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전라북도

정읍 동학농민혁명유적지권-동학혁명 황토현전적지 고부관아 전봉준 백정기

by 구석구석 2008. 9. 18.
728x90

 

원평천, 동진강 연안의 비옥한 농지에 형성된 배들평야와 고부천 주변의 드넓은 농토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방관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지가 되었다. 행정구역상 고부에 속했던 이 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실패 후, 일제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인 고부권역의 일부, 태인, 정읍 등이 정읍으로 통합되었다.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최고지도자인 전봉준,김개남의 주 활동무대였으며, 손화중?최경선 등의 출생지이자 동학의 인맥을 맺어나갔던 곳 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었던 고부봉기는 1893년 11월 사발통문 모의에서 행동강령을 정하고, 다음 해 1월 고부관아를 점령하면서 비롯되었다. 아울러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혁명의 기치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던 황토현 전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정읍권에는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의미있는 장소로 인정받는 유적지가 많다. 사발통문 모의지인 고부 죽산마을, 고부관아터, 고부봉기의 농민군 집결장소인 말목장터,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 상징물인 만석보, 전봉준고택, 손화중,김개남,최경선 생가터, 황토현전적지, 1차 농민봉기 당시 농민군 지휘부를 재정비하였던 백산봉기터 등이 그곳이다.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동학혁명모의탑 

1892년 4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했던 조병갑은 온갖 수탈과 학정을 자행하였다. 이에 전봉준 등 20명은 1893년 11월 당시 송두호(현재 이두형가옥)의 집에 모여,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이 회합에서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을 죽이며,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며,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에게 탐학한 구슬아치를 징치하며,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 사발통문은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조직적 봉기를 계획하고 행동목표를 밝힌 문서라는 의미를 갖는다.

 

사발통문은 고부에서의 봉기를 민란으로 보느냐, 혁명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를 규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사료이다. 만약에 이것이 진본이라면 고부의 첫 봉기부터 혁명의 밑그림이 그려졌다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발통문을 놓고 진본이다, 아니다 하면서 학계에서는 해석이 분분한 실정이다.

 

신중리 주산마을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정읍시를 중심으로 관심있는 지역인사를 참여시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4327년(1994)구성하고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사발통문 작성지인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新中理) 주산(舟山)마을에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을 건립한 것이다.


탑은 5m 높이의 주탑과 사발통문 모양의 둘레석, 주탑을 둘러싼 12m의 보조탑 32개로 되어 있다. 보조탑 전면에는 백년전 농민군들의 울분, 비탄 등을 부조물로 표현하였고 중앙 주탑에는 농민군의 한을 극복하고 전진하는 기상으로 승화시켜 오늘날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정신적 상징물로 이름없이 쓰러져 간 무명동학농민군을 가슴에 끌어안고 힘차게 보국안민을 외치는 형상으로 조각하여 백년전과 백년후의 연계성을 강조하였다.


이 탑은 정읍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회장 김현)가 주도하여 위령탑 건립과 위령제를 지낸 바 있다. 무명 동학농민군을 위한 조형물로서는 전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것이다.

 

고부면 고부리 166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4호 고부관아터

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고부농기의 중심지역이었다. 고부관아는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의 표상으로 고부봉기 때 농민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금의 고부초등학교의 자리가 옛 고부관아터이며 학교 바로 옆은 향교이다. 오늘날 고부는 정읍시에 딸린 면이지만 갑오년 당시에는 인근 지역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정읍보다 큰 고을이었다.

 

봉건 관리들의 탐학이 극에 달했던 상황에서 고을의 물산이 풍부하고 번성했다는 것은 곧 관리에게 뜯길 일이 많다는 것이므로, 오히려 주민의 고달픔을 더해주는 일이었다.

 

덕천면 하학리 사적 제295호 황토현전적지

황토현은 덕천면 하학리와 도계리 사이에 있는 해발 35.5m의 황토 언덕으로 1894년 4월 7일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과 싸워 승전한 곳이다. 1894년 4월 6일 농민군 4,000여명이 도교산(현재 도계리 도학초등학교 뒷산)에 집결하자 백산으로 출동했던 감영군 약 2,000명이 추격해왔다.

 

감영군을 유인한 농민군이 해질 무렵 사시봉에 진을 치자 감영군은 황토재에 진을 치고 일전을 치를 준비를 하였다. 전봉준은 이날 밤 감영군의 기습공격을 예상하여 진지를 비워 병력을 주위에 매복시키고 허수아비와 나뭇가지에 흰 옷가지를 걸쳐 위장토록 하였다.

 

7일 새벽 농민군을 과소평가한 감영군은 농민군 진지를 향해 거침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순간 주위에 매복해 있던 농민군이 삼면에서 공격하자 많은 사상자를 내고 혼비백산 도망치는 감영군을 추격하여 황토현 본진을 오히려 역습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동학사>에 의하면 전봉준은 농민군 40여명을 뽑아 무장보부상으로 가장시켜 관군에 잠입, 선봉을 서게 하여 유인토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 황토현 마루에는 농민군이 내걸었던 ‘제폭구민, 보국안민’이란 구호를 새겨놓은 최초의 기념탑인 갑오혁명기념탑(1963년 건립)이 있다. 뒷면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 하는 구전민요가 새겨져 있다. 황토현 주변에는 전봉준 장군 부인의 묘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 자취를 알 수 없다.

 

근처 황토현전적지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비롯해 1987년에 세운 전봉준의 동상과 사당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 등을 갖추고 있다. 1983년 콘크리트 한옥 양식으로 건립한 기념관엔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기록화 4폭과 전봉준의 마을 유품, 사료 및 당시의 병기 등 87종 104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장군과 동학농민군 참전제위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928 구파 백정기의사 기념관

백정기의사가 1934년 6월 5일 39세의 나이로 서거한지 62년 후인 1996부터 성역화사업이 시작되어 2004년 6월 5일 70주년을 맞아기념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총 부지면적은 6,6307평으로 기념관에는 백정기의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의열사, 백정기의사의 유출 밑 활동상을 전시설명하는 구파기념관, 역사의 산교육장인 청의당 강당, 백정기의사의 민족의식과 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고귀한 뜻을 새기기 위한 의열문, 백정기의사의 애국정신과 독립정산을 기리기 위한 승의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의외에도 독립정산을 기리기 위한 숭의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외에도 백정기의사를 형상화 한 동상, 어록비, 순국비, 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본 기념관 입구부에는 음수대 및 파고라 등 관람객을 위한 휴식공간과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명실공히 성역화의 장으로서 준비가 마련되어 있다.

 

이평면 장내리 458-1 사적 제 293 호 전봉준장군 고택

이평면 장내리 조소 마을(갑오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고부군 궁동면)에 있다. 전봉준의 유일한 유적지인 이 초가집은 전봉준이 고부농민봉기 5~6년 전에 이사와 훈장생활을 하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거주하던 곳이다.

 

1894년 고부농민봉기 이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 버렸으나 다시 보수하여 사적(제293호)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죽창문의 방 3개와 부엌이 딸린 본채가 있고 마당 한쪽엔 변소와 헛간으로 쓰이는 아래채가 따로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집이다.

 

전봉준 고택에서 500m쯤 떨어져 있는 소나무 숲엔 1954년에 천안 전씨 문중에서 세운 ‘전봉준장군 단비’가 있다. 비문 앞면에는 태극문양과 ‘갑오민주창의통수 천안전공봉준 지단(甲午民主倡義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이라 새겨져 있다.

 

이평면 두지리 무릉  말목장터

농민봉기의 불이 번진 역사적 장소이지만 그날을 되새길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터만 있다. 부안과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장터로 1894년 고부 농민봉 기의 불이 번진 곳이다


이미 11월에 농민군 지도자들이 이에대한 모의를 끝내고 1월 10일 밤 미리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손에 괭이와 죽창을 들고 이곳에 모여 고부관아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세 갈래의 길로 오가기만 할 뿐이고 그날의 일을 기념할 만한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옛 장터의 한 귀퉁이에는 감나무만이 가지를 흔들고 있고 1994년 초에 그 옆에 말목정을 세워놓았다.

 

이평면 하송리 17-1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 만석보유지비

만석보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이평면 하송리 지점에 쌓았던 보(洑)로서 농민들의 분노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 작용을 하였다. 1892년 5월 고부군수 조병갑은 이미 제 역할을 하는 예동보(禮洞洑)가 있었음에도 농민들을 강제동원해 그 아래에 새로운 보를 막았다.

 

만석보는 홍수가 지면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는 오히려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도 조병갑은 보세(洑稅)라 하여 보의 윗논은 1마지기에 2말, 아랫논은 1말씩 징수하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에 의해 고부농민봉기를 촉발시켰으며 1894년 농민군이 만석보를 때려부쉈고, 1898년에 군수 안수길이 만석보를 완전 철폐했다. 현재 만석보터에는 1973년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운 유지비와 1999년에 세운 양성우 시인의 ‘만석보시비’가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