시대의 민주화 투사로 활약했고, 대통령 재임 중 2000년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첫 남북정상회담을 실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정치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아사히신문도 서거 속보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로 남북화해 교류와 한일 관계 개선 등에 힘써왔다”고 소개했다.

중국 국영 신화통신과 중국중앙방송은 한국 언론을 인용,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신속 보도했다. 시나다컷(新浪網), 소후닷컴(搜狐 網) 등 주요 포털 사이트들도 특집 코너를 마련해 김 전 대통령의 생애와 프로필, 최근 병세 악화 소식 등을 자세히 전했다.

홍콩과 대만 등 중화권 매체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시시각각 전했다. 홍콩 펑황(鳳凰)TV는 “김 전 대통령은 양광(陽光)정책(햇볕정책)을 통해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남북화해의 추진자”라고 평가했다. 국제문제 평론가인 정하오(鄭浩)는 “김 전 대통령은 1990년대 말 한국의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양광정책을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했다”면서 “그가 한국 민주운동의 선봉이었다는 점도 역사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은 김 전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 휴전 상태에 놓여 있던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동아닷컴 2009.8.19 김대중선생 서거관련기자중에서 

한겨레신문 2009.8.19 김대중선생일대기 시리즈

세계일보 2009.8.19 박진우 양원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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