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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정읍 태산선비문화권-태인향교 피향정 김동수가옥 칠보수력발전소 무성서원

by 구석구석 2008.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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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면 태성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태인향교(만화루,동현)

전북 문화재자료 제75호인 태인향교는 조선 세종 3년(1421년)에 당시 현감 안기(安起)가 건립한 것으로 외삼문(外三門)대신 만화루(萬化樓)가 세워진 것이 특징이다.


향교의 문루인 ‘만화루(萬化樓)’(전북 유형문화재 제1백21호)는 ‘공자지도 만물화생(孔子之道 萬物化生)’에서 이름지어진 것이며 정면을 4칸, 측면을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익공집으로, 화강암의 바른층 을 쌓고 기단의 중앙부를 끊어 장대석의 넓은 계간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며, 정면을 짝수칸으로 하여 출입문을 두 곳으로 나누어 낸 것도 다른 건물에서 찾아보기 힘든 형태다.


만화루가 이곳 태인향교에 세워진 것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탄생지였기 때문이라고 전하며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현판의 글씨로 미루어 정조 18년(1794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화루 현판은 조선 정조18년(1794)태인 현감으로 부임해왔던 조항진의 글씨이다.

 

태인면 태창리 1-6 보물 제289호 피향정

피향정은 호남 제일의 정자이다. 원래 이 정자의 앞뒤로 상·하연지가 있어 아름다운 경승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하연지만 남아 있다.


신라 시대에 최치원 선생이 태산 군수로 재임중에 이곳 연지가를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 다는 전설이 있으나 정자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의 정자는 조선 시대 중기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집이다. 4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고 주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다. 공포는 간결한 초익공 건물로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합각 밑에는 작은 우물천장이 특이하게 설치되어 있다.

 

산외면 오공리 814 중요민속자료 제 26 호 김동수가옥

조선 후기의 주택을 판별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간구성에서 사랑채와 안채가 확연히 구분되어 있으면서 비교적 개방적인 형태-ㅁ자가 아닌 ㄱ자 형태를 하고 있으며 18,9세기에 지어졌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고, 두 번째로는 주택에 사용된 부재-기둥, 도리, 보-가 약해 보이거나 덧덴 자국이 있고 보나 도리 중 휜 것이 많으면 대체로 조선 후기의 주택이다.

 

18세기 후반인 1784년에 지어진 '김동수 가옥'의 경우도 위의 판단법에 딱 들어 맞는다.
사랑채와 안채가 안 행랑채와 담장으로 인하여 강한 내외를 한 흔적이 보이고, 사랑채나 안채의 기둥부제가 전 시대 가옥들에 비해 빈약하며 행랑채 등에는 창방을 휜 부재로 쓴 경우가 보인다.
부재가 가냘퍼서 인지는 몰라도 사랑채나 안채의 모습이 썩 잘생겨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안채의 평면 구성은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배치를 보이고 있다.

오른쪽의 도면은 전라북도 순창에 있는 중류가옥의 안채이다. 도장을 가운데 두고 시어머니의 큰방과 큰 며느리의 작은방이 좌우로 있고 도장으로 통하는 문을 가지고 있는데, 큰방에서 도장으로 문이 나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큰며느리의 작은 방에서도 문이 나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집안의 권리를 맏며느리에게 넘겨주지 않는 호남지역 가정의 특징이 가옥에서도 잘 나타난 예인데, 집안에 행사에 대한 권한이 없는 큰며느리가 불만을 갖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권한을 시어머니와 큰며느리가 공유하는 모습이 가옥의 평면에도 반영이 된 것이다.

김동수 가옥의 안채가 좌우 대칭으로 두 개의 부엌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마도 이 집을 처음 지을 당시 맏며느리의 나이가 꽤나 많아서 집에서의 경제권이 크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이 가옥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공간의 구성에 있다. 마당의 크기와 위치, 그리고 대문간에서 안채까지 흐르는 동선의 관계가 뛰어난데, 그 중에서도 문간마당과 안마당은 더욱 아름답다. 행랑채와 담장으로 ㅁ자형을 구성하는 문간마당은 마당의 크기, 사랑채로 이어지는 중문의 위치, 식재 그리고 담장 너머로 머리가 살짝 보이는 안 행랑채 등 어느 곳 하나 허술한 곳이 없다.

안마당은 ㄷ자형의 안채 내부 마당과 안 행랑채 사이의 긴 가로마당이 만나서 아늑함과 긴 마당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고, 좌측 안사랑채 사이의 담장은 두 공간의 관계를 잘 정리하고 있다.

 

칠보면 시산리 칠보수력발전소

1925년 3월, 6,215m 길이의 칠보터널이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에서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사이로 뚫리면서 유효 낙차가 136m인 칠보 수력발전소가 세워졌다.

방류된 물이 1927년 방조제가 완공된 김제시 광활면 간척지까지 관개되어 농업용수로 이용되었다.

옥정호의 물을 수로로 끌어들여 칠보발전소를 만들고 또 이 물을 이용하여 동진강 물줄기를 더욱 굵게 하여 동진강 연안의 농지를 적셔주고 있다.
발전 용량은 28,800Kw이다.

 

칠보면 무성리 310번지 태산선비문화사료관

칠보는 산자수명하며 아름다운 풍경은 고현팔경과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을 낳았고 법도 있는 이 고장 예풍은 고현향약을 탄생시켰다. 고현향약과 무성서원을 비롯한 자료를 한데 모아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31종의 자료를 전시한 태산선비문화 사료관이다.

 

칠보면 무성리 500  사적 제 166 호 무성서원

이 건물은 신라말의 유현인 고운 최치원과 조선 중종때 태인현감이었던 신 잠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사액 됨으로써 무성서원이라 하게 되었다.
사우에는 최치원을 비롯하여 신 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 관 등의 향현을 배향하였다. 현존 건물로는 현가루를 비롯하여 강당, 동서재, 사우, 비각등이 있다.

 

사우는 성종15년(1484)에 세워진 것이나 헌종 10년(1844)에 중수되었고, 강당은 순조 25년(1825)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순조 28년(1828)에 중건하였다.
이 서원에는 성종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등의 귀중한 서원 연구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신라시대 대문호이며 정치가였던 고운 최치원이 신라 정강왕(定康王) 1년에 태산군수(지금의 泰仁)로 와서 있는 동안 치적이 뛰어나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군수로 떠나게 되니 그를 흠모하는 나머지 선생의 생전에 월연대(지금의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의 서쪽 능선)에 생사당을 세우고 태산사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이 사당은 고려 말에 훼파되었다가 이조 성종 14년(1483. 정극인 선생 사후 2년)에 유림들의 발의로 월연대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지금의 그 자리에는 불우헌 정극인이 창설한 향학당이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 뒤 이조 중종 39년(1544)에 태인 현감이던 영천 신 잠이 부임하여 7년 동안 선정을 베풀다가 동 서 남 북 학당을 세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고 명종 4년에 강원도 간성군수로 이임하니 역시 주민들이 그를 사모하여 생사당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22년에 무성이라는 사액을 받아 이 두 사당을 병합하여 무성서원이라 했으며, 삼현을 더 모시다가 뒤에 두 분을 더 모시니 칠현을 더 배향하게 되었다.
배향된 분은 고운 최치원, 영천 신 잠, 불우헌 정극인, 눌암 송세림(訥菴 宋世琳),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명천 김 관 등이다.

그 뒤 정조 8년(1784)에 쌍계사로부터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었다. 이 서원은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서 위기 에 처했으나 당시의 현감, 유림 등이 청원하여 화를 모면했을 뿐 아니라 전라도의 철폐령에서 제외된 세 개 서원으로 필암, 포충, 무성서원 중 하나이고 원노 30명, 세미 3결(結: 약 9,000평)을 보조 받기에 이 르렀다.


현재 건물로는 사우 3칸, 명륜당 5칸, 현가루2층 3칸, 장수재 4칸, 흥학당 4칸, 서호순비각 1칸, 고사 3칸 등이며 1992 년에 병오창의기적비를 김성년 정읍군수가 세웠다. 문루인 현가루는 원주를 세운 2층으로 된 기와집이며 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이 있고 3칸 대청과 그 좌우에는 단칸의 협실이 있으며 동서재인 장수재와 흥학재가 있다. 사우는 성종 15년에 지었으나 현재의 것은 1844년에 중수한 것이며 강당은 1825년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828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동서재도 숙종때 건립하였으나 현재의 건물은 그 뒤 중수한 것이다. 사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며 이 서원에는 성종 17년 (1486)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 등의 서원연구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칠보면 무성리 은석마을 정극인묘소

- 세종 11년(1429)때 : 생원시 합격
- 단종 원년(1453)때 : 식년 문과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이르렀으나, 수양대
  군의 왕위찬탈을 보고 고향인 전북 태인에 은둔, 교육에 전념.
- 성종이 즉위, 상소문을 올려 폐습을 말씀드리니, 이에 벼슬을 내림.
- 작품 : <상춘곡>(최초의 가사)
- 저서 : [불우헌집]

- 사후에 예조판서에 추증(追贈)
- 유적지 : 무성서원(정읍시 원촌마을) : 최치원, 정극인, 송세림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
  정극인묘 재실(무성서원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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