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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김포 북변동-김포향교 김포중앙교회 김포성당

by 구석구석 2008.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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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변동은 옛 김포군청(현 경찰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어서 북변리라 한 것으로 고유어 명칭은 북녘말이다. 동편은 동변 동녘말, 서편은 서변 서녘말, 가운데 마을은 중구라 불러왔다.
옛 지명 중에는 사창(社倉)터, 봉화(烽火), 병막촌(病幕村) 등도 있는데 봉화는 장릉봉침시(章陵封寢時)에 서변리 뒷산인 도당산에 이설하였으나 도당산 봉수대는 이성원이 향교를 옮길 때 그 곳이 안산이 되므로 감정리에 소재한 냉정산으로 옮기었으나 갑오개혁 이후에 폐지되었다. 서변 도당산에 봉화대가 있었으므로 마을 뒤에 있는 도당산에 봉수대가 설치된 이래 마을이 형성되어 봉화마을이라 불렸다.
병막촌은 일제강점 후 1910년경 당시는 의료진이 부족한 시대였으므로 주민들에게 전염병이 발병하면 이곳에 환자를 격리 수용하던 곳이라 하여 병막촌이라 하였다. 예전에 홍역과 괴질을 예방하기 위해 기원하는 제단이 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말까지 서변마을 앞에는 병자들이 기거하며 기원, 치유하던 숙사도 있었다. 1907년에 제도가 폐지되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김포향교는 문화재자료 제29호(1983.9.19)로 고려 인종 5년(1127)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고, 최근 1965년·1972년·1988년 3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하였다.그 외에 재실(齋室)과 출입구 구실을 하는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을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만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포시 북변동 226-37  김포문화의 집 031-983-2884

 

지역주민의 문화향수 기회와 문화활동 참여를 위해 문화예술에 관련된 프로그램과 정보 및 지식을 제공하고 일상 생활속에서 문화와 이용자를 하나로 엮어주는 매체로서 다양한 문화 예술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소규모 복합 문화 공간. 도서, 영상매체, 인터넷을 통한 문화 예술의 관련지식의 활용과 전시회, 소규모의 공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가족단위 또는 동호회원들의 문화창작 실현 공간제공을 위해 개설

  

 

100년의 역사 김포중앙교회

김포중앙교회(담임목사 박영준)는 한국선교 초기인 1894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에게 전도를 받고 김포에서 새문안교회로 출석하던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면서 시작되었다(초대 당회장 언더우드 목사). 초창기에는 성령운동을 통해 성장했으나 1962년 교단 분리로 잠시 혼란기를 거쳤으나 초대 선교사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의 그루터기는 살아있어 새 힘으로 성장했다. 1995년 12월 10일, 연건평 540평의 새 성전을 완공, 입당하고 은혜로운 예배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섬김의 봉사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교인수는 장년부 1천여명, 교육부(유아∼청소년) 4백여명 등 총 1천4백여명.

통진읍 서암리 출신으로 서암초등학교, 통진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서울장신대, 장로회신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International College(D.Min), 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을 수료한 박영준 목사(61·감정동 삼환아파트)는 서울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다 부천세광교회를 개척하고 일산신광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1990년 김포중앙교회에 부임, 현재까지 담임을 맡고 있다.
 

100년의 역사 김포제일교회

김포제일교회(담임목사 김동청)는 김포중앙교회와 함께 새문안교회가 설립한 10개 교회 중 하나로, 언더우드 목사가 초대 당회장으로 재직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포제일교회는 1894년 3월 사가(私家)에서 창립예배를 드리고, 그 후 1905년 4월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쇄기를 팔아 교회대지 3500평을 기증, 현 위치에 700원의 헌금으로 33평 예배당, 15평의 목사관, 12평의 교육관을 건축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친필 당회록(1912년)을 보관하는 교회로서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2000여 성도들이 열심을 품고 교회를 섬기고 있다.

2000년에 김동청(45·북변동) 목사가 부임하면서 당시 교회 동쪽 48번국도 길가 땅을 매입, 원래 막혀있던 동쪽에 주차장을 만들고 도로와 연결하여 출입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당회와 한달 정도 대화와 이해를 바탕으로 풀어나간 김 목사는 6백여 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열었고 이를 통해 넓은 주차 공간을 마련해 성도의 주차 공간뿐 아니라 지역사회에 개방,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김포제일교회로 이미지를 바꿨다. 이후 처음 부임했을 때보다 몇 배의 부흥을 거듭했다.

 

김포제일교회는 지역사회를 섬기고 주민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주민을 위해 토요문화센터를 개설, 현악기 레슨 및 음악사역에 앞장서고 있다. 김 목사 자신이 음악을 전공, 계명대학교에서 음악학사,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음악석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마산에서 목회를 하다 김포제일교회 제7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김 목사는 현재 교회 사택에 거주하고 있으며 부인 손태숙(42)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고3)을 하나 두고 있다.

 

북변로 29-12/ 김포성당 

김포성당은 1910년 걸포리 공소로 출발해 1956년 지금 위치에 건립됐으며 옛 석조건물은 국가등록문화재 제542호에 지정돼 있다.

김포 북변4구역 재개발로 진입로 훼손위기에 놓였던 김포성당이 성당부지 원형을 지켜냈다.

재정비촉진지구인 북변4구역은 김포시 북변동 12만7천여㎡에 아파트 3천300여 가구를 건설하는 사업으로 2020년에 관리처분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김포성당 옆 왕복 2차선 도로를 6차선으로 확장하는 계획이 성당부지 1천893㎡를 침범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신자들의 반발을 샀다. 동산 형태인 성당부지가 잘려나가면 절개지를 따라 높이 8~12m의 절벽이 생길 상황이었다.

홍도평이 내려다보이던 성당 뒷동산과 신자들의 기도공간 '십자가의 길', 100년 수령 소나무 등의 보존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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