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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북도

청주 가덕 화림사 백족산 백족사

by 구석구석 2009.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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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면 병암리 버드나무 당산목 

 

마을앞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이 버드나무가 있는 곳으로 도로가 지나가야 했다. 경제적 논리로만 따진다면 당연히 버드나무 당산목은 제거되어야 했고 설계 역시 그렇게 되어 있었다. 병암리 사람들은 버드나무가 사라지는게 너무 안타까워서 방송국으로, 신문사로 쫓아다니며 당산목 구명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당산목을 피해 길을 만들 경우 추가로 소요되는 예산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베어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도 병암리 주민들은 당산목 살리기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 당산목은 오랜 전설을 간직한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500여 년 전, 달이 밝은 밤만 되면 마을 앞 개울가 넓은 평바위에서 소복을 입은 젊은 여인이 마을을 바라보고 긴 머리를 하염없이 빗어 내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 병암리 마을에선 특별한 까닭도 없이 젊은이가 해마다 한 사람씩 죽어갔다.

 

큰 걱정 속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어느 고명한 스님을 찾아가 그 사연을 알리고 처방을 물으니, 마을 앞에 버드나무를 심어 개울 건너편의 평바위를 보이지 않게 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버드나무를 심게 되었으며, 마을은 다시 평안을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마을 사람들에게 버드나무는 단순한 나무 이상의 정신적 지주였다.

마을 주민들의 열성적인 노력은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충북대학교 산림자원학과 김홍은 교수 역시 이런 사연을 전해들은 사람 중의 하나. 김교수는 단순한 경제적 논리에서 벗어나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환경과 따스함과 정신적 분야까지 고려하여 더 멋지고 아름다운 버드나무숲이 있는 도로 공원을 만들 것을 이곳 저곳을 통해 강력하게 제안했다.

 

급기야 이 소식을 접하게 된 이원종 충북지사가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고 결국 완전히 설계가 끝나 시공 중에 있는 도로 건설을 철회하고 버드나무당산목이 있는 아름다운 도로 공원을 만들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상서로운 기운이 있는 당산목을 상하게 하거나 베어 버리면 급살(急煞)을 맞고, 정성껏 살피게 되면 복을 받는다고 했다. 500년 긴 세월동안 병암리 마을을 지켜왔던 버드나무 당산목이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운명을 달리할 큰 시련을 겪었으니 이제는 더 많은 세월동안 이 마을뿐만 아니라 이곳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큰 행운과 평안을 안겨 주리라.

/ 레저토피아 김웅식 

 

가덕면 병암리 산72 화림사 043-254-5321

 

경부고속도로 청주나들목, 혹은 청원나들목을 이용해 청원군 미원면 방향으로 차를 진행한다.

청주에서 미원면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비록 국도는 아니지만 4차선 도로이며 그 포장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상야리에 도착해 오른편의 가덕초등학교를 지난 후 약 200m 정도 진행하면 병암2리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는 가덕우체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오른편에 병마2리를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여기에서 오른편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약 1km 가량 오르면 화림사 경내에 도달하게 된다.

 

 

 화림사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이 1기 전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이곳에 사찰이 조성되었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찰 경내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수많은 기와조각이 출토되고 있고, 특히 1978년에는 요사부근의 기와더미에서 "청주(淸州)"라고 기록된 수키와가 발견된 일이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매우 오랜 기간 이 곳에서 사찰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던 중 사찰이 어느 순간 폐사되게 되었으며, 현재의 화림사는 1941년 김재홍이라는 분께서 법당을 짓고 이곳에 다시 사찰을 건립한 것이다.

 

김재홍이 태어나기 전 그의 아버지께서는 후손이 없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던 중 하루는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달라는 현몽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이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중, 계곡에 묻혀있던 한 기의 석불을 발견하게 되었다.

 

계곡 한가운데에서 비바람에 계류에 깎여나가고 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해 작은 초옥을 지었으며 이곳에 석불을 모시게 되었다. 석불을 모신 이후 어머니께서 지성으로 불공을 드린 결과 3년 만에 김재홍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화림사에는 한 기의 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일명 흔들바위라고 전하는 석탑이다. 석탑이 건립 당시의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아 옥개 및 탑신이 흔들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 석탑위에는 작은 돌이 얹혀져 있는데 그 돌을 문지르면서 기도하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그런데 소원이 이루어지려면 그 돌이 석탑에 딱 붙어 소원 성취를 예견해 준다고 한다.

 

1941년 창건이후 여러 불자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던 화림사에 최근 큰 재앙이 닥쳤다. 수 십년간 소중하게 가꾸어 왔던 화림사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화림사 창건 연기를 담고 있던 석불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화림사의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단지 마당의 흔들바위만이 옛 모습을 지키게 되었다. 또한 이 화재와 더불어 화림사를 지키고 계시던 스님마저 떠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 한 절망이었으나, 옛 화림사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다시 시작되었다.

 

 

백족산(413m)

 

상야리에 자리한 백족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한남금북정맥에서 조금 빗겨선 산으로, 청주에서 가까워 산책 삼아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산행이 힘들지 않고 코스도 짧아 가족 산행지로도 좋다. 백족산이라는 이름은, 세조가 이 지역을 지나가다가 계곡에서 발을 씻었는데 계곡물에 담근 발이 백옥같이 희게 보였다고 해서 백족이라고 하였다는 설과 산의 형상이 백가지 줄기로 뻗어나 마치 지네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백족산이라는 설이 있다.

 

백족사는 백족산 중턱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조여래좌상(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제 58호)이 대웅전내에 보존되어있다. 창건 시기나 연혁은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주변에는 고려시대 삼층석탑(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9호)과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근대에 조성된 불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백족사의 옛 이름은 심진암이었으나 백족산 이름을 따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 후기에 폐사된 것을 1930년에 대웅전을 지으며 중창하였다. 대웅전 앞 자연암반위에 조성되어 있는 삼층석탑은 1940년 주지 김학수가가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다.

 

산행은 병암리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정류장에서 충청북도자치연수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백족산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는 백족사까지 1.2km라고 적혀 있다. 안내판 옆에는 백족산 산행 안내도가 두 개나 설치되어 있다.

 

시멘트 포장도로는 1차로의 도로지만 군데군데 교행을 할 수 있게 공간을 마련해놓았다. 충북 자치연수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갈림길엔 이정표에 '백족사 등산로'라고 적혀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10분 정도 올라가니 넓은 평지인 백족납골탑공원에 도착한다. 시멘트 포장도로는 이 공원에서 끝이 난다.

 

백족사는 공원에서 왼쪽으로 100m 정도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납골탑이 줄 지어 서 있는 공원 오른쪽으로 산길은 이어진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300여미터의 부드러운 능선길이다. 주로 마사토로 이루어진 육산으로 길이 푹신하여 걷기에 매우 좋았다. 충북 자치연수원에서 설치한 이정표에 '등산로 A코스'와 '등산로 B코스'가 있는데 A코스는 거리가 길고 B코스는 거리가 짧다.



정상은 꽤 넓은 평지였는데 한쪽에 충청북도에서 설치한 정상 표지석이 있다. 잡목 때문에 전망은 좋지 않으나 산 아래 충청북도자치연수원이 보이고, 북서쪽으로 선두산과 선도산이 가깝게 보인다. 서쪽으로는 한계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하산은 서쪽방향으로 A코스 이정표를 따라 조금 가면 계룡산이 조망되는 곳에 8각 정자가 세워져 있다. 사면을 따라 난 하산길은 크게 가파르지 않았으며 길의 상태도 양호했다. 하산 중에 산 중턱에서 300여년의 풍파를 이겨가며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온 ‘삼지송’ 팻말이 걸린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아름드리 나뭇가지가 셋이라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나보다. 무덤을 몇 개 지나니 집이 보이고 왼쪽에 자리 잡은 충북 자치연수원 건물을 끼고 곧 큰 도로로 들어섰다. 충청북도자치연수원을 출발하여 백족사-정상-미륵사-상야리으로 하산할 경우 약 2.4km, 1시간30분 소요된다.

 

/ 김웅식의 산행이야기

 

 

상야리 산 22-1 백족사 043-254-5601

 

백족산 깊은 곳 정상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거대한 규모의 충청북도 공무원 자치연수원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청주방면 혹은 괴산방면에서 진입시 자치연수원을 목표로 삼아 백족사를 찾아가는 것이 편리하다. 또한 청주시와 미원면 사이에 위치한 도로상에 백족사의 납골공원을 안내하는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참조하면 쉽게 백족산에 도달 할 수 있다. 

 

 

 꽃피는 사월에 이 절을 찾으니 춘흥이 한창이고 채찍을 떨치고 걸어가니 내 마음은 너그럽네

어제는 응당 보슬비 내리는 것 꺼려하였는데 이 자리 문득 옛 맹세 식을까 두렵네

부처를 보고 마음을 바로하는 것은 솜을 붙인 듯한데 샘가에서 발 씻으며 급한 여울소리 듣네

枳林(탱자나무숲)의 청정함 저버릴 것을 두려워하여 향기로운 잔에 술을 조금 마시니 얼굴 보기 좋으네 

/ 간송 윤영교

 

 

 백족산에 자리한 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산의 이름이 백족산이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는데 그 중 조선초 세조와 관련된 설화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초에 세조 임금께서 속리산에 기도드리러 가는데 이곳을 지났다고 한다.

 

백족산에는 예부터 유명한 영천이 있어서 세조 임금께서 이곳에 발을 담그고 길고 긴 여행의 피로를 풀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잠깐 발을 담근 임금의 발이 갑자기 하얗게 변해버렸고 이로 인해 산 이름을 백족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백족산은 나지막한 산이기도 하며 등산로가 잘 꾸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의 등산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산이다. 백족산 입구에서 백족사를 지나 정상을 통해 미륵사, 공무원연구원으로 이루어진 등산로는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며 곳곳에 휴게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편하게 등산을 즐길 수 있다.

 

현재 백족사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과 석탑이 전해지고 있다.

분명 고려시대에 사찰이 경영된 것을 알 수 있으나 그 자세한 내막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조선조에도 사찰이 경영되고 있었음을 조선중기의 학자인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문집인 “동악선생집(東岳先生集)”에서 확인 할 수 있으나 이외에 더 자세한 사찰의 내막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사찰은 조선후기 어느 순간 폐사가 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사찰의 역사를 잇기 시작한 것이다. 사찰의 역사를 잇게 된 사연이 또한 사내에 전하고 있다.

 

1920년대에 청주가 고향인 송씨가 일본에 가서 살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자식이 없어 항상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 꿈에 고향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한다. 꿈에서 고향의 백족산을 거닐고 있는데 이때 산신령이 나타나 “나는 백족산 산신령이다. 지금 저 쓰러진 법당 속에 부처님이 파묻혀 계시니 네가 부처님을 구해주면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하였다 한다.

 

꿈을 깨어 급히 고향으로 돌아와 백족산으로 향하니 거기에는 실제로 쓰러진 법당이 있었고 잔해 사이에 돌부처가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이에 그는 정성으로 초옥을 지어 이곳에 돌부처를 모시고 정성들여 기도한 후 결국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 뒤로 백족사의 석불에게 소원을 빌면 자식을 점지해 준다는 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실제로 영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백족산 등산로를 따라 한참을 오르면 백족사 근처에 넓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족사에서 운영하는 납골공원이다. 근래에 새롭게 조선의 전통적인 장례풍속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염려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납골공원이 부각되고 있다. 이런 납골공원의 선구적인 사례가 백족사에 있는 것이다.

 

백족사에는 뛰어난 석조의 성보가 많다. 이들 중 현재 석불좌상과 석탑을 문화재로 등록하고자 하고 있다. 석불좌상과 석탑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만큼 문화재 등록에는 그리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어렵게 전해져 오며 많은 부분이 마모되고 파손된 만큼 앞으로도 지금의 형상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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