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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안동 서후-924번지방도-금계리 광풍정 간재종택 학봉종택

by 구석구석 2009.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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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후면 금계리744 광풍정(光風亭)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22호

이 건물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성리학자요 김성일ㆍ유성룡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아 영남학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바 있는 경당 장흥효선생이 1630년대에 이 위치에 초당으로 건립한 누각이다. 1838년(헌종 4)에 지역의 유림들에 의해 개축되었다. 금계리는 고려초기 이래 삼태사의 한 사람인 장정필의 후예들인 안동장씨의 집성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와가로 우측협칸을 통간 마루로 놓아 건물밖의 협문을 들어서서 우측 마루위의 판문을 열고 오르도록 되어있다. 어칸의 온돌방 전면 1칸은 마루칸으로 하여 우측 협칸의 통간 마루와 함께 어칸의 1칸 온돌방을 애워싼 형태를 하고 있다. 좌측 협칸은 1칸반을 온돌방으로 꾸미고 전면의 반칸은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동북향을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마루공간과 온돌방이 대각선으로 구성된 듯한 독특한 정자건축이다. 이는 하절기의 외부환경을 최대한 배려한 환경친화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료되며 주목할 부분이다. 전면의 루하주는 막돌기단위에 큼직한 덤벙주초를 놓고 팔각주를 세웠으며 루상주는 그 위에 원주를 세웠으나 나머지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다. 5량가의 납도리집으로 대량위의 동자주는 판대공에 첨차ㆍ소로 놓고 중도리와 종량을 결구하고 그 위에 판대공 없이 첨차ㆍ소로 놓고 마루도리와 장혀를 받치게 하고 있다. 천장은 제고물반자로 치장하고 마루는 우물청판을 깔았다. 주두에 결구된 평방위에는 소로를 얹어 주심도리와 장혀를 받치게 하고 있다.

 

서후면 금계리162 원주변씨 간재종택

간재종택과 간재선생이 강학을 하던 간재정, 사당, 정충효문 등은 16~18세기에 걸쳐 창건 및 중수된 건물로서 원형이 잘 보전된 데다가 관련인물이 고려충신의 후예이자 임진왜란의 공신이였다는 역사적 측면과 건물들의 독특한 공간 배치로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3년 경상북도지정 문화재인 민속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간재종택 / 한국관광공사


간재종택과 정자는 마을 입구에서 924번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홍살문을 통과하면 골의 맨 아래쪽에 남서향으로 향한 종택이 크게 일곽을 이루고 그 뒤편 우측에 사당 일곽이 놓여있다. 서당 좌 측편 골 맨 위쪽 전망 좋은 곳에 간재정이 호젓이 앉아 있다.

종택은 정침과 이 정침 앞마당 좌우에 각기 -자 대문과 별당이 일곽을 이루고 있다. 1763년에 창건되었으며 1949년에 중수하였다.
종택 중 정침은 완전 �자형으로 앞줄에 중문간채와 사랑채가 길게 놓이고 그 뒤편에 안채와 좌우익사가 안마당을 에워싸고 있다. 사랑채는 덤벙초석 위에 정면 모두와 우측면의 앞쪽 1개소는 원주로 나머지는 네모 기둥을 세웠다. 원주는 누상주인데, 그 밑에는 팔각형으로 다듬은 누 하주를 받쳤다. 이처럼 기둥의 모양새를 달리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동양의 우주관에 따른 조형원리를 건물 조형에 구현한 것으로 선조들의 정성어린 조형사상을 읽을 수 있다. 안채는 안마당 폭을 가득 매운 3칸 안 대청이 중앙에 자리잡고 그 좌.우측에 각기 앞 뒤 2칸 통씩 안방과 상방이 놓여있다.

 

 

간재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일자형 집이다. 가운데 1칸 대청을 놓고 그 좌우에 각 1칸씩 온돌방을 두었으며 16세기 후반 간재선생이 강학을 위해 지었으며 1934년에 중수기가 남아있다. 정충효문은 종택에서 전방으로 50미터 길목 좌측에 소재하며 간재의 충효를 기려 정려 하였으며 숙종의 어명으로 1686년에 건립되고 1847년에 중수하였다.

 

간재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인데. 3칸 배면에 신위를 모신 감실이 벽장식으로 돌출 되어 있다. 별당인 무민당(無憫堂)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좌로부터 2칸 통의 온돌방과 1칸 대청이 차례로 놓여있다. 2004년 중수하였다.

간재종택과 부속건물이 위치한 자연환경을 보면 작은산이 병풍처럼 골짜기를 이룬 자리에 정침 및 별당, 사당, 정자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자연지형에 순응하면서 각각 적합한 곳에 터를 잡은 것이 사대부가의 공간영역을 갗춘 이런 단독 종택은 동성마을의 유형으로 발전한 한국 종가사에 흔치 않은 곳으로서 조선선비들의 입지 및 정주관을 살펴 볼 수 있는 주요 가거지로 써 가치가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30가구 90여명이 살고있다. 전통문화 보고,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러지는 안동문화권, 그 중에서도 간재종택과 정자는 하회, 내앞마을 등과 함께 또 하나의 작은 문화권을 이루며 양반유림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우리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중의 하나이다. 


 

서후면 금계리856 의성김씨 학봉종택 경상북도기념물 112호(1995년 12월 1일 지정)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곳인 운장각은 선생께서 남기신 서적·물품·친필기록 제초고 및 선조전래의 전적·문서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0여점의 보물을 영구히 보존코자 건립하였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며 학봉의 8세손 광찬이 1762년(영조 38) 이곳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위치로 이건되었다.

 

학봉은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의 고제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27세에 사마시, 1568년(선조1) 중광문과 병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77년(선조10)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1590년(선조23)에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임란때에 왜적과의 전투를 독려하다가 병사하였다. 

운장각에는 선생이 남긴 서적, 유품, 친필기록, 고문서 56종 261점(보물 제905호), 제초고 및 선조 전래의 전적문서(보물 제906호)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0여점의 유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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