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이남규고택
3대가 독립유공자인 집안이 있다. 이어서 국가유공자까지 무려 4명이 나라를 위한 삶으로 살았던 집안이다. 이 집안의 나라를 위한 삶의 시작은 대한제국 말기 항일운동가였던 수당 이남규(李南珪) 선생이다. 또 이분 이남규 선생의 아들 충구, 그의 손자 승복이 역시 독립유공자이고 증손 장원은 한국전쟁 때 참전했다 죽은 국가유공자이다.
별당과 같은 사랑채의 호서지방 반가로 1637년(인조15)에 지어진 충남유형문화재 68호인 이남규 선생의 고택이 상항리에 있다. 이 자리에 이남규 선생을 기리는 '수당교육관'을 신축하고 2008. 9. 25일 늦은 3시 개관식을 열었다.
이 교육관의 주인 수당 이남규 선생은 학문과 덕망이 높았으며 1875년 사마시에 합격,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1894년 6월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 무도함을 상소, 비난하였다. 1895년 영흥부사 시절에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를 보고는 일본에 대한 복수를 눈물로 상소하였다.
이후 1907년 의병 민종식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일본군에게 연행되어 온양까지 끌려가다가 아들 충구와 함께 피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또 선생의 손자 승복은 13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러시아, 만주, 조선 등지에서 활동한 임시정부 산하 비밀요원이었으며, 1920년대 후반에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단체 '신간회(新幹會)'의 강령인 '연통제'를 만든 주역이었다고 한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언론인을 지냈고, 옥고를 치르다 해방 직후 풀려난 분이다.
최근까지도 친일파 후손은 옛 재산 찾기에 혈안이 되었으며,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지만 독립유공자 후손은 대부분 비참하게 산다는 얘기에 우린 울분을 터트리곤 한다. 그러면서 독립유공자들의 고택이 흔적도 없이 없어져 버리기도 해 안타깝기만 했다. 오마이뉴스2008.9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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