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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남도

천안 596번지방도 병천순대타운 아우내장터 유관순생가 김시민생가

by 구석구석 2007.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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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오가던 서민들 음식 명물로 개발 '병천순대타운'

 병천순대의 역사는 순대집이 즐비한 도로 바로 뒤의 아우내 장터에서 시작됐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의 아우내장은 3백여년 전통을 지닌 시골장으로 유관순 열사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곳이다. 병천순대는 장을 오가던 서민의 출출한 배를 싼값에 채워주던 음식. 그래서 이 지역 중.장년들은 모두 어린 시절 아우내 장터에서 순대국밥을 먹던 기억을 갖고 있다.

추운 겨울 어머니 손을 잡고 장 구경을 나오면 한쪽에서 가마솥을 걸고 뜨거운 국밥을 말아 내오던 모습이 50여년 전 병천순대촌의 초기 정경이다.

 병천순대의 특징은 얇은 돼지 창자에 있다. 다른 지방 순대들과 달리 돼지창자 중 가장 가늘고 부드러운 부분(소창)만을 쓴다. 때문에 순대가 굵지 않아 한입에 먹기 알맞다. 속에는 당면과 두부, 으깬 선지와 야채를 넣는다. 

특히 찹쌀가루와 들깨가루를 섞어 돼지고기의 느끼한 맛을 없앴다. 병천순대의 또 다른 매력은 국물맛. 돼지 사골과 머리뼈를 은근한 불과 센 불을 교대로 24시간 이상 고아 만든다. 이 국물에 깨끗히 손질한 머리고기.염통 등을 가득 담아 내놓는다. 

최근 몇년새 조성된 '병천 순대타운'에는 원조 격인 충남집.청화집 등을 비롯한 30여곳이 성업 중이다. 가격은 순대국밥 3천5백원, 순대접시 6천원. 아우내 5일장(매월 날짜 뒷자리가 1,6인 날)이 서는 날 이곳을 찾으면 시골장의 풍성함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인근에 독립기념관(6km)과 유관순열사 생가(2.5km)가 있다.

/ 자료-중앙일보 조한필기자

그러면 아우내에 장터가 생긴 것은 언제였고 여기엔 또 무슨 연유가 있었을까. 이런 부분은 아무래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귀가 쏠리기 마련이다.

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병천에 머물고 있었을 때, 유명한 지관 하나를 만나 묘자리를 부탁했다고 한다. 며칠을 여기저기 돌아다닌 지관은 근처 은석산 중턱에서 장군대좌형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모양새가 장군만 앉아 있을 뿐 그를 호위할 병졸이 보이질 않았다. 이에 박문수는 은석산 아래 쪽에 시장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장터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군사 역할을 한다는 논리였다.

'원조청화집'

먹음직스런 순대와 머리고기를 듬뿍 얹은 순대 한 접시가 7,000원이며 국밥이 4000원이다. 선지에 배추, 양배추, 생강, 양파 등 20종에 이르는 야채를 고루 섞은 뒤 푹 삶아 만들어 담백하고 고소한 것이 특징인 병천 순대는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웰빙음식’이라고 말한다.

우선 맛있는 순대 제조법을 살펴보면 첫 번째 단계가 갓 들어온 돼지 내장을 물로 깨끗이 씻어낸 다음 밀가루를 이용해 속 뒤집힌 내장 벽을 버무리며 비린내를 없앤다. 두 번째 단계가 내장에 들어가는 '속'을 정성스레 마련하는 것이다.

양배추, 양파, 찹쌀, 마늘, 파, 들깨, 후추, 당면 등의 10여 가지가 넘는 양념을 다지고 버무린 후, 마지막으로 적당한 온도에서 쪄내면 오감이 만족할 수 있는 병천 순대가 완성된다.

머리고기 및 각 종 내장을 보기 좋게 썰어 순대와 함께 한 접시에 가득 담아오고, 사골을 오랫동안 곤 뽀얀 국물에 속이 꽉 들어찬 순대와 머리고기 등이 담뿍 담긴 순대국밥 한 그릇이면 주머니 건강도 지켜주는 우리나라 최고의 토종 음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041-564-1558 / 주차장: 4대 / 오전 8 : 00~20 : 00 / 휴일: 매월 15일

병천 아우내 장터서 40년 지킨 충남집 041-564-1079 

병천 아우내 장터의 순대집들은 신식으로 개조하는 집이 늘어나고 있지만 맛과 명성만은 전통을 고수한다. 이곳에서 40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충남집’은 아우내 장터 순대집의 원조격이다.

얇은 피 속에 갖은 야채, 부드러운 당면, 촉촉한 선지를 듬뿍 담은 순대가 주 메뉴다. 순대는 속을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밀어넣어 씹는 맛이 알차다. 순대국밥(5000원)과 순대 한 접시(8000원)면 순대의 다양한 맛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베스트 순대국집아우내순대041-564-1242 / 병천아우내순대041-571-3066 / 아우내엄나무순대041-568-5561 / 아우내한방순대041-564-1242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를 이용 목천 IC를 나와 조금 직진하면 21번 국도와 만나는 독립기념관 앞 사거리를 만난다. 이사거리에서 21번 국도로 우회전하여 조금 달리면 병천리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만난다. 병천리로 들어가 마을을 통과 아우내농협과 병천우체국이 있는 지점을 지나 병천면사무소 사거리 직전 좌측 편으로 '원조청화집' 간판이 보임.

 병천리 288 /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은 1919년 당시 실제 아우내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에 조성해 역사체험과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기념공원은 입구에 역사광장, 중앙에 독립광장을 조성하고 주변에 상징 조형물 및 녹지공간을 설치하여 자연 친화적이고 환경적 측면을 고려한 교육 문화공간으로 조성한다.

기념공원에는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방문객이 함께 만져보고 사진촬영 등을 할 수 있는 부조·인물군상·조형물·석물 등 4개 분야 8점의 상징작품이 설치돼 관심을 끌게 된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은 유관순열사 사적지, 독립기념관 등과 연계해 지역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 할 전망이다. / 충남일보 심원보기자

지령리에 남아 있는 유관순의 생가와 읍내를 굽어보는 추모각

생가와 추모각은 어린 유관순이 직접 봉화를 올리며 신호를 보냈던 매봉산을 앞과 뒤로 두고 존재하고 있다. 이들을 통해 한국사에서 병천이 갖는 역사적 비중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추모각에선 매년 열사의 순국일을 기념하여 백일장이 펼쳐지곤 했다.

하지만 최근 열사의 영정이 친일파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다. 곧 새로운 영정으로 교체가 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친일의 잔재가 짙게 드리웠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적 제 230호인 유관순 사우

유관순 열사는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이다. 1916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일제 총독에 의하여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즉각 고향으로 내려갔다.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 4월 1일 아오내[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3·1운동 당시에 일본 헌병에 의해 불타 없어진 유의사의 생가터에 유허비를 세웠는데, 1977년 정화사업을 하면서 유관순기념비를 다시 세웠다.

또, 유의사의 오빠 중석이 살던 초가를 기와집으로 개축하였고, 3·1운동 당시의 봉화지인 매봉에는 봉화대와 봉화탑을, 매봉 너머 탑원리에는 유관순사우(사적 제230호 1972년 지정)를 건립개축하고 명칭을 추모각(追慕閣)으로 바꾸었다. 추모각 안에는 유의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전야제를 개최한다.  / 한지호 자동차여행가

매봉교회

병천의 옛 지명은 지령리이며 마을을 둘러싼 산의 물이 흘러 이곳에 모인다 하여 순 우리말로는 아우내라고 불려졌다. 1899년 스웨러 선교사에 의해 이곳에 처음 복음이 전해지며 지령리 교회가 세워졌으며 샤프 선교사와 사애리사(Mrs. Alise H. Sharp) 부인이 공주와 이곳을 왕래하며 선교활동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후 1901년 박해숙 전도사가 이곳에 오면서 교회는 부흥되기에 이르렀다.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는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처하며 상처받고 있을 때 몸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교회이다. 1905년 일본의 강압속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를 한탄하며 을사의병이 일어나 항일운동을 펼칠 때 매봉교회는 을사의병들을 뒤에서 도왔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으로 나라의 빚을 갚고자 할 때에도 주도적으로 활동하여 82명의 교인 명단이 대한매일신보에 실리기도 했다.

이렇게 교회가 주도적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하자 일본은 1905년과 1907년에 군대를 파견하여 두 번이나 교회에 불을 질러 교회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다시 든든히 서갔으며 1907년 교회가 전소된 후 1908년에는 유관순의 아버지인 유중권씨와 조병옥박사의 아버지인 조인원씨가 힘을 모아 교회를 다시 건축하게 되었다.

찾아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를 이용 목천 IC를 나와 조금 직진하면 21번 국도와 만나는 독립기념관 앞 사거리를 만난다. 이사거리에서 21번 국도로 우회전하여 조금 달리면 병천리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만난다. 병천리로 들어가 마을을 통과 아우내농협과 병천우체국이 있는 지점을 지나 병천면사무소 사거리에서 탑원리를 찾아 들어가면 됨.

가전리 김시민생가

병천의 서부에 해당하는 가전리엔 시대를 한참 거슬러간 유적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바로 임진왜란시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의 영웅 김시민의 생가이다. 영웅에 전설이 깃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김시민에게도 다음과 같은 재미난 일화가 따라다닌다.

옛날 잣밭 마을 거북이 바위에 아주 큰 뱀이 살고 있었는데, 자주 사람과 가축들을 해쳤다. 모두들 겁에 질려 벌벌 떨고만 있는데, 겨우 아홉 살 난 소년이 아이 하나를 데리고 뱀의 퇴치에 나섰다. 아이가 바위에 올라가 그 앞의 냇물에 그림자가 비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뱀이 슬슬 기어 나왔다.

소년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몇 개의 화살을 날려 뱀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추었다. 이에 뱀은 그 자리에서 피를 쏟고 죽었는데, 10여 일이나 냇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이 용감한 소년은 물론 김시민이다. 그가 화살로 뱀을 쏘아 죽인 곳엔 현재 사사처(射蛇處)라는 비석을 세워 그의 기상을 기리고 있다. 잣밭은 가전리의 한 지명으로 사실 여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 잣이 많았음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상백(上栢)과 하백(下栢)으로 불리는 현대적 지명도 당연히 잣과 관련이 있다.

이곳엔 안동김씨들이 아직도 일가를 이루며 집단적으로 살고 있다. 순조 때 충렬사를 이곳에 지어 김시민을 배향했으나 고종 때 폐지되고 그 흔적만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천안시에서 사당의 재건 등 유허지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유관순 사적과 함께 항일의 성지로 부각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시대는 달랐지만 유관순과 김시민 모두 일본을 상대로 목숨을 던졌던 것이다.

은석산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목천 IC를 빠져 나와 병천으로 향하다 보면 피라미드 같은 산 하나가 왼쪽에 보이는데, 이것이 은석산이다. 여기에 영조 때 명신 박문수가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의 처음 묏자리는 은석산이 아니라 목천의 흑성산이었다고 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곳이 너무 명당이었던 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이에 어느 지관이, "흑성산은 천하의 길지이다. 그런즉 흑성산에 묘를 쓰면 나라에서 이곳을 크게 쓸 일이 생겨 반드시 나중에 이장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10리 남쪽으로 내려가 은석산에 묘를 써라"고 권하였다.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지금 흑성산엔 독립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은석산은 7~80년대 학생들의 소풍지로도 널리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때는 길이 불편해 산에 들어가는데 애로가 많았다. 지금은 산등성이를 따라 길을 잘 닦아 현지인들은 물론 외지에서도 등산객들이 몰려든다. 산행을 마치고 아우내장터에서 병천의 명물인 순대국을 안주로 하산주를 마시면 신선이 따로 없다.

병천은 일개 면에 불과한 소읍이지만 역사적 유산이 도처에 서려있다. 그만큼 답사지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병천은 산행과 답사를 겸하기에 아주 제격이다. / 오마이뉴스 2007 한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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