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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은평구 진관동 진관사 사모바위 승가사

by 구석구석 2008.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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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관사

대중교통: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7724번 마을버스(진광사가 종점)

 

삼각산 진관사 일주문

  진관사의 '독성각'은 '독성전'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그런데 1칸짜리 좁은 전각이다. '각'보다는 '전'을 좀 더 큰 것으로 생각하는 이 근거 없는 편협한 기준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듯, 겨우 한사람 절을 올릴 수 있을 만큼 작은 공간이다. 

대부분의 절에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란 규모가 비교적 작은 전각이 하나나 둘 정도는 있는데, 칠성을 모시면 칠성각, 산신을 모시면 산신각, 독성을 모시면 독성각이다. 한 전각에 셋을 모두 모시면 삼성각인데, 절에 따라 삼성각과 이런 전각을 함께 두기도 한다. 

한국전쟁에도 훼손되지 않은 독성전(시문화재자료34호), 칠성각(시문화재자료33호), 나한전은 상궁들의 발원으로 지어졌으며 세 전각에 12점의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다. 조선후기 건축과 민간신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다. 

'ㄱ자'를 이룬 이 세건물 모두 멋을 극히 제한한 맞배지붕. 그런데 나한전은 옆처마에 풍판을 달지 않고 치장을 했는데 독성전, 칠성각은 풍판을 달고 화방벽을 하여 소박하다. 

나한전에도 석가모니 삼존불을 비롯해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와 나한도, 16나한상이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특히 16나한도는 민화풍으로 그려졌는데 중국식 나한도가 한국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예로 미술사적, 종교적 자료 가치가 높다고 한다. 

칠성각 뒤, 천여 년은 족히 됐음직한 참나무와 스님들이 베푼 공양을 먹이로 살아가는 날다람쥐, 뭇새들을 보는 것 또한 즐겁고 절 뒤란의 솔숲도 적잖은 위안이다. 

/ ⓒ 2008 OhmyNews 김현자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 의상봉능선 - 사모바위 - 승가사 

 

 비봉능선에서 승가사인근에 위치하며 마애불방향으로 있다.

 

 사모바위는 사각의 바위가 얻어져있어 불리는 이름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연인의 전설도 있다. 병자호란에 남자는 전쟁터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사랑하는 연인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여인들이 모여 살던 북한산 자락을 떠돌며 그녀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북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고 돌아올 그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사모바위는 김신조 바위라고도 불리는데, 지난 68년 북한의 청와대 폭파 기도때 생포된 김신조등의 1차 목표지점이 사모바위였다고 한다.

 

승가사

 

 

보물 215호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

거대한 바위면에 홈을 파서 불상을 새겼으며, 머리 위에는 8각의 머리돌을 끼워 넣어 얼굴을 보호하고 있다. 얼굴에는 단정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몸은 경직된 모습이 나타난다. 왼팔에 새겨진 옷주름에서는 기하학적인 추상성이 엿보인다. 강한 느낌의 얼굴, 평면적인 신체 등의 전통적인 양식에서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마애불좌상으로 높이 평가된다.

 

북한산 기슭의 바위에 새겨진 장대한 규모의 고려시대 마애불상이다.

이 불상은 대체로 고려 초기인 10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큰 규모와 위엄 있는 모습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상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광주 철불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상 얼굴 부분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몸에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가사를 입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와 내렸는데, 이와 같은 손의 표현을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나타내는 항마촉지인이라고 부른다. 대좌에 새겨진 연꽃잎은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하여 불상 제작 기술의 우수성을 잘 보여 준다. 불상의 좌우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데 불상을 보호하기위한 목조가구가 이곳에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현재 불상 머리 위에 있는 천개석은 나중에 만들어 얹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불상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마애불상 가운데 제작기술이나 규모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마애불상 안내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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