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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도

화성 309번지방도 용두리 옥란재 안곡서원

by 구석구석 2008.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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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평리 가는 길에 만나는 용두리 '옥란재' 02-501-9949 02-574-9947  010-3333-9385

10~20인용/전관 통째예약만 가능하고 40만원/취사가능

화성의 대표적인 여행코스인 제부도와 궁평리 사이, 왕모대해변 가까이에 아름다운 한옥 옥란재가 있다. 야트막한 언덕아래로 남양만이 내려다 보여 집 자체의 아름다움 만큼이나 주변 풍광도 뛰어난 곳이다.  

 

잘 다듬어진 넓은 마당에는 두개의 연못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고, 그곳에는 토종우렁이가 살고 있고 연꽃과 수련이 가득 심어져 있다. 옥란재를 문화계 인사들이 사색공간으로 많이 방문해 <책 읽은 집>으로 불리기도 한다.  

 

남양홍씨 참의공파 후손들이 400년 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이곳은 여름이면 반딧불과 장수하늘소가 날아드는 생태의 공간이기도 하다. 옥란재는 경기지방의 전통 중산층 가옥인 80년 된 한옥을 깨끗하게 수리해서 복원했다.

 

전통한옥의 풍취와 모양은 그대로 보전하면서도 호텔의 편리함을 내부공간에 담고, 장작불 때는 작은 아궁이방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전통 한옥의 멋과 생활체험을 맛볼 수 있다는 게 이집의 장점이다.

 

방안에는 오래된 가구와 고서,제기 등 골동품들도 옛 모습 그대로 놓여져 있고 주변에는 수백년 된 밤나무와 은행나무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연못 너머로 두 채의 한옥이 있고 마당 옆에 세미나실이 별도로 꾸며져 있는데, 숙박을 하는 곳은 관서당과 독락당, 안채. 송혜교가 주연을 했던 KBS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보았던 연기 나는 한옥과 장독이 가지런히 놓인 마당 모습이 바로 이곳이다.  

 

옥란재는 운영자체도 다른 곳과 판이하다. 펜션이나 민박처럼 방 한 두 개씩을 빌려주지 않는다. 옥란재 시설 전체를 빌려주는 데, 단 한 팀에게만 일주일에 한번 빌려준다. 온 사람들이 일체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집처럼 편히 머물다 가라는 의미기도 하고, 집과 주변 시설을 가장 잘 보존하는 방법 중 하나기도 해서다.

 

  

오리가 한가로이 노니는 연못(800평)에서 아이들과 함께 보트놀이도 하고 숲속의 전용 산책로를 돌며 산림욕을 한 뒤 솔바람 부는 통나무 캐빈(오두막)에 들어가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는 그런 기쁨을 주는 공간으로 책 읽는 집은 잃어버린 "고향의 옛 집"을 생각나게 하는 정다움이 있다.

  

바다바람과 맑은 햇살사이로 지저귀는 종달새의 울음, 날 저물기 전에 동네어귀를 부리나케 빠져나가는 어리장수의 엿가위 소리, 뒷동산의 솔바람, "이려.이려~" 쟁기끄는 황소를 몰고가는 동네 일꾼들의 분주한 모습들, 명절때마다 두레패가 꾸미는 흥겨운 놀이판.... 이 모든것들이 우리들 추억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그 고향의 옛 집. "책 읽는 집"은 잃어버린 고향 옛집의 꿈이 살아있는 그런 곳이다.

자료 - 한국관광공사, 흙집마을

 

상안리 585번지 향토유적 제1호(86.5.20) 안곡서원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이자 향촌자치 운영기구이다. 기록에 의하면 화성시에는 모두 3개의 서원이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명고서원과 매곡서원은 소멸되고 현재는 안곡서원만 남아 조선시대 화성지역 서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곡서원은 1616년(현종 7) 남양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민시중(閔耆重)이 지방유림의 공의에 따라 기묘명현(己卯名賢) 도원재(道源齋) 박세희(朴世熹, 149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안곡사(安谷祠)를 건립하고 그의 위패를 모셔 향사(享祀)한 데서 시작되어 2년 뒤인 1668년(현종 9)에는 송촌 박세훈을, 그리고 1697년(숙종 23)에 인재(忍齋) 홍섬(洪暹)을 추가로 배향하였고 1721년(경종 1) ‘안곡’이라는 사액을 받아 정식 서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76년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곡서원에 처음 배향된 박세희는 중종 때의 문신으로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7년 정언에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1519년(중종 14) 좌부승지로 재직하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로 분류되면서 강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기묘사화’는 반정으로 연산군을 재위에서 몰아내고 왕좌에 오른 중종이 반정의 공신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신진사림들을 한순간에 정계에서 축출해 버린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신진사림을 이끌었던 조광조는 능주(綾州)에 유배된 후 사사되었고 그를 따르던 많은 사림들이 유배형에 처해져 귀양지에서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하는데 박세희는 바로 이 기묘명현의 한 사람이었다.  
 
현재 안곡서원은 6칸의 사우와 신문(神門), 동서협문(東西夾門), 강당 4칸 그리고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는 정면 6.36m,측면 4.25m 규모이며 연등천장의 익공집에 맞배지붕 건물로 단촐하지만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건물이다. 강당은 정면 5.95m, 측면 3.8m의 규모로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은 민도리 집으로 중앙에는 마루가 있고 양쪽에 협실이 있다. 내부에는 ‘안곡서원중건기’, ‘안곡서원중건상량문’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주로 서원의 행사나 유림들의 회합,학문이나 예절 등을 강론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안곡서원에서는 지금도 매년 문중과 인근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 맞은편에는 수령이 수백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원을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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