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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성주 905번지방도-인촌리 조선왕조태실 선석사

by 구석구석 2007.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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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군 인촌리

 

월향면 인촌리 세종대왕자태실(국가지정 사적 444호) 

세종대왕의 왕자 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서진산 기슭 태봉 꼭대기에 있으며, 세종대왕은 제5대 임금이 되는 문종, 제7대 임금이 되는 세조 그리고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이렇게 8명과 첩의 자식으로는 화의군,계양군,의창군,밀성군,익현군,녕해군,담양군,한남군,수춘군,영풍군 이렇게 10명, 모두 18명이 있다.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이 열여덟 왕자들의 태실과 세종대왕의 왕손인 단종의 태실까지 모두 19기가 있다.

 

이 태실은 세종 20년~24년(1438년쯤)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수양대군(세조)을 비롯하여 세종대왕의 열일곱 왕자와 왕손인 단종의 태까지있으며 넓고 평평한 터에 우리가 절집에서 자주 보았던 '부도' 같기도 하고, 큰 돌 항아리 같기도 한 태실이 따로따로 있는데 저마다 그 앞에는 누구의 태실인지를 알리는 빗돌이 있으나 한글로 된 안내 글이 없어 구분은 힘들다.  

 

만든 때로부터 560해 남짓 되는 세월이 흘렀으니 켜켜이 이끼가 쌓이고 시커먼 게 아주 오래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으며 태실 들머리에 있는 안내판에다가 이 태실을 만든 방법과 지난날 역사를 적어두었는데, 그것으로나마 세종대왕 왕자태실을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자가 태어나면 태를 깨끗이 씻은 뒤에, 백자 항아리에 잘 보관했다. 그리고 이 항아리를 묻을 좋은 터와 날짜를 따로 잡아서 '안태식'이라고 하는 의식을 크게 치렀다고 하며 이같이 왕자들의 태를 소중하게 다루는 데는, 우리 조상들의 슬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 나고 자라고 귀하게 여김을 받으며, 앞으로 큰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이 '태'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여 '태'를 더욱 정성껏 보관했다고 하며 왕자가 나중에 국왕에 오르면 태실을 덧입혀서 가봉을 한다.

  

기단석 밑으로 토석, 개석, 지대석을 만들고 가장 아래에 '태'가 담긴 백자 항아리를 넣는다.  기단석 위로 연�문양을 한 양련, 중동석, 개첨석, 복련, 보주 등 이름도 생소하다/손현희

 

조선왕조 하늘 같은 권력이 태실까지 파헤치다 

지금 있는 태실 19기 가운데 14기는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몇몇은 다른 태실과 모양이 매우 다르다. 가장 위에 있는 항아리 모양은 오간 데 없고, 땅 위에 올라앉은 연꽃받침 모양으로 된 기단석만 있을 뿐이었는데,,,.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빼앗을때 반대하던 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바로 수양대군의 동생들인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계유정란 때 죽은 안평대군까지 이 다섯 왕자들의 태와 빗돌(장태비)를 모두 파헤쳐서 산 아래로 던져버렸는데 1975년에 다시 찾아내어 이곳에 함께 앉혀 놓았다고 한다.

 

훼손된 태실/손현희

세조의 태실 앞에는 다른 빗돌과 달리 아주 큰 빗돌이 있는데, 비문이 하나도 안보인다. 그 까닭은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 자기를 반대하던 이들의 태까지 파헤쳐 버린 죄가 벌을 받았을까? 세조가 왕이 되었을 때,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실 앞에 '세조대왕 가봉비문'을 써서 빗돌을 세웠으나  

그런데 뒷날 세조가 저지른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이 빗돌에다가 오물을 붓고, 돌로 찧고 갈아서 망가뜨렸다고 한다. 빗돌에 아무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던 게 바로 이런 까닭이다. 

 

세조인 수양대군의 가봉비(좌), 경북 문화재 자료 113호인 선석사(우) /손현희 

 

세종대왕 왕자태실을 받드는 절집 '선석사' 

이 세종대왕 왕자태실 가까이에는 ‘선석사’라고 하는 절집이 있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하는데, 처음엔 지금 자리 잡은 곳보다 서쪽에 있었고 절 이름도 ‘신광사’라고 했는데, 나중에(고려 말쯤)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면서 터를 닦을 때 커다란 바위가 나와서 이름을 ‘선석사’로 고쳤다고 한다.

 

지금도 대웅전 앞뜰에는 그때 나왔던 바위가 삐죽이 나와 있으며 이 절은 세종대왕 왕자태실을 수호하는 절집을 겸하고 있으며 영조임금이 손수 써서 내려준 글(어필)도 있다.

자료 - 오마이뉴스 2007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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