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전라북도

무주 37번국도-나제통문 벌한마을 지전마을 무주구천동

by 구석구석 2007. 12. 5.
728x90

 

 

나제통문은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 사이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으로 암벽을 뚫은 인공동문이며,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높이 3m, 길이 10m의 크기로 무주구천동 입구의 경승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김유신장군이 삼국통일 전쟁 시에 왕래했다고 해서 통일문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신선의 품에 안긴 별세계… 무주군 벌한마을
'무진장'으로 대표되는 전북의 오지 덕유산 자락. 이미 덕유산 구석구석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구천동의 한 지류인 벌한천 끄트머리에 있는 벌한(伐寒)마을은 아직도 인적이 드문 곳이다.

폭 5 ~ 6m의 작은 계곡에 지나지 않지만 사철 마르지 않는 맑은 물이 넘쳐 흐른다. 가만가만 발뒤꿈치를 세우고 걷듯 자연과의 교감은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깥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 전북 무주군 설천면의 거칠봉(1,178m)일곱 봉우리와 마주한 벌한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벌한마을은 나제통문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두길리 구산마을이 들목이다. '구천동 한과' 공장 입간판을 따라 들어가면 폐교된 지 오래인 두길초등학교가 웃자란 잡초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만한 좁은 비포장 도로는 구천동 계곡을 가로질러 벌한천 골짜기를 파고든다. 휘황찬란한 조명이 현란하게 춤을 추는 구천동 리조트 단지와 정반대의 1970년대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오지가 많기로 소문난 무주에서도 이런 험로는 없을 것이다.

구산마을과 벌한마을 중간쯤 둔덕에 자리한 방재마을은 빈집이 더 많다.다 쓰러져 가는 토담 아래쪽은 어른 키보다 더 높이 자란 잡초로 덮여 있고, 요즘은 보기 드문 누런 황톳빛 건조막도 여러 채 보인다.

길이 워낙 험해 차에서 내려 걸었다. 한때는 60여 가구가 실았다는 벌한마을 어귀에 다다르니 들이 먼저 반긴다. 늘 겪는 일이지만 미안한 마음에 이런 경우에는 카메라를 들이 댈 수가 없다. 농촌의 현실이 다 그렇듯 벌한이라고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열악한 현실이 젊은이들을 도시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구천동으로 몰리는 판에 이런 골짜기까지 둘러볼 틈이나 있을까, 오랜만에 찾아든 외지인이라 시선이 집중된다.

벌한마을은 성산배씨 집성촌이다. 해발 550m 고지대에 북쪽으로 골문이 열려 매서운 겨울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형이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300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은 옛 사람들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는 것이 거칠봉(居七峯, 1177.6m)과 사선암(四仙岩)이다. 마을 뒤로 감싸 안은 듯 산 병풍을 둘러친 거칠봉은 마을을 향해 일곱 봉우리가 차례로 키를 낮추면 정면으로 트인 골바람을 막아준다.

대대로 이 마을에서 살아 온 배재우 할아버지(76)는 "사선암의 네 신선이 더해 벌한마을을 지켜주고 있어 수백 년 평안하게 살아왔지" 라며 마을 자랑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협소해 보이기만 한 골짜기지만 비교적 농토가 많다. 지금은 묵밭으로 버려져 있지만 할아버지 집 맞은편에는 '큰들' 이라 불리는 운동장만 한 둔덕이 있다.

아이들의 공간인 두길초등학교가 폐교되면서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떠났다. 지금은 모두 아홉 가구, 열네 명의 주민이 전부다.

잠시 비를 피할 겸 동네 어귀에서 만난 배재우 할아버지 댁을 찾았다. 뜻밖의 손님에 할머니는 안절부절못하신다. 내 집 찾아온 손님인데, 뭐라도 대접해야 한다며 극구 사양해 보지만 커피를 내오고, 이런저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신다. 잠시 도회지 생활을 했지만 노부모 봉양을 위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부부는 당신들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고향땅을 지키며 살고 계신다.

할머니는 보디 무풍 출신. 지금이야 길이 잘 나 무주나 설천장을 보러 다니지만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는 걸어서 사선암 산등성이를 넘어 무풍장을 보러 다녔다고. 할머니는 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들려 주신다. 오랜 세월의 향기가 밴 지은 지 300년이 넘은 할아버지의 집, 마당 한쪽
에 놓인 커다란 무쇠솥과 손때 묻은 농기구들, 집안 구석구석이 민속박물관이다. "천하의 구천동이라지만 이제는 벌한천만 못하니 수백년 전 이곳에 터잡은 성산배씨 선조들의 지혜로움과 자연관 덕이지" 라며 할아버지는 자리를 일어서는 일행에게 고향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위클리 프라이데이

 

길산리 지전마을

지전이라는 이름은 이 곳이 예전부터 지초(芝草)가 많이 나던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지며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을 옆을 흐르는 남대천가의 오래된 여러 구의 느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가장 오래된 것은 약 320년 정도로 이러한 나무들이 제방 아래에 있다는 것은 남대천이 마을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방을 쌓은 뒤에 현재의 위치에 식재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뒤로 소백산 줄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마을 뒷산에서 발원하여 마을의 좌측을 지나는 남대천은 여름철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할 만큼 우수한 경관을 뽐내고 있다. 마을은 크게 4개의 군락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마을의 공간구조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개량 기와집 형태의 가옥이 주종을 이루는 전형적인 농가 주택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담장은 본래 기능인 주택의 경계역할을 하는 담장과 외벽의 기능을 하는 담장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마을의 대부분의 담장은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담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석담은 흙과 자연석을 혼용하여 평쌓기를 한 것으로 이어진 담장은 시각적 연속성을 주고 있으며 담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로 처리되었다. 전체적으로 전통 가옥, 남대천, 노거수와 더불어 마을 전체에 식재되어 있는 감나무는 한 폭의 풍경화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이들과 어우러진 담장 또한 산골 마을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아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담장형태 - 토담길이 약 700m의 돌담, 토석담 (전형적인 돌담과 토석담)
* 마을형성 - 17세기 후반 형성, 현 36세대 (78명) 거주

 

 

무주구천동 

구천동계곡은 덕유산국립공원 북쪽 70리에 걸쳐 흐르는 계곡으로 입구인 나제통문을 비롯하여 은구암, 와룡담, 학소대, 수심대, 구천폭포, 연화폭포 등 구천동 33경의 명소들이 계곡을 따라 위치해 있다. 여름철의 무성한 수풀과 맑은 물은 삼복더위를 잊게 해주고,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가을철의 단풍과 겨울철 설경 등 사시사철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무주구천동 33경중에서 제8경인 가의암. 함벽소에서 0.3km에 있으며, 다듬어서 잘 놓은 듯한 반반한 반석이 층층을 이루고 그 위를 흐르는 맑은 물은 비단 폭을 이룬다. 

 

 

무주구천동 33경중에서 제21경인 구월담은 다연대에서 0.3km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월음령계곡과 백련사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서 쏟아내는 폭포수가 담을 이룬 구월담은 형형색색 무늬의 암반이 맑은 물에 잠겨 장관을 이루고 가을 단풍이 물들면 구월담의 가을이 더욱더 아름다워 보인다.

 

 

 

무주 제33경 가운데 제22경 금포탄은 구월담에서 백련사계곡으로 오르다가 0.9km쯤 지점에 있다. 여울진 암반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심산유곡의 바람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면 마치 탄금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28경인 구천폭포는 거울같이 맑은 물이 있는 명경담에서 0.5km 지점에 있다. 층암을 타고 쏟아지는 2단 폭포는 자연이 창조한 예술작품으로, 옛날 천상의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말이 있을 만큼 아름답고 장엄하다.

 

 

 

 

 

 

무주리조트 가족호텔

 

 

산악지형에 어울리는 오스트리아풍 호텔이다. 무주 구천동의 기암괴석과 계곡을 흐르는 물, 폭포 등을 보고 이곳 리조트에서 휴식을 취하며 창밖으로 경치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728x90